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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82/150)

82화

“……!”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말을 풀어서 전달하는 당사자이면서도 자신의 귀에 울리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호르헤 역시 그녀와 딱히 다르지 않은 얼굴로 미카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군중의 반응도 심상치 않았다. 개중 대놓고 크게 반대하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레티시아는 차라리 태어나서 처음으로 번역기 역할에서 벗어나 미카엘의 말을 바꾸거나 한 차례 반문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황실의 손님이라니.

미카엘의 의중을 아예 짐작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레토 바틀렛은 이미 스카 자작의 시체를 감히 호르헤 경의 축하연에서 선보이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제국 역사상 이보다 더 강렬한 데뷔탕트는 없었을 것이다.

이미 그 외모로 선황의 핏줄이라는 게 증명되었다. ‘레토’라는 이름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레토 바틀렛이 이 연회에 나타난 목적을 생각한다면 이곳에 모인 귀족들이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즉, 레토 바틀렛을 그대로 돌려보냈다간, 그가 황궁 입구를 나서는 바로 그 순간부터 미카엘에게 반감을 품은 자들이 달라붙는다 하여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미카엘이 레토 바틀렛을 황궁에 붙들어 놓으려는 건 옳은 선택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황실의 손님으로서라면, 페르 공작가도 항의할 수 없을뿐더러 레토 바틀렛도 결코 거부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황실의 손님이라는 바로 그 점이 문제가 되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쥐여 주는 격이야.’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본디 황궁은 번듯한 작위가 있는 귀족만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었다. 레토 바틀렛이 선황의 적자라 하더라도 신분을 숨긴 신분은 그저 평민일 뿐.

페르 공작은 그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보낸 것만으로도 위험천만한 수를 둔 셈이었다.

미카엘은 마음만 먹으면 레토 바틀렛을 구금하고 페르 공작에게 일개 평민을 자신에게 보낸 사실에 대해 엄중히 경고할 수 있었다. 사실, 지금 레토 바틀렛을 붙들어 놓아야 한다면 그 방법이 가장 무난한 수였다.

하지만 미카엘은 황궁을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작위를 레토 바틀렛에게 부여했다.

황실의 손님은 일종의 작위였기에 대부분의 경우 평민처럼 결례 수준은 아니나 감히 황궁에 발을 들일 수 없는 하급 귀족에게 부여되었다. 가끔 공을 크게 세운 평민이 황실의 손님이 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무려 황제의 비서지만 평민 신분인 레티시아보다 더욱 높은 위치였다.

물론 그 작위가 세습되지 않고 언제라도 황제의 명에 의해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귀족 취급은 받지 못했지만, 신분을 숨기고 반역을 꿈꾸고 있는 자에게 내리기에는 과분한 자리였다.

레토 바틀렛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말을 읊었을 뿐이었다.

“방.”

“곧 거처를 안내받으실 겁니다. 일단은 저… 선물과 함께, 밖에 대기하고 있어 주십시오.”

레티시아는 떨떠름하게 미카엘의 말을 전달했다. 조금 전 들은 황제의 명이 단순한 눈속임이나 말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한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개중 감히 미카엘에게 간언을 올릴 용기 있는 자도 있었다.

“폐하, 제 목숨은 한 개이오나 지금만큼은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근본도 모르는 평민입니다. 그런 자를 황실의 손님으로 들이다니요!”

“…….”

미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미카엘에게 소리친 충신, 컴스톡 백작은 그 작위도 목숨도 무사할 것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레토 바틀렛의 입에서 패배자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이젠 밀봉이 되지 않아 피비린내가 새어 나오는 상자를 든 채 연회장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미카엘은 레토 바틀렛이 연회장을 완전히 나가자마자 연회의 종료를 명했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 공기 중 피비린내처럼 군중들 역시 조금 전 본 광경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레티시아는 연회가 완전히 끝나고 단둘이 있게 된 이후에도 미카엘에게 왜 레토 바틀렛에게 황실의 손님이라는 신분을 내렸는지 묻지 않았다. 일그러진 레토 바틀렛의 얼굴이 충분한 대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미카엘이 그녀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 아니었으며 또한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 * *

일리야 페르 공작은 싸늘한 얼굴로 보고서를 책상에 내팽개쳤다.

“…….”

욕이 목구멍까지 꽉 올라왔지만 미래의 주군을 가신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대충 기대앉았다. 사태를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레토 바틀렛은 나름 보안이 삼엄한 페르 공작가를 손쉽게 빠져나가서, 스카 자작과 그 가족을 살해했다.

