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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79/150)

79화

Chapter 11. 레토 바틀렛

일리야 페르 공작이 패배한 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지막은 2년 전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의 발치에 납작 엎드렸어야 했을 때였고, 그마저도 누구보다도 빠르게 굴종한 덕에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지금, 페르 공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허망한 심정으로 호르헤 볼머가 그를 배신하고 황제에게로 완전히 넘어갔다는 측근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이미 베아트리체 매로프의 재조사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스카 자작가를 던져 주어야겠군.”

페르 공작은 쓰게 대답했다. 호르헤가 저편으로 넘어갔다면, 베아트리체 매로프가 자신과 관계가 있다는 증거를 미카엘이 잡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최대한 빨리 꼬리를 끊어 내야 했다.

“예. 스카 자작의 처자식은 미리 대피시켜 놓겠습니다. 그러면 스카 자작도 마음 놓고 세상을 떠날 수 있겠지요.”

“그럴 것 없다.”

“예?”

“제 아비를 사지로 몬 게 나다. 그 처자식이 누굴 향한 복수를 꾀하겠느냐?”

“아…….”

“스카 자작이야 어차피 처형 전까지 감옥에 갇힐 테니 우리 말곤 접근할 이가 없다. 처자식은 무사히 도망쳤다고 말해 주면, 편히 죽을 수 있겠지. 실제로 대피시키는 쓸데없는 동정심은 쓰지 마라.”

측근은 페르 공작의 핀잔에 뼈아픈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얼굴을 딱딱히 굳힌 채 대답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각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보고가 끝나고 측근이 돌아간 이후, 페르 공작보다 더욱 값나가는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창백한 얼굴에 잿빛 눈, 검다 못해 푸른빛을 띠는 머리칼을 가진 젊은 남자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페르 공작을 응시했다.

천천히 열린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자를 믿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레토 님……!”

얼굴이 하얗게 질린 페르 공작은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했다.

“핏줄? 나와 한배에서 태어난 이들을 보면 모르나. 친형제들도 서로 죽고 죽이다 백치를 지존의 자리에 올려 준 판인데, 겨우 숙부라는 허울뿐인 관계를 믿어?”

“지난, 몇 년간…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황실에 해가 가는 일들도 망설임 없이 도맡았기에 충분히 쓸 만한 말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람을 잘못 봤군요.”

페르 공작은 무조건 사죄할 수밖에 없었다. 레토 바틀렛의 만류에도 불과하고 돌아온 호르헤 볼머가 충성심을 보이자마자 온갖 권한을 쥐여 주면서 요긴한 도구로 쓰던 게 바로 그였기에.

그동안 선황이 그렇게 입이 닳도록 칭찬한 레토 바틀렛의 재능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토의 의견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맞아떨어졌다.

그때마다 페르 공작은 확신했다.

결국, 제국에서 가장 드높은 자리에 앉을 남자는 바로 이자라고.

“그 백치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격이야. 자네가.”

“앞으론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호르헤 볼머는 조만간 목이 제자리에 붙어 있지 못할 겁니다.”

“그래야지.”

레토 바틀렛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래야 자네 목이 제자리에 붙어 있을 테니까.”

* * *

레토 황자가 그 천재성을 드러낸 건 겨우 세 살 때였다. 그는 이미 그 나이에 성인들과 자유자재로 대화할 수 있었으며 손위 형들과 함께 듣는 수업에도 동등한 수준으로 참여했다.

그의 아버지, 제국의 황제가 특단의 결정을 내린 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그날로 레토 황자는 내밀한 궁에 갇혀 자라게 되었다.

같은 날, 방계 황족 안소니와 그의 아내는 불행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갓난아기에 불과했던 그들의 유일한 독자 미카엘은 황제가 보낸 용병들의 손에 맡겨졌다.

그 조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황자는 아무도 없었다.

후계자는 정해졌다.

겨우 세 살짜리로.

당연히 레토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레토 황자는 더욱 황궁 깊숙한 곳에 숨어 자라게 되었고 황제의 총애만 깊어졌다.

차라리 황자 중 레토를 살해하는 데 성공하는 자가 있었다면 황제의 눈에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레토를 살해할 정도로 능력 있는 자가 없었고, 황제의 눈에는 결코 영특한 막내아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쭉정이들에 불과했다.

레토 황자는 세 살 이전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죽은 이후, 그가 아는 사람들은 오직 그의 말 한마디에 벌벌 기는 이들뿐이었다.

황제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던 황후는 그녀 이전의 황후들이 그랬듯 아들을 노린 암살 기도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레토가 안하무인으로 큰 건 결코 타고난 성정 탓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레토는 폭력과 권력에서만 흥미를 느끼는 괴물로 성장하였고, 자신의 말에 조금이라도 불복하는 자는 모두 잔혹하게 살해했다.

