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오색찬란하다.
레티시아가 연회장을 한 바퀴 둘러보며 내린 결론이었다.
전 제국의 내로라하는 장인들이 매달려 새로이 정비한 연회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하게 빛났다. 수백여 년 전 거장이 그린 천장화는 새로이 장식한 샹들리에 수십 개의 강렬한 빛을 받아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고, 벽면의 조각은 황실이 아닌 제국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준비된 음식들은 또 어떻고.
황실의 요리사들은 일주일 동안 매달려 예술 작품에 비견될 만한 음식들을 창조했다. 당장이라도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비상할 것 같은 독수리 모양 케이크와 차마 입에 넣기가 아까운 정교한 설탕 조각들, 마치 요정 숲처럼 연출된 애피타이저까지.
맛보다 모양에 중점을 둔 티가 났지만, 어차피 먹고 즐기기 위해 열린 연회가 아니다. 요리사들은 과시와 도발이라는 목적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레티시아는 사치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사치스러운 축하연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에 가까운 이 연회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서들을 읽어 보면 역대 황제들은 성대한 연회를 자주 열었던 듯했지만, 미카엘만큼은 예외였다.
그동안 그가 이렇게까지 성대한 연회를 연 적은 없었다. 딱히 축하할 일도 없었을뿐더러, 그 어느 때보다도 성대해야 할 즉위식조차 주요 귀족 가문들의 줄초상이 난 탓에 조용히 치러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미카엘은 이 연회를 통해 굴 안에 웅크리고 있는 페르 공작이 분노에 겨워 뛰쳐나오기를 원했다. 그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페르 공작가에서 애지중지하는 보물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마침내 연회가 시작되었다.
잘 차려입은 귀족들이 차례로 입장하며 미카엘 앞에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모두 미카엘이 아닌 소문의 주인공, 호르헤 볼머에게 못 박혀 있었다.
레티시아와 미카엘이 고르고 골라 초대한 손님들은 속이야 어쨌든 겉으로는 호르헤 경의 오른팔 부임을 열심히 축하하기에 바빴다. 귀를 기울여 보니 그 이상의 적임자가 없다는 찬사가 대부분이었다.
입장이 끝나자 제국 최고의 음악가들이 연주회를 시작했다. 일리야 페르 공작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손님들의 주의를 돌려놓으려고 애쓰면서.
상당히 공을 들여 번역해야 했던 미카엘의 축사 이후 할 일이 없어진 레티시아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호르헤 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일전에 알던 사람들과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르헤 경은 처음엔 이 연회 자체에 참석하지도 않으려고 했다. 연회에 나선 건 너무 오래전이었을뿐더러, 황제의 오른팔인 자신이 사소한 말실수라도 했다간 미카엘에게 폐가 된다는 이유였다.
물론, 호르헤 경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딸기가 빠진 딸기 케이크가 되는 격이라 레티시아가 극구 말렸지만.
그때, 레티시아의 귓가에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티시아 님.”
레티시아는 고개를 홱 돌렸다.
얼굴도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마도 처음 보는 듯한 하녀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한때, 레티시아가 미카엘의 비서로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그녀의 옛 위치와 지금 위치를 헷갈렸던 옛 동료들이 종종 도움을 청해 오곤 했다.
레티시아는 흔쾌히 도움을 베풀었는데, 그녀에겐 얼마 품이 들지 않는 일로 옛 동료들이 얼마나 편해지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옛 동료들 역시 염치를 알았기 때문에 해가 지날수록 레티시아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줄어들었다.
따라서 이 하녀는 상당히 급한 일로 레티시아를 불렀을 가능성이 높았다.
“무슨 일이죠?”
“어떤 기사님이 이걸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하녀는 그녀를 향해 작은 소포를 내밀었다. 값비싼 포장지로 예쁘게 싸인, 레티시아가 그간 테렌스 경에게 받아 오던 선물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레티시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는 소포를 받기는커녕, 천천히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하녀는 눈치 없게도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아니,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없는 체를 했을 뿐이리라.
레티시아는 단호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버리세요.”
“네?”
“못 들었어? 버려.”
“레티시아 님, 그게 무슨…….”
레티시아는 더는 하녀, 혹은 하녀를 가장한 누군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왼손을 주먹 쥔 채 위로 들어 올렸다.
군중에 숨어 있던 기사가 조용히 그녀의 곁에 나타났다.
“당장 조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하녀 한 명이 건장한 기사에 의해 제압되어 연회장에서 끌려 나갔건만 누구 한 명 신경 쓰는 이 없었다.
레티시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축하연으로 정신이 없다고 한들, 저런 하찮은 수에 자신이 넘어올 것으로 생각한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레티시아가 평민이라고 해도 황제의 비서이다. 호의가 담긴 선물을 보내오면서 자신의 신분조차 밝히지 않을 놈팡이는 없다. 그것도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황궁의 하녀를 동원해서?
‘애초에 진짜 하녀도 아니겠지.’
