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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84/150)

84화

“테렌스 경, 이건… 대단하다고밖에 말을 못 하겠어요.”

레티시아는 청소용 솔을 든 채 이리저리 뒤집었다가, 책상 위도 쓸어 보았다. 사람의 손길에 닳다 못해 반질반질한 솔의 손잡이는 마치 레티시아의 손 치수를 재어서 만든 것처럼 착 달라붙었다.

레티시아는 체구가 작은 편이었으나, 하녀들 중 유난히 작다고는 할 수 없었다. 레티시아처럼 어릴 때부터 학대에 가까운 노동을 해 왔던 하녀들은 생각보다 많았고, 당연히 그들 중 체구가 큰 하녀는 드문 편이었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자신처럼 이 솔의 손잡이를 편안해할 하녀가 상당히 많으리라 자신할 수 있었다.

“정말… 저는 경께 항상 받기만 하네요.”

“저는 목숨을 빚지지 않았습니까.”

“목숨을 빚진 모든 사람이 경처럼 은혜를 갚는다면, 세상은 훨씬 살 만해지겠는걸요.”

레티시아는 테렌스 경의 이번 선물이 여태까지 받은 그 어떤 선물보다도 값지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업 품목이 되기 때문은 아니었다. 청소용 솔이 불티나게 팔려 봤자 얼마나 팔리겠는가?

하지만 이 솔의 보급으로 두카트의 청소는 좀 더 빠르고,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변할 것이다.

삐꺽거리는 사업을 제대로 일으키는 것도 물론 어렵지만, 이미 잘되고 있는 사업을 더욱더 발전시키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테렌스 경 본인조차 그가 얼마나 큰 선물을 그녀에게 주었는지 자각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테렌스 경께서는 청소를 해 보신 적은 없으실 텐데, 눈썰미가 대단하시네요. 저도 잘 모르는 분야에서 보물을 건져 올릴 자신은 없거든요. 대체 어떻게 알아보신 건가요?”

“…….”

테렌스 경이 멋쩍은 얼굴로 솔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질문을 회피하는 것처럼.

만약 상대가 미카엘이었다면 레티시아는 몇 번 더 캐묻다가, 기어이 대답을 듣거나 결국 말을 해 주지 않아서 포기하고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테렌스 경은 미카엘이 아니었다.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한두 번이 아닌 열 번, 스무 번을 캐물어도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 반해, 레티시아는 테렌스 경에 대해 잘 몰랐다. 어쩌면 사소한 질문 하나로 그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신뢰가 완전히 깨어질 수도 있었다.

레티시아는 테렌스 경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고, 이렇게 귀중한 파트너 관계가 말 한마디로 깨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느 때와 달리 말을 아꼈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굳이 그에게 어떻게 이 청소용 솔을 눈여겨보았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정말… 정말 기뻐요. 이걸 개량해서 맞춤 제작을 한다면 모두가 좋아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테렌스 경. 임무만으로도 바빴을 건데…….”

“별것 아닙니다. 그냥 우연히 들른 집에서 봤는데……. 왜인지 우즈 양이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테렌스 경은 잠시 바닥을 바라보더니,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냥, 제가 뭐… 엄청 대단한 눈썰미가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슨 우즈 양 같은 능력이 생긴 것처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아, 당연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단지 친절한 분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렇습니까?”

테렌스 경의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역시 우즈 양은 제 마음도 완벽하게 읽어 내시는군요.”

레티시아는 테렌스 경의 장단에 맞추어 웃었지만, 평소와 달리 테렌스 경의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레티시아는 연애 경험이 없을지언정 완전히 숙맥은 아니었다. 비록 미카엘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있는 그녀에게 감히 접근하는 남자는 없었지만, 주위 동료들이 무수히 사랑에 빠지고 또 헤어지는 모습을 봐 왔다.

그녀는 사랑에 빠진 자가 어떤 행태를 보이는지 충분히 안다고 자부해 왔다. 그들은 상대에게서 자신을 도저히 숨기지를 못한다.

마치, 테렌스 경처럼.

‘…테렌스 경은, 나를 좋아해.’

레티시아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 * *

레토 데브란트가 생각하는 그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은 비상한 머리도, 제국의 그 누구보다도 고귀한 혈통도 아니었다.

바로 무던함이었다.

사치스럽고 까다로웠던 형들과는 달리, 그에게 세상의 모든 음식은 달콤했으며 음악은 아름다웠고 잠자리는 편안했다.

사람들 대다수가 머저리 같다는 것만 빼면 이 세상은 버틸 만한, 손에 넣을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그저 기어 다니는 벌레 그 이상 그 이하의 가치도 없는 우민들은 죽여 버리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레토 데브란트는 황궁의 미로 같은 통로를 뒤지면서 그 자신의 생각을 아주 조금 수정해야 했다.

세상에는 차마 먹을 수 없는 음식도 있다.

이를테면, 늙은 쥐 같은.

새끼 쥐들은 그나마 먹을 만했다. 하지만 비쩍 말라비틀어진 늙은 쥐들은 약아서 잡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먹기도 힘들었다.

