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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78/150)

78화

“성대한 임명식을 치를까 한다.”

“좋은 생각입니다.”

호르헤 경이 동의했다.

“제 조카는 흥분하면 멍청한 짓을 하니까요. 빈틈을 발견할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페르 공작을 귀빈으로 초청해야겠군.”

호르헤 경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지나친 자극으로 끌어내려고 하는 건 위험한 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궁지에 몰린 개는 문다고 하지 않습니까.”

“잃을 각오가 없는 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법이지.”

미카엘이 부드럽게 말했다.

임명식에 대한 논의가 모두 끝난 후, 호르헤 경은 새로운 직책에 익숙해져야겠다는 핑계를 대며 집무실을 벗어났다.

레티시아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앞으로 미카엘과 호르헤 경은 지난 10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할 것이다.

“호르헤 경은, 괜찮을까요?”

“…네 걱정부터 하는 게 좋겠군. 황위를 노리는 자는 너도 제거하고 싶어 할 테니까.”

“브로치가 있잖아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네가 목숨의 위기를 느끼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으니.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부지런히 그 힘을 모아 둬라.”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이걸 들고 햇볕을 쬐어야겠네요.”

“햇빛?”

미카엘이 얼굴을 찡그렸다.

“줘 봐.”

레티시아는 아무런 생각 없이 미카엘에게 브로치를 건네주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브로치를 쥔 주먹을 난롯불에 집어넣었다.

“폐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레티시아의 목을 꿰뚫고 뛰쳐나왔다.

“지금 뭐 하시는……!”

“괜찮다.”

미카엘은 평온한 얼굴을 가장하려 노력하는 듯했지만 손이 타는 고통으로 인해 자꾸만 얼굴에 일어나는 경련은 감추지 못했다.

레티시아는 이를 악물고 미카엘을 향해 다가갔다. 오른팔을 꽉 붙잡고 넘실거리는 난롯불에서 억지로 빼낼 생각이었다.

“오지 마.”

미카엘의 목소리에서 완강한 감정이 짙게 묻어났다. 레티시아가 차마 더는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강한 감정이…….

“하지만 폐하, 손이…….”

“손이 타는 건 아니다. 단지, 고통만 느낄 뿐이지.”

붉은 불꽃이 미카엘의 손목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것처럼 맹렬하게 타올랐다.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 아무리 브로치가 손이 입을 위해를 대신 흡수한다 해도, 신경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막아 주지는 못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지금 어느 정도 수준의 고통을 느끼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녀 역시, 벼락을 맞은 듯한 고통을 그대로 느꼈으니까.

미카엘은 그런 고통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감내하고 있었다. 오직 그녀를 위해서.

레티시아는 햇살을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려다 억지로 입을 닫았다. 햇살을 흡수한 브로치는 위기 상황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다 해도 상대의 눈을 부시게 하는 정도일 것이다. 호신용 도구로도 못 쓸 수준이 아닌가.

답을 아는 질문을 꺼내 미카엘에게 대답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겨 주는 것도 지금 상황에서 못 할 짓이었다.

레티시아의 생각을 읽었는지, 미카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음에 이게 발동할 땐… 상대의 손이 불타는 수준일 거야. 너는 사람이 죽는 걸 싫어하니까.”

레티시아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답했다.

“제게 사람을 죽이는 취미가 있었다면요? 산 채로 불에 태워지시려고요?”

“그래.”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경련은 미카엘의 얼굴에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이미 식은땀에 푹 젖은 미카엘의 몸 전체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폐하, 그만하면 된 듯해요. 제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면 되잖아요. 그러니 제발, 제발… 그만둬 주세요.”

레티시아의 애원에 미카엘의 몸이 잠시간 굳었다.

“폐하께서 계속 그렇게 하실 필요도 없잖아요. 제가 하면 되는데……!”

레티시아는 놀라 혀를 깨물고 말았다. 미카엘이 별안간 그 자신의 팔을 불 속으로 더 깊숙이 집어넣은 탓이었다.

“보기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미카엘은 자신이 아닌, 그녀를 달래듯 중얼거렸다. 금안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레티시아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왜,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제가 할 일이잖아요. 그런데 왜……?”

“네가 아픈 게 싫어.”

“저도, 폐하께서 아프신 게 싫어요! 그리고 이건 제 몫이잖아요! 제발, 손… 손을 빼내 주세요.”

레티시아는 화도 내 보고, 울면서 애원도 해 보았지만 미카엘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남은 힘을 끌어 올린 듯,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하게 레티시아를 향해 말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야. 널 여기로 데려온 게… 나였으니까.”

