77화
수하.
호르헤 경의 자조 어린 목소리가 집무실을 때렸다. 레티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눈앞이 흐릿해졌다가 또렷해지기를 반복했다.
가장 충격을 받은 건 당연히 미카엘이겠지만, 레티시아 역시 좀체 평정을 되찾을 수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일리야 페르 공작의 수하라니.
레티시아는 10년 전, 미카엘의 첫 무도회에서 호르헤 경을 비웃던 페르 공작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어떻게…….’
레티시아는 자꾸만 험한 말이 튀어나오려고 하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간 호르헤 경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사실을 미카엘은 물론 레티시아에게도 털어놓는다는 건 호르헤 경이 단순히 양심을 달래기 위해 황제의 집무실까지 찾아온 게 아니라는 점을 시사했다.
호르헤 경은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해명조차 사치라는 듯 곧바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베아트리체 매로프를 기억하십니까?”
“역시 페르 공작가였나.”
미카엘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레티시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베아트리체 매로프의 진짜 정체는커녕 어느 가문에서 보냈는지도 밝혀내지 못한 건 순전히 자신 탓이었다. 브로치가 불러일으킨 화재가 모두 가라앉고 나니, 한때 살아 숨 쉬던 인간이었던 베아트리체 매로프의 자리엔 재 한 줌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목적은 처음부터 황실의 보물이었습니다.”
“……!”
“처음부터 우즈 양이나 폐하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었죠. 오직 그 브로치를 넘겨받는 게 목적이었을 뿐입니다.”
“예상하곤 있었다.”
미카엘이 고통스러운 한마디를 토해 냈다.
“그래도 그곳까지 레티시아를 끌고 갈 줄은 몰랐어. 당연히 브로치가 발동할지도 몰랐고. 발동 전에, 내가 찾아낼 줄로만 알았다.”
“…….”
“오만했지, 내가.”
레티시아는 품속에서 사자 모양 브로치를 끄집어냈다.
“대체 이건 뭐죠? 페르 공작은 뭘 알았길래…….”
호르헤 경은 레티시아를 향해 몸을 살짝 돌렸다.
“페르 공작은 그 어떤 모략에도 목숨이 꺾이지 않을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어.”
쉰 듯한 목소리.
“우즈 양, 그건… 가능한 모든 타살에서 우즈 양을 구해 줄 거야.”
“말도 안 돼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베아트리체 매로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보고를 듣기 전까지는 옛사람 특유의 과장이라고만 생각했다.”
“……!”
“살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가 브로치의 발동 조건이야, 우즈 양. 그리고 내가 알기론… 저번이 처음은 아니었지?”
침묵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이제는 이질적으로만 느껴지는 브로치를 책상 위에 툭, 하고 떨어트렸다.
“저보다는 폐하께 더 필요한 물건이군요.”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미카엘을 향해 브로치를 건넸다.
“받아 주세요.”
“…….”
미카엘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브로치를 다시 레티시아를 향해 밀어 냈다. 레티시아는 그 이유를 절대 모르지는 않았지만, 미카엘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폐하, 절 노리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아요.”
“…….”
“매로프 양은 예외적인 경우였고, 그마저도 제가 아닌 이 브로치를 노렸고요. 폐하께서 가지고 계시는 게 맞아요. 오히려 그게 더 제게도 안전할걸요?”
그때, 호르헤 경이 불쑥 말을 던졌다.
“폐하보다는 우즈 양이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거다.”
“왜……?”
“폐하께서 그걸 원하시니까.”
호르헤 경은 미카엘을 향해 묘한 시선을 던졌다.
“우즈 양, 우즈 양이 죽으면 폐하께선… 아무것도 하실 수 없게 되지. 그러니 가지고 있도록.”
레티시아는 곧바로 반박했다.
“제가 죽으면, 폐하께선 통역사 역할에 장단을 맞춰 줄 사람을 뽑으시면 그만이에요. 정 적임자가 없으면 경께서 하셔도 되고요.”
호르헤 경은 비웃음처럼 들리기도 하고, 재채기처럼 들리기도 하는 기묘한 소리를 냈다.
“경, 페르 공작이 내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보나?”
“저만 눈치챘을 겁니다. 폐하께서… 우즈 양을 홀로 내보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까요.”
레티시아는 갑자기 말을 돌린 미카엘이 야속했지만, 받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쥐여 준다 해서 브로치의 소유권이 넘어가진 않을 듯했다.
그녀는 브로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왜… 공작은 왜 이걸 원했을까요? 어차피 타살만 막아 준다면서요. 공작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텐데.”
“그게 이상하긴 해.”
미카엘이 동의했다.
“운 좋게 베아트리체 매로프가 완전히 불타 버리지 않았다면 페르 공작은 지금쯤 공작이 아니겠지.”
호르헤 경이 입을 열었다.