눈썰미 좋은 레티시아는 하녀라기엔 지나치게 부드러운 손을 놓치지 않았다. 분명 어느 좋은 집안의 아가씨이리라.
“레티시아.”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레티시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석에 앉아 주위 귀족들을 알쏭달쏭한 눈빛으로 바라보아 겁을 주던 미카엘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폐하, 여기 계시면……!”
“조개.”
이제 미카엘은 정말로 알아듣기 쉬운 말을 구사했다. 레티시아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길.”
미카엘은 그를 따라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디… 어디로 가시려고요?”
“이정표.”
“…알겠어요. 폐하만 따라갈게요. 제가 뭐 언제 거부한 적이 있었나요.”
레티시아는 툴툴거렸다. 가끔, 아니 상당히 자주 미카엘의 요구에 이렇게 따르기만 해야 할 때가 있었다. 레티시아는 나름 반발하면서도 그에게 따르곤 했는데 거의 모든 경우 미카엘의 결정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이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면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레티시아는 다른 사람을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만 하는 삶을 살 성정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삶을 살 기회는 아주 예전에 지나가 버렸다.
‘……!’
마침내 미카엘이 이끄는 곳에 도착한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미카엘은 연회장의 기둥 그림자 속, 즉 누구의 시선도 피할 수 있는 사각지대로 레티시아를 안내했다. 만약 작정하고 이곳으로 와서 그녀를 찾으려 한다면 충분히 찾겠지마는, 단순히 드넓은 연회장과 그 인파 속에서 레티시아를 찾고자 한다면 암만 빨강 머리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려 봤자 힘들 것이다.
레티시아의 얼굴에 한 줄기 햇살 같은 미소가 스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전 폐하 곁에 있겠어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미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소파.”
당연히, 휴식을 취하라는 뜻이었다.
레티시아는 잠시 갈등하다가, 결국 미카엘의 제안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알겠어요. 대신,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당장 달려갈게요. 꼭 제가 여기서 볼 수 있는 위치에 계셔야 해요, 네?”
“레티시아.”
그것이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레티시아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자신은 미카엘의 바로 이런 모습 탓에 그를 떠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얼마간 후.
레티시아는 그림자 속에서 휴식을 취하며 주위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 상당히 조심스럽던 귀족들은 술이 들어가자 역시나 맨정신으로는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말들을 쏟아 냈다.
“역시 안 오는가 보죠?”
“저라도 안 옵니다. 사실상 조롱 아닙니까?”
“쉿, 벽에 귀가 있습니다.”
“귀가 있으면 뭐 합니까. 말하지를 못하는데…….”
“허어, 이 사람이!”
레티시아는 입구를 흘낏 바라보았다. 연회가 끝나 가고 있었지만 페르 공작은커녕 페르 공작가의 마차만 황궁 입구에 들어서도 달려오기로 되어 있는 전령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뭐, 미카엘은 이것조차 예상했으니까.’
처음부터 미카엘은 페르 공작이 연회에 참석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생각했다.
페르 공작은 황실 연회에 대한 초대장을 받자마자 몸이 아파 참석이 불가할 수도 있으니 양해해 달라는 답장을 전령의 손에 들려 보냈다.
물론, 그런 수작에 넘어갈 미카엘이 아니었다. 페르 공작 당사자의 참석이 어렵다면 친족이라도 보내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페르 공작의 대답은 상당히 볼만했다. 공작가에 함께 기거하는 일족은 모두 동일한 병에 걸렸으며, 방계는 모두 황제 폐하의 손에 의해 처형당했거나 지방으로 유폐되었기에 보낼 사람이 없다는 내용이 유려한 미사여구로 길게 풀어져 있었다.
미카엘은 일체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레티시아는 알았다. 무표정을 가장한 그의 속엔 분노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을.
따라서 이 무례한 답장을 빌미로 페르 공작가는 물론 방계 일족까지 모조리 멸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호르헤 경을 설득하는 건 레티시아의 몫으로 남았다.
다행히 호르헤 경은 레티시아가 ‘함부로 멸문시켰다간 폐하께선 페르 공작의 숙부인 경도 처형하라는 압박에 시달리실 거예요.’라고 대꾸하자마자 곧 입을 다물었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페르 공작을 불러내지는 못했지만, 그의 동맹들을 불러 모으는 데까진 성공했다. 그만하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그때였다.
“페르 공작 각하의 대리인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이 모두가 예상치 못한 소식을 소리쳐 입 밖으로 낸 것은.
한 남자가 천천히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창백한 얼굴에 매서운 눈빛. 기저에 깊이 가라앉은 열망을 언뜻 엿볼 수 있는 눈. 스치듯 본 것만으로도 꿈에 나올 것만 같은 강렬한 인상을 주는 남자.
마치 젊은 선황이 살아 돌아온 듯한 모습에 일제히 수군거림이 일었다.
레티시아는 바로 그를 알아보았다. 공작 대리인의 정체는 바로 선황의 막내 황자, 레토였다.
“하늘 아래 가장 고귀하신 분을 비천한 바틀렛이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