단지 목을 황제에게 가져가기 위한 목적의 평범한 살해가 아닌, 그 자신의 욕구를 채우듯 필요 이상으로 잔혹하게 일가족을 살해한 현장에 페르 공작의 하수인들마저 혀를 내둘렀다.

‘가족도 모두 죽인 건 잘했군.’

페르 공작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기왕 죽인다면, 당사자 한 명만 죽이는 게 최악의 수였다. 그 가족을 모두 몰살시킨 덕에 쓸데없는 후환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레토 바틀렛의 납득할 만한 행보는 끝이었다.

연회장에 심어 놓은 첩보원들은 황제가 얼마나 간단하게 레토가 펼쳐 놓은 함정에서 빠져나왔는지 보고했다. 정작 레토 바틀렛은 멍청하게도 황제의 역공에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는 사실과 함께.

레토의 행동이 납득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상당히 훌륭한 계획이었기 때문에 더욱 분통이 터졌다.

상대가 살을 내주면서 뼈를 치는 전법을 구사하는 황제만 아니었어도 완벽하게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패배는 패배였다.

그리고 그 패배의 뒷수습은 오롯이 페르 공작가에서 해야만 했고.

‘…….’

일리야 페르 공작은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을 떠올리며 간신히 화를 가라앉혔다.

확인해 본 결과, 레토 님께선 허울뿐인 황실의 손님이 아닙니다. 황실의 손님으로서의 권한을 모두 손에 넣었기에 황실 안에서라면 그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니실 수 있습니다. 감시가 붙겠지만 본디 황궁은 레토 님의 것. 좋은 자극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

차라리 다행이었다.

만약 귀족들에게 그 자신을 각인시키고 유유히 연회장을 빠져나오겠다는 레토 바틀렛의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그 뒤 그가 얼마나 고삐 풀린 말처럼 날뛰었을지는 뻔할 뻔 자였다.

결과적으로 이득을 본 게 황제라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 정도 값을 치르고 레토의 예측 불가능한 면이 사라진다면 나쁘지 않았다.

‘황제 밑에서 좀 지내다 보면 지금처럼 무책임하게 행동하다간 모든 걸 잃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닫겠지.’

여태껏 레토 바틀렛의 예측은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미카엘과의 대결에서 패배했다는 건 좋은 약이 되리라.

게다가 황궁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신분이 부여되었다는 건 건 분명한 성과였다.

멋모르는 자들은 레토 황자가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의 휘하로 들어갔다며 입방아를 찧어 댈 것이고, 황제의 의도 역시 그러한 말이 진실처럼 퍼져 역심을 품은 그 누구도 레토 황자에게 접근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지금 당장 세력을 모아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세상엔 급격히 진행해서 될 문제보다 차곡차곡 준비해서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 나가야만 성공할 수 있는 문제가 많은 법이다.

* * *

레토 바틀렛은 금방 황실의 손님으로서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는 밖으로 서신을 보내거나 받을 수 없었다. 그 어떤 외부인의 방문도 받을 수 없는 건 물론이었다. 심지어 사용인들마저 그와 일절 말을 섞지 말라는 명을 받은 듯 간단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은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차라리 감옥에 갇히는 게 나았어.’

만약 자신이 감옥에 갇혔더라면 뒷일은 페르 공작이 알아서 해 주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자신의 신분만 알려진다면, 감옥에 들어앉은 상태에서 자신은 반황제 진영의 구심점이 된다.

하지만 이게 뭔가.

겉으로는 황제의 휘하에 들어온 꼴이 되었고, 실제론 감옥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아예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레토 바틀렛은 곳곳에서 그다지 숨겨지지도 않은 비밀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는 무척 들떴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 지내던 궁은 오직 그의 보육 및 보호를 위해 새로이 지어진 궁이었기에 황궁에 그렇게 널렸다는 비밀 통로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대놓고 비밀 통로로 들어가 보아도 그를 항상 뒤따르던 호위들은 제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토 바틀렛은 곧 이 비밀 통로들이 막다르거나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하나같이 쓸데가 없다는 차가운 진실에 부딪혔다.

분명 이것조차 분명 의도된 바이리라. 아무리 날고 기어도 레토 바틀렛은 자신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의 메시지.

하지만 레토 바틀렛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황제라 한들 궁의 모든 비밀 통로를 꿰뚫고 있기는 불가능하다. 만약 자신이 그의 방심을 뚫고 황궁 밖으로 나가는 비밀 통로를 찾아낸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리라.

얼마간 후.

전 황실이 발칵 뒤집혔다.

삼엄한 경호 및 감시를 받고 있던 레토 바틀렛이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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