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50)

87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레티시아는 말을 마치자마자 후회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 처한 적도, 이런 말을 해 본 것도 처음이었지만 자신이 최악의 수를 던졌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섬세하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은 부담감이라는 사소한 불편함 하나 때문에 테렌스 경을 곤란한 처지에 몰아넣었으니, 나중에 베스에게 한 소리를 들어도 쌌다.

그나마 나아진 편이었던 테렌스 경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자 죄책감마저 일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라는 건 아니었을 텐데…….’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려 내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테렌스 경이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가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아, 아, 아니요.”

레티시아는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테렌스 경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티가 났군요. 그것도 아주 많이.”

“…….”

테렌스 경은 힘없이 웃었다.

“괜찮습니다. 우즈 양이 언제쯤 눈치챌지 궁금했거든요.”

“…….”

“기왕이면 그 전에 우즈 양의 마음이 저와 같아지기를 바랐으나, 그건 지나친 바람이었던 모양이군요. 안 그렇습니까?”

“…….”

레티시아는 계속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테렌스 경에게는 미안하고, 자기 자신은 한심하기 짝이 없어져 무어라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테렌스 경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할 터이니.

하지만 지금 상황은 많이 달랐다. 레티시아가 테렌스 경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은 거절 혹은 유보밖에 없었기에.

테렌스 경은 미안해서 고개를 좀체 들지 못하는 레티시아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테렌스 경…….”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주실 줄은 몰랐지만, 차라리 낫군요.”

테렌스 경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천천히 이어 나갔다.

“예, 저는 우즈 양을 사랑합니다. 안 됩니까?”

“…….”

“안 된다고 하셔도 제 마음은 제 마음입니다. 우즈 양이 어떻게 할 수는 없어요.”

“경, 저는…….”

레티시아는 머뭇거렸다.

“문제가 많아요.”

그녀는 겨우 대답을 내뱉었다.

“지금…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고, 해야 할 일들도 많고……. 두카트도 자리를 잡으려면 멀었고……. 그리고 그 일들에 경께서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 계시는데, 경의 마음을 이용만 하고 있기 싫었어요. 그래서… 아까처럼 말해 버렸네요.”

레티시아는 굳이 사과의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테렌스 경은 이미 다 이해했다는 듯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으시잖아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때, 테렌스 경이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제가 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 문제인걸요.”

“저와 관계된 건 제 문제겠지요.”

정곡을 찔린 레티시아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테렌스 경이 어딘가 슬퍼 보이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우즈 양, 제가 겨우 연심 때문에 제 미래를 걸고 가용 가능한 전 재산을 투자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실패한다면 제 미래가 송두리째 날아갈 도박인데도?”

레티시아는 솔직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애초에, 우즈 양을 처음 찾아갔을 그 당시엔… 지금처럼 강한 감정도 아니었고요. 두카트의 잠재력이 아니었다면 그런 제의 자체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절 안심시키려고 하시는군요.”

레티시아는 쓰게 말했다.

테렌스 경이 아무리 두카트를 치켜올려 주려 한들 자신에 대한 그의 감정이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은 투자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느 정도 일의 전말을 알게 된 지금, 과거를 떠올려 보니 참 우스웠다. 암살자에게 습격당한 상처를 응급처치해 주었다는 이유로 물적인 지원은 물론 든든한 사업적 파트너까지 되어 준다는 건 참 이상하지 않은가.

하지만 레티시아는 그동안 던워디 백작가에서 선물을 계속해서 받아 왔기에 어느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우즈 양, 왜 당신 자신을 과소평가하십니까?”

“그런 적 없어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여태까지 레티시아는 그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었고, 그 거품이 이제야 꺼진 것이다.

“지금 과소평가하고 있잖습니까.”

“…….”

“이것 한 가지는 믿어 주십시오. 저는… 당신에 대한 감정이 아니었더라도 두카트에 투자했을 겁니다. 작위를 승계받을 수 없는 차남은 본인과 후손들의 생계를 생각해야 하거든요.”

