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폐하, 더는 소문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조만간 귀족들은 물론 길거리의 거렁뱅이조차도 레토 바틀렛이 정확히 누구인지, 그리고 대체 어떻게 황실의 감시를 빠져나갔는지 궁금해할 겁니다.”
신임 각료 테오 헤드먼의 당돌한 발언에 호르헤가 다소 날카롭게 대답했다.
“알맞은 대답을 만들어 내면 되는 문제다.”
“대관절 알맞은 대답이 있긴 합니까?”
“…무례하다, 헤드먼.”
“그 ‘알맞은’ 대답을 지금 내놓으실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셔야 할 겁니다, 오른팔 님.”
호르헤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통 누군가의 처형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신참 각료, 그것도 나이가 어린 축에 드는 문관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그제야 그의 머릿속에 이 어린 각료가 미카엘이 보기 드물게 직접 지명한 문관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심지어 부패한 문관을 처형시키기 위해 일부러 큰 권력을 쥐여 준 경우를 제외하면 최초였다.
‘…….’
호르헤는 바보가 아니었다. 미카엘이 오직 그 혼자의 힘으로 황제로 즉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오른팔이 된 이후에도 미카엘을 제위에 올린 이들의 존재는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방금, 그중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씩 볕으로 나오겠다는 건가.’
나쁘지 않았다.
특히 지금처럼 미카엘에게 ‘자기 사람’이 필요한 때라면 더더욱.
그 미카엘의 사람이 단순히 미카엘의 의중을 되풀이하는 게 아닌, 스스로의 주장을 내세우며 맞부딪칠 정도로 줏대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이상 적임자가 없었다.
문득 테오 헤드먼과 따로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으나, 미카엘에게 먼저 얘기하는 게 순서였다.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하지.”
호르헤는 한결 어조를 누그러뜨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테오 헤드먼은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떻게 찾아내실 겁니까?”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군.”
호르헤는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미카엘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을 내놓았다.
“대나무.”
“폐하께서는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는 게 최선의 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레티시아의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호르헤는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이미 자신과 레티시아 모두 미카엘이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암호 같은 미카엘의 말을 즉석에서 해석하여 전달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티시아 우즈는 마치 그녀와 미카엘이 한 뇌를 공유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리 황당무계한 미카엘의 말이라도 척척 통역하곤 했다.
“알겠습니다.”
아무리 황제의 비밀 심복이라 하더라도 공식적인 회의에서 대놓고 그를 거스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테오 헤드먼은 더는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고,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그날 밤.
미카엘은 침실 근처에 마련된 비밀 공간에서 주위에 나란히 둘러앉은 네 명의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좀 더 정확히는, 그중 가장 나이가 어린 청년을 바라보았다.
“지나쳤어, 테오.”
그는 굳이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오늘 테오는 대놓고 호르헤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외부의 적이 그렇게나 많은데, 같은 편끼리 서로를 의심하는 형국이 되었으니 속이 편할 리가 없었다.
테오가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레토 바틀렛은…….”
“말했잖나.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고 있어.”
“호르헤 볼머가 그의 뒤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도저히 참지 못한 루드밀라가 끼어들었다. 평소 그녀가 말을 아끼는 성격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호르헤 볼머에 대한 적의는 그들 모두가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호르헤 경이라고 부르도록, 루드밀라.”
“너무 수상하지 않습니까? 여태까지 페르 공작 밑에서 일하던 자입니다. 베아트리체 매로프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까지 쉽게 밝혀낸 걸 보면, 사실상 페르 공작의 심복이었을 겁니다.”
“스카 자작은 나름 황궁에 기반이 있던 자였네. 호르헤가 그런 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얻은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없기는요.”
테오가 부루퉁하게 말을 뱉었다.
“폐하의 신임을 얻었죠.”
“…호르헤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도 나는 그를 내 오른팔로 삼았을 거야.”
“그래도 지금처럼 맹목적으로 믿지는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의심 하나 안 하고 계시잖아요!”
미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테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떠들썩하던 방 안이 서서히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그때……. 모든 걸 버리고 떠났을 때, 돌아온 나를 그대들 중 한 명이라도 의심했거나, 아니면 내가 그대들 중 한 명이라도 의심했다면 지금쯤 백골이 되어 있었겠지. 호르헤 경도 마찬가지야. 나는 적어도 누굴 믿어야 할지는 안다.”
“폐하!”
“호르헤가 내게로 넘어온 건 페르 공작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 레토 바틀렛에게 완전히 휘둘린 것만 보아도 알지.”
미카엘은 코웃음을 쳤다.
“페르 공작은 겁에 질린 나무늘보처럼 행동한다. 그런 자가 이런 수를 썼다고? 이건 분명히 레토 바틀렛의 독단적인 행동이다.”
