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Chapter 12. 사내 연애 금지
“멋진데? 다들 좋아하겠어. 크기만 다양하게 만든다면 두카트의 상징이 되겠는걸. 일석이조야.”
레티시아의 예상대로 베스는 뛸 듯이 좋아했다. 그녀는 솔로 책상을 쓱쓱 쓸어 보기도 하고, 왼손과 오른손으로 몇 번이나 번갈아 쥐어 보았다.
“수도 물건이 아닌데. 이런 걸 어디서 구했어?”
올 것이 왔다.
레티시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선물로 받았어.”
“테렌스 경한테서?”
“…응.”
베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세상에.”
레티시아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임무에서 돌아오던 중 이걸 발견했는데… 내가 좋아할 것 같았대.”
“그래?”
베스의 목소리가 다소 기묘하게 변했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의 생각도 베스가 지금 하고 있을 법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내 생각에는……. 테렌스 경이 날 좋아하시는 것 같아.”
베스의 반응은 볼만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레티시아와 청소용 솔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급기야는 그녀에게 달려와 꽉 껴안기까지 한 것이다.
“드디어!”
“베, 베스, 숨 막혀.”
“넌 숨 좀 막혀도 싸, 이 답답아.”
“베스!”
베스는 낄낄거리며 레티시아를 놓아주었다.
“그나저나 티가 많이 났나 보네. 너같이 둔한 애도 눈치챘을 정도니까. 거의 고백이라도 한 거 아니야?”
“…고백은 무슨.”
레티시아는 얼버무렸다. 자신에 대한 테렌스 경의 반응을 시시콜콜하게 말하는 것도 제법 무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냥, 알게 되었어. 아, 이런 거구나 하고…….”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베스가 레티시아의 말을 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레티시아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베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소리쳤다. 레티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모르겠어. 상황이… 다 너무 복잡해서.”
이제 레티시아는 테렌스 경이 두카트를 찾아온 이유가 자신에게 은혜를 갚기 위함도, 두카트의 시장성을 봐서도 아닌 이성적인 호감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무시한 채 선물과 호의를 냉큼 받아먹기만 하는 건 사람이 할 짓이 못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테렌스 경이 하지도 않은 고백을 거절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뭐라고 생각하겠어.’
결국 레티시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옴짝달싹도 못 한 채 빠져 버린 셈이었다.
베스가 거들먹거렸다.
“그래서 사내 연애를 하지 말라는 거야.”
“…첫째, 나랑 테렌스 경은 연애 안 해. 당연히 한 적도 없지. 둘째, 사내 연애도 아니야. 테렌스 경은 투자자일 뿐이니까.”
“그거야 그렇지.”
베스가 동의했다.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어.”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냥 사귀어 봐.”
“……?”
레티시아는 크게 당황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애초에 생각 한번 해 보지 않은 선택지였다.
“하지만 난, 테렌스 경이…….”
“싫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한번 만나 봐. 싫은 것만 아니라면 뭐, 나쁠 것도 없잖아?”
“…나는 테렌스 경을 그런 의미로 좋아하진 않아. 물론 좋은 분이지. 좋은 분이긴 하지만, 별 마음은 없어.”
“심지어 잘생겼잖아. 잘생긴 데다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귀족이 얼마나 드문지 알아?”
“아니, 그러다 깨지면?”
레티시아는 답답한 나머지 그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이미 그녀가 테렌스 경을 이성적인 의미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사실 만약 테렌스 경이 평범한 기사로서 그녀와 가까워지고, 끝내 고백했다면 순순히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같은 상황에선 고백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레티시아 역시 기사님과의 장밋빛 로맨스를 꿈꾸던 소녀 시절도 분명 있었으니까.
하지만 테렌스 경은 두카트의 중요한 파트너였다. 잘되면 다행이지만, 그간 테렌스 경이 슬쩍 흘린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아직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산의 상속 문제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문제가 산적해 있는 와중에도 레티시아를 돕고 있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교제했다가, 헤어지기라도 했다가는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파트너였다.
지금 와서 테렌스 경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파트너 관계를 깨트릴 수는 없었다.
단순히 그게 더 이득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미 수도 전체가 그들의 파트너십에 대해 알고 있었고, 자선 사업은 레티시아만의 사업이 아닌 테렌스의 것이기도 했다.
지금의 관계가 변하거나, 악화된다면 자선 사업은 물론 두카트 역시 부는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사업을 다 접어 버릴 수도 없는 게, 테렌스 경이 여태까지 그녀를 위해 쏟아부은 돈은 회수를 해 주어야 할 게 아닌가.