“던워디 백작가의 재력이라면 웬만한 남작가 정도는 매수하고도 남을 텐데요.”

테렌스 경이 코웃음을 쳤다.

“사도 제 힘으로 사야지, 가문의 재산으로 매수한 것 따위 사교계에서 인정조차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아시지 않습니까.”

사실, 평민이기에 사교계에 끼지도 못할뿐더러 관심 자체가 없었던 레티시아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였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런 문제를 가지고 테렌스 경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테렌스 경은 레티시아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그의 모든 제스처는 조심스러웠으나 눈만큼은 기묘한 열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제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우즈 양에겐 현재 마음에 담고 있는 상대가 없는 게 맞습니까?”

“…없긴 해요.”

레티시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이어질 말을 충분히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렇군요.”

테렌스 경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레티시아는 그가 한 발자국 더 다가오기 전, 서둘러 말을 이었다.

“지금 제 상황에서 연애는… 사치라서요.”

“사람은 사치를 전혀 부리지 않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살 수 있어요.”

“우즈 양, 그냥 제 생각일 뿐이니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

테렌스 경이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만 우즈 양이 마음에 둔 사람이 없다면… 저와 아주 잠시만 교제해 보는 건 어떠십니까?”

“네?”

레티시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오래도 필요 없습니다. 딱 일주일. 일주일이면 됩니다.”

“테렌스 경, 지금 무슨…….”

“일주일 동안 저와 어울려 주십시오. 그래도 우즈 양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포기하겠습니다.”

테렌스 경의 제안은 그야말로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곧바로 거절하지 못했다. 죄책감 같은 얄궂은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녀 자신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동안 뭘 하시겠다는 거죠?”

“실은, 생각해 둔 게 없습니다.”

테렌스 경은 뻔뻔한 얼굴로 고백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우즈 양을 위한 일주일이 되리라는 건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그 일주일이 한 달로, 한 달이 일 년이 되길 원하신다면 그 이상 좋은 결과가 없겠죠. 하지만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적어도 제게 기회가 있었던 셈이니까요.”

“…….”

레티시아는 테렌스 경의 시선을 피했다. 난처하게도,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테렌스 경에겐 그 어떤 이성적인 감정도 없다고 자신했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파라든이었다.

“두 분 말씀 나누시던 중에 죄송합니다.”

레티시아는 차라리 잘되었다 싶어서 재빨리 대답했다. 테렌스 경의 제안을 당장 거절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파라든이 적당한 시기에 대화를 끊어 준 셈이었다.

“아, 아니에요. 무슨 일인가요?”

“황제 폐하께서 지금 당장 집무실로 와 달라고 하십니다.”

“네?”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오늘 하루의 일과는 모두 끝났다. 최근 들어 미카엘은 예전과 달리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불러 대지는 않았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테렌스 경에겐 미안하지만, 당장 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급한 일이 틀림없어.’

그녀는 테렌스 경을 돌아보며 미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테렌스 경, 정말 죄송하지만…….”

“어떻게 폐하의 명을 거부하겠습니까? 빨리 가 보시지요.”

다행히도 테렌스 경은 전혀 기분 나빠 하는 투가 아니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아까 말씀해 주신 건… 내일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제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테렌스 경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천천히 대답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제안과 관련된 얘기는 아닙니다.”

“네. 뭐든지요.”

레티시아는 진심을 담아 얘기했다. 테렌스 경이 자신에게 해 준 것들을 생각하면 범죄 말고는 무엇이든 해 줄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테렌스 경은 범죄를 사주할 인물이 아니기도 했고.

“당신의 우선순위는 항상 황제 폐하라는 건 압니다. 그걸 탓하거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저 역시 제국의 일원이니까요.”

테렌스 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지어 조금 전 그녀에게 기한부 연애를 제안할 때보다도 더욱더 간절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우즈 양, 이제는 당신 자신의 행복을 그 무엇, 그 누구보다도… 먼저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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