그 결과, 그가 숨어 사는 궁에선 한 달에 사용인 한 명은 시체가 되어 나왔다. 따라서 결국 그가 관에 실려 나갔을 때도 그의 정체를 알았던 사용인들은 드디어 저 잔혹한 괴물이 죗값을 받았다고 여겨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건 황제의 눈속임에 불과했다. 레토와 닮은 평민 청년을 독살하고, 가짜 무덤에 파묻은 것이다.

자유에 대한 막내아들의 갈망을 더는 달래기 힘들었던 건 물론, 황제의 자질을 갖추기엔 우물 안 개구리 생활로는 부족하다는 황제의 생각에 레토는 마침내 궁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페르 공작가에 그 누구보다도 드높은 상전으로서 살게 된 레토는 그간 그렇게 갈망하던 자유를 맛보게 되었다.

제국은 책과 멍청한 교사들의 이야기로 듣는 것보다 훨씬 드넓었으며 다채로웠다.

그중 무엇보다도 레토를 사로잡았던 건 바로 군대였다. 페르 공작의 사병만 해도 그 규모가 제법 되었기에 전 병력이 모여 훈련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사형은 또 어떻고!

레토 바틀렛은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의 즉위와 더불어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린 처형식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비록 그는 저들과 함께 목이 매달릴 운명에서 간신히 벗어났지만, 살육은 항상 레토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레토 바틀렛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기에 황궁을 나온 이후부턴 사적인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이후에 있을 더욱 큰 살육을 기다리며 충동을 억제했다.

그때, 그는 더는 살인자나 괴물이 아닌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이자 정복자로 불릴 것이다.

레토 바틀렛은 기나긴 회상에서 깨어났다. 황좌에 오르기 전까진 자신은 페르 공작가에 빌붙은 식충이일 뿐이었다.

그리고, 본디 마땅히 그 자신이 차지했어야 할 자리는 선황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웬 방계 황족에게 가 있었다.

‘조금만 누리고 있거라.’

레토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곧 제 주인을 되찾을 자리이니.’

* * *

베아트리체 매로프에 대한 조사는 페르 공작가의 옛 가신 중 하나인 스카 자작가를 가리켰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폐하, 이건 페르 공작가를 멸문시킬 명분이 되고도 남습니다.”

펄펄 뛰는 호르헤와는 달리, 미카엘은 얼굴을 찡그리며 보고서를 들여다보기만 했다.

“…아직은 일러.”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즉위 초처럼 강하게 나가지 못하는 이유를 알았다. 현재 미카엘의 권력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 제국을 지탱하는 대귀족 중 하나를 겨우 옛 가신이 황제의 비서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멸문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 않아도 귀족들의 머릿수가 줄어들었는데, 명확한 연결 고리도 잡지 못한 상태에서 역모죄로 전 일가를 몰살하면 심한 반발이 일어날 테니.

하지만 호르헤는 그 이유를 모르거나, 알아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정 그러시면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경.”

미카엘이 호르헤를 응시했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도록.”

“…….”

호르헤는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워 보이는 눈치였다.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이 레티시아를 엄습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도박수를 던지려는 미카엘을 호르헤 경이 만류했다.

그 모습이 레티시아가 아는 둘의 모습이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호르헤 경이 성급하고 굴고 있으며 미카엘은 그런 그를 만류했다.

“나도 레토 바틀렛을 우습게 보는 건 아니다. 내가… 아직 황태자였을 때, 그의 존재는 내게 드리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였지. 그 정체를 눈치챘을 땐 이미 황궁을 빠져나간 뒤였다.”

“그러니 더 커지기 전에 쳐야 합니다.”

“여태까지 쌓은 걸 그르칠 수도 있어.”

레티시아와 호르헤는 일제히 놀란 눈으로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미카엘은 항상 모험을 즐겨 왔다. 심지어 도박대 위에 그의 목숨을 올려다 놓은 적도 여러 번이었고.

그런 그가, 잃는 걸 두려워한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현재 페르 공작가를 치는 모험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저런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무언가가 미카엘의 심경을 변화시켰다. 그 이유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불안이 샘솟았다. 하지만 레티시아와 달리, 도리어 호르헤는 금방 납득한 듯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지나치게 성급했던 듯합니다. 늙은이의 노망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아니야. 경의 의견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다만…….”

미카엘은 허공을 노려보았다.

“레토 바틀렛, 그자의 경우 조금 신중하게 접근하고 싶을 뿐이다. 허투루 볼 자가 아니니.”

“그러면 굳이 페르 공작을 자극할 필요가 있을까요?”

레티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중하게 접근한다면 호르헤를 황제의 오른팔로 임명하는 성대한 연회를 열 필요도, 그 연회에 페르 공작을 귀빈으로 초청할 필요도 없다.

괜히 페르 공작과 레토 바틀렛을 자극시켰다간 미카엘이 걱정하는 것처럼 판을 그르칠 수 있다.

“필요해.”

미카엘이 천천히 말했다.

“토끼는 굴 밖으로 나와야 잡을 수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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