“…저는 그 이유를 압니다.”
“뭐지?”
호르헤 경은 브로치를 노려보더니, 시선을 들어 미카엘과 눈을 마주쳤다.
“말씀드리기 전에, 청이 하나 있습니다.”
“뭐지?”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그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하지만… 믿어 주십시오.”
“좋다.”
미카엘의 승낙을 받은 호르헤 경은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심호흡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토 황자를 기억하십니까?”
“……!”
집무실 안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레토 황자는 선황의 막내아들이었다.
선황의 친자들은 미카엘의 즉위 이후, 뿔뿔이 흩어져 후일을 도모했다. 미카엘은 그들 모두를 추적해 나름의 결말을 냈다. 목을 잘라 수도에서 가장 높은 탑에 걸어 놓거나, 평생을 구속할 굴욕적인 충성 맹세를 받아 낸 것이다.
하지만 첫걸음마를 할 적부터 내밀한 궁에 꼭꼭 숨겨져 자란 막내 황자, 레토만큼은 그 행방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이미 질투에 미친 친형제에게 죽었다는 소문이 유령처럼 황궁을 떠돌아다닐 뿐.
미카엘과 레티시아는 마지막까지 그의 족적을 추적했는데, 성과는 단 하나.
미카엘이 선황을 죽인 바로 그날로부터 약 반년쯤 전에, 막내 황자의 관이 황실 밖으로 실려 나갔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막내 황자로 보이는 청년의 무덤까지 찾아낼 수 있었다. 철두철미한 미카엘은 무덤을 파 보라고 명령했고, 막내 황자의 머리색과 꼭 같은 청년의 부패한 시체를 찾아낸 다음에야 마음을 놓았다.
청년의 사인은 독살.
소문이 아주 뜬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선황…이 애초에 염두에 두었던 후계자는 막내 황자였습니다. 그래서 페르 공작 가문에, 막내 황자를 비밀리에 의탁했지요. 본디는 막내 황자로의 후계자 승계가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호르헤 경은 말꼬리를 흐렸다.
이 자리에 있는 셋 모두가 그 결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내가 그 사실을 몰랐지?”
“모르셨던 게 당연합니다. 선황의 다른 황자들조차 몰랐는데, 어떻게 폐하께서 아셨겠습니까? 알았으면 레토 바틀렛이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했겠지요.”
“바틀렛?”
“지금 쓰고 있는 가명입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미카엘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공작은 경을 신뢰하나?”
“예.”
호르헤 경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제 조카는… 저를 썩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오늘부로 끝났겠지만요. 아쉽긴 합니다. 제법 애를 먹었거든요. 여태까지 신뢰를 얻는 데.”
호르헤 경은 가벼이 얘기하려 애쓰는 듯했지만, 레티시아는 그의 목소리에서 지나온 세월 동안 각인된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폐하의 마음을 얻어 방심시키겠다는 편지를 쓰고 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에 속을 사람이었다면 진작 죽었겠지요.”
“…고생 많았다. 앞으로 경은 내가 보호하지.”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경은 더는 내 보호자가 아니야. 그리고 내가 아끼는 사람 몇도 지키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겠지.”
“폐하께선 데브란트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입니다. 폐하를 잃게 된다면 역사의 손실이 될 겁니다.”
“…….”
“분명, 안소니 전하께서도 자랑스럽게 여기실 겁니다.”
미카엘은 대답 대신, 책상 서랍에서 공문을 쓸 때 사용하는 종이를 한 장 빼내 무언가를 서걱거리며 쓰기 시작했다.
당연히, 레티시아의 글씨체로.
처음 미카엘이 그녀의 글씨체로 능숙하게 글을 써 내려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받은 충격은 평생 가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체념하기도 했고, 미카엘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작성을 끝낸 미카엘은 호르헤 경을 향해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의 어깨너머로 그 내용을 훑어보았다.
미카엘은 흰 종이에 써 내려간 석 줄을 통해 호르헤 경을 황제의 오른팔로 임명했다.
상관은 오직 황제 한 명이오, 전 황실의 관료가 그 밑에 있는 관직이었다. 하지만 역대 ‘오른팔’ 중 그 힘을 휘두르거나 직무에 시달리는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상 황실의 웃어른이 앉는 상징적인 자리였다.
호르헤 경이 난감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제겐 과분한 자리입니다.”
“이게 선물이라고 생각하나? 골치 아픈 자리이니 받아.”
“그 반대 아닙니까. 명예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자리인데요.”
“그거야말로 골치 아픈 자리지. 적임자를 찾기 힘드니까.”
잠깐의 실랑이 끝에, 호르헤 경은 처음부터 그가 이길 수 없었던 싸움에서 항복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제 조카의 눈이 뒤집히는 걸 보고 싶으신 듯하니, 더 거절하는 건 폐하의 뜻에 불충한 꼴이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