베스도 레티시아의 생각을 이해했는지 항상 바로바로 받아치던 평소와 달리 말이 없었다.
“그럼 이건 어때?”
“……?”
“테렌스 경에게 말해 봐. 나 좋아하는 거, 다 알고 있다고.”
* * *
레토 바틀렛은 계속 실종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게 훨씬 낫다는 사실을 각료들이 알아차리는 데까진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성한 소문들은 처음엔 옛 황자로 추정되는 인물을 찬양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 소문들은 어느덧 항상 보호만 받아 오던 심약한 막내 황자가 궁으로 돌아오려고 수를 쓰다, 냉혹한 현실에 질려 도망쳤다는 소문으로 바뀌었다.
당연히 페르 공작가에선 그 소문을 막으려 안간힘을 썼으나 본인들을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미약한 노력으로 그치고 말았다.
호르헤는 레토 바틀렛의 실종도, 실종과 관련된 소문이 예상과 달리 유리한 방면으로 퍼진 것도 뒤에 미카엘이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였지만 그 어디에서도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만약 증거가 나왔다면, 그가 직접 인멸해야 했을 테니까.
“거미.”
“폐하께선 봄에 대비해 해충을 박멸할 방법을 미리 찾으라고 명하셨습니다.”
호르헤는 물끄러미 레티시아를 바라보다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우즈 양은 대체 언제까지 저런 생활을…….’
레티시아에 따르면, 미카엘은 자리가 안정되면 그녀를 완전히 풀어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미카엘이 약속한 것이 아니라, 그때가 되어서야 레티시아가 미카엘을 떠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호르헤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레티시아 우즈는 그녀가 미카엘의 곁에 머무는 이유가 그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미카엘 때문이라는 생각에 다소 위안을 얻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도 너무하시지.’
가끔 호르헤는 미카엘이 레티시아에게 보이는 집착이 충신을 아끼는 마음도 연정을 품은 상대에 대한 마음도 아닌 순전한 집착 그 자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미 레티시아는 물론 미카엘 자신도 삼켜 버렸을 정도로 거대한.
“이상으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레티시아의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부산히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호르헤는 천천히 자리에서 미적거렸다. 오늘은 레티시아에게 할 이야기가 있었다.
“호르헤 경?”
“우즈 양.”
“무슨 일이세요?”
“할 얘기가 있다. 둘이서.”
그때, 미카엘이 말없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같이 들어도 되겠냐는 의미라는 사실을 파악한 호르헤가 고개를 저었다.
“우즈 양만 알아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내 얘기는 아니겠지?”
호르헤의 얼굴이 일순간 딱딱하게 굳었다가, 가벼운 농담이었음을 깨닫고 이내 풀어졌다.
“당연히 아닙니다.”
“알겠다.”
미카엘은 잠시 호르헤를 응시하다가, 조용히 방 밖으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저래도 다 듣고 계실 거예요. 비밀 통로는 다 꿰뚫고 있으시니까요.”
“그래도 계속 같이 계시는 것보다야 마음이 좀 편하지 않나.”
호르헤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했다. 실은 자신은 미카엘을 위해 그를 밖으로 내보냈다.
이제 그가 정말로 탐탁지 않아 하는 얘기를 해야 하기에.
“그건 그렇죠. 무슨 일이에요?”
“네게 편지가 왔다.”
“……!”
레티시아의 금안이 휘둥그레졌다.
“호르헤 경을 통해서요?”
“그래.”
호르헤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페르 공작령에서 온 편지거든.”
“…….”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뜯어보고 싶지 않아요.”
“왜지?”
“저와 호르헤 경을 음해하려는 수작일 게 뻔하니까요.”
“아.”
호르헤는 눈을 깜박였다.
“그런 게 아닌데.”
“뭐죠?”
“봐라.”
무심한 얼굴로 호르헤가 건네준 편지를 받은 레티시아의 얼굴에 느낌표가 떠올랐다.
편지의 겉면엔 비뚤배뚤한 글씨로 <레티시아 우즈 비서님께 전달 부탁드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호르헤가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원래 알던 아이다.”
“아…….”
레티시아의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길로 허겁지겁 편지 봉투를 뜯었다. 감격에 찬 시선이 빠르게 편지의 내용을 훑었다.
“제게, 감사하대요……. 새로운 것들을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좋은 선생님을 보내 주셔서 감사하다고.”
레티시아의 말은 끝내 울먹거림으로 변하고 말았다.
“무, 무엇보다도 교실에 간다는데 부모님이 더는 때리지 않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