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미카엘은 회의실을 떠나는 레티시아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레티시아는 짙게 낀 구름 사이로 잠깐 나타나 세상을 밝히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는 햇살처럼 순식간에 복도로 사라져 버렸다.
미카엘은 이내 몸을 돌려 호르헤 경과 마주했다.
“무슨 얘기를 했지?”
“엿들으신 게 아니었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호르헤는 잠시 머뭇거렸다.
미카엘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어차피 호르헤는 평소처럼 그의 명령에 따를 것이다.
“우즈 양에게 편지를 한 장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걸 전달해 주었고요. 그게 전부입니다.”
“무슨 내용이었지?”
“우즈 양의 자선 사업에 대한 어린아이의 감사 인사입니다. 별건 아니지만, 우즈 양에겐 큰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침묵이 흘렀다.
미카엘은 한숨을 삼켰는데, 왜 호르헤가 자신을 잠시 내보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감히 황제를 오라 가라 하는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미카엘은 호르헤를 신뢰하였기에 그 이유를 묻지 않고 따랐다.
역시나 옳은 판단이었다.
그 편지를 읽고 뛸 듯이 기뻐했을 레티시아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뱃속이 뒤틀리는 듯했으니까.
‘…….’
미카엘은 부글거리는 감정을 가라앉히려 노력했지만 마음처럼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처음, 자신이 레티시아의 자선 사업에 대해 알아챘을 때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레티시아가 예전부터 그녀만의 자그마한 사업체를 꾸리고 싶어 했고, 마침내 실행했다는 것도 진작 파악하고 있었다. 자선 사업도 그 연장선일 뿐이었다.
하지만 테렌스 던워디라는, 실력은 형편없지만 집안과 외모만큼은 그럭저럭 봐 줄 만했던 옛 검술 교관이 레티시아에게 접근하면서 모든 일이 틀어졌다.
‘그렇게나 임무가 빨리 끝날 줄이야.’
황실 소속 기사가 아니게 된 지 오래인 테렌스 던워디에게 먼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는 임무를 맡긴 덴 다분히 불순한 의도가 섞여 있었다.
임무는 무사히 마쳤음에도 돌아오는 도중 죽을병은 아니지만 중한 병에 걸렸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테렌스 던워디는 그마저도 이겨 내고 레티시아를 찾아가 병약한 모습을 보여 주어 그녀의 동정심을 샀다.
“그 아이가… 워낙 간절하게 얘기하길래 우즈 양에게 전달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괜찮다.”
미카엘은 까슬거리는 목으로 대답했다. 나빠진 기분을 내색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에 대해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호르헤 경이 아니었던가.
“기뻐했겠지. 그걸로 되었다.”
“…….”
침묵이 흘렀다.
미카엘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은 레티시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집무실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많이… 많이 좋아하던가?”
미카엘은 의미 없는 질문을 던졌다가, 호르헤의 뼈아픈 반문에 당황하여 혀까지 씹을 뻔했다.
“폐하, 대체 언제까지 우즈 양과 소꿉놀이를 계속할 생각입니까?”
“…호르헤.”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죽을 날이 폐하보단 훨씬 가까운 늙은이로서 한마디 올리자면, 지금처럼 테렌스 경을 치졸하게 괴롭히는 식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실 겁니다.”
“경까지 테렌스 던워디의 편을 드는 건가?”
미카엘의 목소리가 다소 노기를 띠었다. 대관절 무슨 연유로 그에게 중요한 사람들은 테렌스 던워디를 감싸 주지 못해 안달이 났단 말인가?
“폐하, 저는 테렌스 경과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눠 본 적이 없습니다!”
호르헤가 억울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단지, 이대로라면 폐하께서 테렌스 경처럼 하잘것없는 기사를 질투하신다는 걸 모르는 자가 황궁 안에 아무도 없게 될 겁니다.”
“…….”
침묵이 흘렀다.
미카엘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떨구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
“아직까지는 아닙니다.”
호르헤의 제법 솔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처럼 폐하를 계속 봐 온 사람만이 알 수 있을 정도니까요. 아마 우즈 양도 모를 겁니다. 그 성격에, 알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겠군.”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됩니다.”
“…….”
미카엘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겨우 백작가 차남 한 명을 질시하는 황제라니, 제국은 물론 대륙 전체의 비웃음거리가 되고도 남을 만한 문제였다.
호르헤의 단단히 큰마음 먹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계속 이렇게 계실 겁니까? 우즈 양을 어디로 가지도 못하게 붙잡아 두기만 하면서…….”
“방법이 없어. 방법이…….”
미카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 자신이 듣기에도 보기 드물게 연약한 목소리였다.
“내가 감히 레티시아에게 무슨 주제로 이보다 더한 걸 청할 수 있다는 말이냐?”