그때, 그동안 말없이 가만히 있던 넷의 리더 힐데가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호르헤가 레토 바틀렛과 결탁했을 수도 있습니다.”
“호르헤 경이다.”
힐데가르트는 순순히 미카엘이 지시한 대로 호르헤의 호칭을 정정했다.
“예. 호르헤 경이 레토 바틀렛과 결탁했을 수도 있죠. 그 경우, 일리야 페르 공작은 완전히 모르고 있을 테고요. 이 가능성을 부정하시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호르헤가 얻을 게 뭐지?”
“호르헤 경도 결국은 페르 공작가의 일원입니다. 한때는 페르 백작이었다는 사실을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그리고 그 백작위를 버리고 일개 기사가 되었지. 바로 내 아버지를 위해서.”
“…….”
“호르헤는 내 아버지에게 충성했어. 그 뒤엔 내게 충성했지. 중간에… 다른 이에게 충성했다 한들, 그가 한 일들이 사라지진 않는다.”
“지금 누구에게 충성하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폐하.”
“그래, 그대들 말대로 호르헤가 지금 레토와 손을 잡았다고 치자. 그럼 지금 그들이 하는 행동은 최악의 수가 아닌가?”
“예?”
“레토… 황자는, 그를 따를 사람들이 보기에는 나를 죽이고 황위에 올라야 할 자다. 제국의 상징이 되어야 할 자라는 말이지.”
“하오나, 폐하…….”
미카엘은 감히 부하가 자신을 방해할 틈을 주지 않았다.
“호르헤는 누구보다도 내 이미지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레토 바틀렛이 지금 일어난 소동으로 나름의 성과를 얻었을지는 모르나, 장기적으로 보면 충신을 살해하고 황궁에 잠입한 소인배일 뿐이다.”
“…저희가 지나친 생각을 했긴 합니다.”
힐데가르트가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레토 바틀렛이 사라진 지금, 이대로 손만 놓고 있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작은 눈덩이가 큰 눈사태를 만드는 법이라는 건, 폐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말도록.”
미카엘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나는 그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 * *
뒤숭숭한 황궁 분위기 탓에 레티시아의 기분도 덩달아 우울해지던 와중에, 한 가지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테렌스 경이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는 소식이었다.
“테렌스 경!”
그는 수도로 돌아온 지 하루 만에 레티시아를 찾아왔다. 테렌스 경을 만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여독이 풀리지 않은 게 아닐지 걱정하던 레티시아는 그의 모습을 본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항상 건강하며 생기 있게 빛나던 테렌스 경이 비쩍 마르고 지친 상태로 나타난 것이다. 안색이 창백하고 식은땀을 자주 흘리는 것이, 어딜 보아도 환자의 모습이었다.
레티시아는 인사조차 잊은 채 테렌스 경의 이름을 읊조렸다.
“테렌스 경…….”
“오랜만입니다, 우즈 양.”
“그, 쉬셔야 할 것 같은데.”
테렌스 경이 피식 웃었다.
“보는 사람마다 다 절 병자 취급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의사는 제가 밖에 좀 나다니는 게 더 치료에 좋다고 하더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레티시아는 얼른 테렌스 경을 응접실에 들였다.
“어디가 안 좋으신 건가요? 설마 거기서 병을 얻어서…….”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는 황실 소속이 아닌 테렌스 경에게 임무를 내린 건 다름 아닌 미카엘이었고, 그 결정을 전달한 건 자신이었기에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테렌스 경이 부드럽게 답했다.
“이미 나았습니다.”
“테렌스 경, 저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제가 우즈 양을요?”
테렌스 경은 어이가 없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선, 이건 돌아오면서 얻은 병이었습니다. 중간에 들른 마을의 물이… 상태가 좋지 않았나 보더군요. 둘이 죽긴 했지만, 어쨌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의사 말로는 푹 쉬고 제대로 영양을 보충하면 되돌아온다고 하더군요. 병 자체는 이미 나은 게 맞습니다.”
“그래도 더 쉬셔야죠. 말씀해 주셨다면 제가 찾아뵈었을 거예요.”
“폐하…의 비서로 충분히 바쁜 분을 더 바쁘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제집에서 드리는 것도 좀 모양새가 빠지지 않습니까.”
“…감사드려요, 언제나.”
레티시아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테렌스 경의 선물은 그녀의 자선 사업이 자리를 잡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괜한 사양을 하는 건 테렌스 경의 노고를 무시하는 셈이었다.
테렌스 경은 데리고 온 하인을 불러 제법 큰 상자를 가져오게끔 했다.
잠시 후.
상자를 연 레티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태까지 테렌스 경은 값어치에 그 방점이 찍히는 선물을 해 왔다. 파트너가 된 이후에는 환금성이 높은 선물만 해 왔고.
하지만 평상시라면 커다란 금괴가 들었을 상자 속에 든 건, 낡아빠진 청소용 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