입이 바싹 마르고 전신이 뻣뻣하게 굳었다. 미카엘이 약속을 깨트린 바로 그날과 관련된 말을 꺼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레티시아는 그동안 미카엘이 자신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하지만 레티시아가 상상한 그 어떤 경우도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며 미카엘 역시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마침내, 미카엘의 입에서 그렇게나 기다려왔던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미안하다.”

레티시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미카엘에게로 성큼 다가가 그의 몸 전체를 반쯤 끌어안고 뒤로 잡아당겼다.

이미 극도의 고통 탓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움직임에 따라 힘없이 뒤로 쓰러지는 와중에도 그녀에게 브로치를 건네는 걸 잊지 않았다.

“…….”

목이 꽉 멨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향해 흐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화려한 자수가 놓인 가슴팍 위로 투명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녀는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미카엘의 입을 손으로 막아 버린 후, 굳어 버린 혀를 간신히 움직이며 떠듬거렸다.

“…죄, 죄송해요. 제가, 아무런 힘이 없어서……. 아무런 도움이 못 되어서. 늘 짐만 되니까…….”

“…….”

이미 레티시아의 손에는 힘이 풀린 상태였지만 미카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남아 있는 고통의 잔향 탓에 흔들리는, 하지만 집요한 시선으로 레티시아를 바라만 볼 뿐.

* * *

이동 교실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가 속속들이 날아왔다.

레티시아는 테렌스 경에게 계속해서 상황을 전달했다. 테렌스 경은 답장에 국경 지대의 상황을 고스란히 적어서 보내왔는데, 대부분 희망적인 내용이었지만 성난 민심을 뿌리째 뽑는 건 불가능하다는 염려도 간혹 엿보였다.

테렌스 경이 임무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적어 보내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뭐니 뭐니 해도 사업 파트너였으므로 돌아가면 진행할 사업에 대한 장밋빛 구상들이 주를 이루었다.

레티시아는 그 편지들에서 테렌스 경이 생각보다 장사에 큰 자질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역시, 검술 교관을 하기엔 아까운 사람이었어.’

어쩌면 그때의 암살 기도로 검술 교관을 그만둔 게 테렌스 경에겐 맞는 옷을 찾을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미카엘이 탐내겠는데…….’

장사를 잘하는 사람은 국가에도 요긴한 인재가 된다.

레티시아는 테렌스 경에 대해서만큼은 미카엘에게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세간 사람들의 인식과 달리, 국정에 대한 미카엘의 욕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앞으로 두카트를 크게 키울 인재인데, 괜히 미카엘에게 말했다가 뺏기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 * *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기도 한다. 호르헤 볼머가 예고도 없이 미카엘을 불쑥 찾아간 것처럼.

물론 페르 공작가에 대한 세부 보고를 하기 위함이었지만,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단순히 당장 세부적인 보고를 해야겠다는 충동 하나만으로 감히 황제를 독대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호르헤는 이제 예전의 깐깐한 규율에 얽매이기에는 나이를 너무 먹었다.

미카엘은 그가 황궁에 돌아온 이후 항상 그렇듯 집무실에 있었다.

호르헤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젊은 황제는 문을 등지고 선 채, 거대한 유리창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르헤는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미카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보니 익숙한 빨강 머리 비서가 태양을 향해 반짝이는 브로치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햇빛을 아무리 브로치에 담아 봤자 별 위력이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멍청한 짓이었지만, 레티시아 우즈가 활활 타는 불에 손을 집어넣을 위인도 못 되니 지금으로선 최선의 수였다.

미카엘의 굳어 있던 입가에 어느덧 자그마한 미소가 맺혔다. 그는 오직 레티시아 우즈 한 명만을 보고 있었으므로, 호르헤가 눈치채지 못한 그녀의 일면 탓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리라.

호르헤는 다분히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지난 2년간 그는 한 가지 의문을 계속해서 속에 품고 있었다.

왜?

왜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궁을 떠났으며, 돌아왔는가?

그리고 돌아온 황궁에서 그 답을 찾았을 때, 새로운 의문이 그 자리를 지배했다.

“폐하, 이제 만족하십니까?”

“…….”

미카엘에게선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호르헤는 레티시아 우즈 같은 재주는 없었지만, 침묵 속에 담긴 대답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결코 만족할 수 없다.

호르헤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는 젊은 황제의 갈증이 멈출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빌었으나, 레티시아를 보나 미카엘을 보나 그 소원이 이루어질 날은 요원해 보였다.

그때였다.

미카엘이 입을 연 것은.

“…이걸로 충분해.”

호르헤는 미카엘을 찬찬히 응시했다. 미카엘의 시선은 여전히 레티시아 우즈에게 못 박혀 있었는데, 그 모습은 10년 전 호르헤가 충성을 맹세했던 어린 황태자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걸로 충분하다고 자기 자신을 위안하는 것과 진정으로 만족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하지만 호르헤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미카엘 본인이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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