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아마 군중들 중 레토 바틀렛의 정체를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 자체가 너무나 선황의 핏줄이라고 외치고 있었기에, 웬만한 고위 귀족들은 모두 레토 바틀렛의 신분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신분을 추측하는 수군거림이 대놓고 사방에서 들려왔다. 죽었다 알려진 막내 황자라는 말은 들리지 않고, 사생아라는 추측이 우세해 보이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충격도 잠시, 레티시아는 재빨리 그림자 속에서 빠져나와 미카엘에게로 다가갔다. 레토 바틀렛의 등장에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레티시아가 없다면 미카엘은 누구에게도 스스로 의사를 밝힐 수가 없다.
“…….”
미카엘의 입술이 미미하게 실룩거렸다. 레티시아는 그의 말을 기다렸지만, 귀에는 미미한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공작 각하께서는 병환으로 폐하의 명을 거스르는 결례를 범했음을 극구 사죄하고 계십니다.”
“…….”
“미약한 선물이나, 부디 받아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레토 바틀렛은 그를 따라온 시종에게서 값비싼 금속제 상자를 건네받았다. 단단히 밀봉된 상자는 제법 무게가 나가 보였다.
‘뇌물인가.’
레티시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데브란트 제국은 거듭된 내분에도 불구하고 부강한 나라였다. 저 상자를 금은보화로 꽉 채웠다 한들 미카엘의 마음이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평범한 선물일 리가 없다.
미카엘은 손짓으로 황실 시종을 불러 레토 바틀렛의 선물을 가져가게끔 했다. 레티시아는 속으로 웃었다.
황실 시종은 레토 바틀렛의 선물을 혼자 열어 본 다음, 미카엘에게 누가 되거나 조롱하는 성격의 선물이라면 조용히 없애 버릴 것이다.
하지만 레토 바틀렛은 시종에게 순순히 선물을 건네주기는커녕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외람되오나 공작 각하께서는 이 자리에서 열어야 비로소 완성될 선물이라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
미카엘은 그를 대놓고 노려보았다. 레티시아는 초조하게 미카엘의 말을 기다렸다. 이 자리에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미카엘의 말을 잘못 전달한다면 유혈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덮개.”
“…폐하께선 공작 각하의 선물을 레토 바틀렛 씨가 직접 열기를 원하십니다.”
미카엘의 결정은 레티시아가 예상했던 바였다. 페르 공작의 수야 뻔했다. 이 자리에 모인 수많은 귀족들 앞에서 귀한 선물을 내보여, 자신이 그렇게나 대단한 선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과시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은 레토 바틀렛이 이 자리에서 직접 열어 보라고 명했다.
만약 페르 공작의 생각대로 선물을 받아들이는 게 페르 공작가에 도움이 된다면, 그대로 선물을 레토 바틀렛에게 들려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레토 바틀렛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조금의 틈도 없이 밀봉된 금속제 상자의 잠금쇠를 풀고 힘을 주어 열었다.
“……!”
군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광경이었지만, 그 누구도 감히 이 상황에서 소리 내어 비명을 내지르지 못했다.
레토 바틀렛이 연 상자에는, 잘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가 들어 있었다.
죽은 남자는 도저히 닥쳐 온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바싹 말라 가는 입을 벌린 채 눈앞의 광경에 허망하게 시선을 고정했다. 속이 울렁였지만,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 남자를 알았다.
스카 자작.
레티시아처럼 시뻘건 머리에 관자놀이에 큰 흉터가 있던 스카 자작은 페르 공작가의 옛 가신이자 제국에서 소문난 애처가였다.
그리고 베아트리체 매로프가 황실의 신분 조사를 통과하고 미카엘의 통역사가 될 수 있도록 조력한 사람이기도 했다.
레토 바틀렛의 싸늘한 목소리가 고요한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스카 자작은 감히 황궁에 암살자를 잠입시켰습니다. 죽어야 마땅한 자이기에, 공작 각하께선 눈물을 머금고 옛 가신을 직접 처단하셨습니다. 부디, 성의를 봐서라도 오늘의 결례는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
미카엘도, 호르헤도 증거가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어차피 스카 자작이 베아트리체 매로프를 보냈다는 증거는 이미 황실이 쥐고 있었기에.
문제는, 스카 자작의 입이 영영 틀어막혔다는 점이었다.
스카 자작을 처형한다는 건 처음부터 미카엘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스카 자작을 어떻게든 회유해 페르 공작과의 연결 고리를 드러내려고 했다. 그 탓에 아직 체포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공을 들인 스카 자작은 지금, 싸늘하게 식은 시체가 되어 있었다.
누구도 감히 연회장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지 않았다.