“…우욱.”

레토 데브란트가 이런 수치를 견뎌 내면서 암흑을 뒤지고 다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 거미줄 같은 비밀 통로를 완전히 체득하기 위해서.

결국 황궁 비밀 통로의 목적이란 유사시 황족을 보호하고 밖으로 피신시키는 데 있다. 당연히 이 중 무언가는 단순히 황궁 안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수준이 아니라 수도로 빠져나갈 수 있는, 그야말로 탈출구일 것이다.

자신의 실종으로 인해 밖에서 빚어질 소동은 충분히 예상이 되었지만 소동 자체를 노린 건 결코 아니었다.

단지,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쪽에 가까웠다.

만약 그 통로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황실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황궁에서 황궁 밖으로 나가는 비밀 통로가 있다는 건, 황궁 밖에서 황궁 가장 내밀한 곳으로 잠입할 비밀 통로가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기껏해야 암살자 몇 명이 아닌, 기사단 몇 부대를 잠입시켜서 순식간에 황궁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설령 자신이 그 통로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황실에서 알게 되어서 통로 자체를 파괴해 버린다 해도 이득이었다.

황궁 밖으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탈출구가 바로 황궁 전체에 무수히 뻗어 있는 비밀 통로의 목적이라는 말은, 탈출구를 봉쇄하거나 파괴해 버린다면 그 모든 비밀 통로들이 힘을 잃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러나저러나 본디 그의 손에 들어와야 했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큰 손해를 입게 될 것이다.

자신이 탈출구를 발견하는 경우에야 말이지만.

레토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패배자가 되어 돌아간다면 전 각료들이 자신을 처형하라고 떠들어 댈 것이다.

그러니까, 첩자가 아닌 각료들의 경우에는.

하지만 탈출구를 찾는다면?

그는 황궁을 무사히 빠져나가 자신이 옳았다는 걸 일리야 페르 공작에게 다시 한번 증명할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레토는 어느덧 날을 세는 것도 포기했다.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기에 시간 감각이 극도로 없어진 탓이었다.

그는 고기가 보이는 족족 잡아먹었고, 지치면 드러누웠고, 기력이 있는 동안엔 오직 탈출구만을 찾아 헤매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찬란한 빛이 보였다. 레토는 그 빛으로 다가가기도 전부터 자신이 정답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작위로 건설된 여타 비밀 통로들과는 달리, 탈출구는 완벽히 설계되었고 공을 들여 건설된 장인 정신이 느껴졌다.

발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마치 길이 자신을 부르는 듯했다.

진정한 황제가 여기 있노라고.

‘그놈이 여길 알 리가 없다.’

레토는 확신했다.

애당초 적통을 타고나지 못한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이곳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저 끝에 도달하는 순간, 자신은 비로소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레토는 출구까지 단 한 걸음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

금방이라도 그를 삼킬 것처럼 일렁이던 지상의 빛은 거대한 장막으로 변해 그를 가로막았다.

조금 전까지의 들뜬 심상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레토는 당황하지 않았다.

‘특수한 유리군. 마법 처리가 되어 있는 건가.’

간만에 냉정해진 머리가 겨우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

탈출구를 아무에게나 열어 둘 리가 없다는 걸 진작 생각했어야 했다. 레토 자신이 반란군을 이끌고 들어올 가능성을 생각한 것처럼, 먼 옛날 이곳을 만든 사람 역시 충분히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그때.

빛으로 가득 찬 탈출구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

레토는 눈을 부릅떴다.

그조차 열지 못하는 이 출구를 드나들 가능성이 있는 자는 오직…….

제국의 황제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슬프게도 틀리지 않았다.

한 아름 빛무리와 함께 레토와 코가 닿을 만한 거리에서 불쑥 나타난 황제는 조소하듯 그를 깔아 보았다.

“생각보다 늦었군.”

“……!”

레토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치며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열쇠가 필요한 건 전혀 몰랐나 본데.”

레토의 의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동문서답이었으나, 그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답을 담은 답변이었다.

“열쇠는 네가 발 한번 들이지 않은 황태자 궁에 있었다. 첫 열쇠는 다른 열쇠로 나를 인도했고… 열 번째 열쇠가 비로소 이곳을 열 열쇠였지.”

황제는 여태까지 단어만 겨우 얘기하는 백치처럼 보이던 사람으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네가 그걸 찾아낼 때까지 내버려 두었을 리가……!”

미카엘은 가소롭다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인간에게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치워 버릴 수 있는 인형이었지. 인형이 그림자 속에서 무얼 하든 누가 신경을 쓰겠느냐?”

레토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지금은 결코 아버지의 오판에 대해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정이었군. 원하는 게 뭐지? 내 목숨인가? 아니면 영원한 굴종 맹세?”

“판단력이 형편없군.”

미카엘이 싸늘하게 말했다.

“네게 원하는 건 없다. 다만, 너는 이곳에서 평생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통로를 지키는 망령이 되어라.”

레토의 눈이 흔들렸다.

미카엘의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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