“폐하.”
“황후? 레티시아가 그걸 원한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어. 신분이야 멸문당한 대귀족의 신분을 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레티시아가 그걸 원하지 않을 거라는 건, 그대도 잘 알잖나.”
“…….”
“그리고 이제는 잘 모르겠다.”
“무얼 말입니까?”
“대체, 이 감정이 무엇인지도…….”
미카엘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무어라 말하려 하는 호르헤를 눈짓 한 번으로 제지했다.
“한땐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아니라곤 할 수 없겠군.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레티시아는… 그런 감정으론 설명할 수 없게 되었어. 설령 그녀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여전히 레티시아는 내 삶의 이유이며 목표일 테니까.”
“…폐하, 사람들은 보통 그걸 사랑이라고 부릅니다만.”
“달라.”
미카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랑이라 함은 그녀가 말하는 것,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들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나는……. 황궁을 떠나고 싶다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지 않다. 레티시아가 자신의 소원을 포기하고 내 곁에 남았으면 좋겠어.”
미카엘은 창밖을 응시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뜰에 레티시아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건… 옳지 않다.”
* * *
자신의 사무실에 도착한 레티시아는 서툰 글씨체로 쓰인 투박한 편지를 품에서 소중히 꺼내 보았다.
편지에 적힌 아이의 감사 인사 한마디 한마디가 눈앞에 생생히 살아났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문장.
저도 비서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레티시아는 자신이 감히 이런 얘기를 들을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옛날 어느 현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타고난 기질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그가 살아오며 어떤 선행을 베풀고 악행을 저질렀는지에 따라 규정되는 거라고.
‘테렌스 경도 이걸 봐야 해.’
흥분이 어느 정도 가시자 레티시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당연히 테렌스 경이었다.
이 편지는 오직 자신을 향해서만 쓰인 게 아니었다. 자선 사업의 파트너이기도 한 테렌스 경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한 것이다.
문제는, 이미 테렌스 경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 버린 이상 도저히 그에게 자선 사업 이야기를 할 만큼 그녀의 얼굴이 두껍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테렌스 경은… 더 무리해서라도 날 도우려 할지도 몰라.’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최선의 방법은 테렌스 경의 마음을 거절하는 것이겠지만, 대관절 고백을 받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의 마음을 거절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거절할 기회를 노리기 위해 고백을 기다리는 것도 뭔가 사람이 할 법한 짓이 아닌 듯했다.
레티시아가 한숨을 폭폭 내쉬고 있을 때였다.
파라든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렌스 경께서 찾아오셨습니다.”
“……!”
레티시아는 편지를 꽉 쥔 것도 그렇다고 놓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손에 든 채 서둘러 테렌스 경을 맞이했다.
다행히 테렌스 경은 얼마 전 보았을 때보다 훨씬 안색이 좋아진 듯했다.
“바쁘신데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일은 다 끝났고, 쉬려 한 참이었어요.”
“그럼 휴식을 방해한 셈이 되겠군요.”
“경에게 제 휴식 정도는 충분히 양보할 수 있죠.”
“그렇습니까.”
레티시아는 자신의 의례적인 인사에도 기뻐하며 반응하는 테렌스 경의 모습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는 괜스레 평소에는 손님에게 내오지도 않는 아끼는 다과를 꺼내려다, 그만 편지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당연히 테렌스 경은 아무런 생각 없는 듯한 얼굴로 무심코 편지를 주워 들었다.
“오.”
테렌스 경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동 교실을 다니는 아이에게서 온 모양이군요.”
“네.”
테렌스 경은 편지를 조용히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읽지 않으시네요?”
“우즈 양에게 온 편지잖습니까.”
“테렌스 경에게 온 편지이기도 해요.”
“……?”
레티시아는 한 차례 심호흡했다.
테렌스 경이 자신에게 품은 감정이 무엇이든 간에, 그가 자선 사업의 파트너이며 저 편지를 읽어야 할 사람에 속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동 교실을 보내 준 사람을 위한 편지니까요. 저만큼이나 테렌스 경도 기여했으니까, 테렌스 경 역시 읽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즈 양, 그 모든 걸 만든 사람은 우즈 양입니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경이 아니었다면 훨씬, 훨씬 힘들고 늦어졌을 거예요. 부탁이니 봐 주시겠어요?”
“…….”
테렌스 경은 말없이 편지를 읽어 내렸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들고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우즈 양.”
“네?”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동 교실을 보내 준 사람에 대한 어린아이의 감사 편지를 읽고 느닷없이 그녀에 대한 찬사라니.
결국, 그녀는 베스와 얘기할 때부터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던 말 한마디를 입 밖으로 내고야 말았다.
“경,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절, 좋아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