미카엘이 천천히 시선을 레토 바틀렛과 맞추었다. 레토 바틀렛은 황제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쳤다. 그는 선황을 쏙 빼닮았기에, 타자가 보기엔 무척이나 기묘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 연회장엔 타자라곤 없었다. 오직 물고 물리는 정쟁의 당사자들만이 있을 뿐.
레티시아는 둘이 마치 거울에 비친 상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서로를 쏙 빼닮았으면서도 동시에 정반대이기도 한, 결코 같은 공간에 존재할 수 없는 것까지…….
미카엘은 레토 바틀렛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레티시아 역시 그의 말을 전달해야 했으므로 미카엘을 따랐다.
문제는, 잘린 목에서 피비린내가 훅 끼쳐 올라왔다는 점이었다.
피비린내만 있으면 다행일까, 연회장 안의 달큼한 다과 냄새와 뒤섞여 구역질 나는 냄새로 변했다.
그렇지 않아도 울렁이던 속이 요동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럴 때가 아니야.’
레티시아는 헛구역질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다행히 촌극은 면할 수 있었지만, 눈가에 고이기 시작하는 눈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붉어지는 눈가를 황급히 손등으로 닦으며 미카엘의 곁에 섰다.
어쨌거나 자신이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번역기라서였고, 따라서 번역기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미카엘은 레티시아 우즈를 항상 의식했다. 의식 한구석은 항상 그녀의 기척을 좇고 있었고, 그가 레티시아에게서 의식을 거둔 순간은 인생에서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모든 신경을 눈앞의 남자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레토 바틀렛은 그가 가지지 못한 모든 걸 가진 남자였다. 혈통, 선황의 총애, 통치자 교육…….
미카엘이 허수아비 황태자였던 시절, 사랑받는 막내 황자의 존재는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당시 미카엘은 애당초 황좌를 차지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특정한 황자의 밑에 붙었다간 황제에게 밉보여 찍혀 나갈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최대한 황태자로서의 위치를 지키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레토 황자의 존재는 그런 소박한 목표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미카엘에게 암살 시도가 몰리는 것도 잠시, 누가 보아도 유력한 차기 황제였던 레토 황자를 살해하려는 자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즉, 황제가 미카엘이 화살받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심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미카엘은 중간보고에 손을 써 일어나지도 않은 암살 시도 보고를 끼워 넣었다. 그렇게 문제는 해결했지만, 본디 차기 황제가 될 예정이었던 레토 황자의 존재는 오래도록 그를 괴롭혔다.
그런 그가 허무하게 독살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미카엘은 비로소 자신이 완전히 승리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레토 황자는 돌아왔다.
더는 황자가 아니었지만, 혈통을 과시하는 외양은 여전했다.
미카엘은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그를 본 순간 직감했다. 자신은 앞으로 페르 공작가가 아닌, 선황의 망령과 싸우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불만을 품은 자들은 다른 어중간한 황족이 아닌 레토 바틀렛에게 가담할 것이고, 레토 바틀렛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선황을 상징할 터이니 쉽지 않은 싸움이 되리라.
하지만 무언가 미카엘의 신경을 건드렸다.
페르 공작은 10년 전, 호르헤 경과 함께 황태자였던 자신을 실각시키려다가 반절 실패했다. 그 이후 페르 공작이 다소 무모했던 이전과 달리 눈에 띄게 조심스러워졌다는 사실을 황궁 내에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런 그가 레토 바틀렛의 화려한 데뷔를 꾀했다?
‘말렸는데 말리지 못했거나… 아니면 애초에 통보조차 듣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미카엘이 아는 페르 공작은 여태까지 고이 숨긴 레토 황자를 이렇게 보내느니 차라리 본인이 직접 오는 걸 택할 사람이었다.
그 말은, 이 모든 게 레토 바틀렛의 독단이라는 뜻이었다.
어쩌면, 스카 자작의 살해까지도.
미카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 잘된 일이었다.
레토 바틀렛은, 페르 공작의 말을 듣는 게 나았을 것이다.
“입구.”
언제나 안정감 있게 그를 뒤받쳐 주는 레티시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폐하께서는 받을 수 없는 선물이니, 다시 가져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레토 바틀렛은 사과 한마디 없이 상자를 닫았다. 그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호르헤를 바라보았다.
“경사를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바틀렛.”
호르헤가 딱딱하게 말했다.
레토 바틀렛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입꼬리를 실룩댔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미카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물러나 보겠습니다.”
“유리.”
레티시아가 흠칫 놀라며 몸을 굳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떤 반문도 없이 미카엘의 뜻을 연회장 안 모든 사람에게 명료하게 알렸다.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바틀렛 씨께선 이제부터 황실의 손님이십니다.”
“봄.”
“봄이 올 때까지는 황실에서 머무르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