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50)

88화

레티시아는 망설였다.

가볍게 이미 그러고 있다고 대꾸하며 자리를 떠나는 방법도 있었지만, 테렌스 경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했다.

“저는, 경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타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결국 레티시아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자신은 항상 원하는 대로 행동했고, 지금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항상 절 위한 일들이었어요. 자선 사업도, 경을 도운 것도… 다른 사람들을 도운 것도. 만약 제게 이익이 되지 않았다면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테렌스 경에게는 의외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게 자신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시골 아이들의 교육을 돌보는 성녀 이미지쯤 되는 듯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레티시아는 한때 어렸던 자신을 떠올리며 자선 사업을 시작했다. 그 어떤 심오한 철학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간 쌓아 올린 부에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했을 것 같았으니까.

테렌스 경의 몇 년에 걸친 구애를 불러일으킨 결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레티시아가 그를 구하지 않았다면, 오랜 시간 동안 죄책감에 상당히 시달렸을 것이다.

이렇듯 레티시아의 행동들은 대부분 그녀 자신이나 가족, 친구의 안위와 관련된 게 많았다.

하지만 그간 레티시아가 한 모든 선행에 대한 변명을 일일이 늘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이 모든 설명을 생략한 채 테렌스 경의 반응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테렌스 경은 그녀의 대답에 토를 달지 않은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무언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저는 폐하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우즈 양이 하는 일에 간섭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아니, 다행스러운 일이 전혀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번뜩 정신을 차리고서 테렌스 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다소 위협적인 기색을 띠었다.

“테렌스 경, 지금 황제 폐하에 대한 제 충성심을 흩트리려고 하는 건가요?”

테렌스 경은 레티시아의 가시 돋친 말투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충성심이 아니잖습니까?”

“…….”

레티시아는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려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테렌스 경이 정확히 핵심을 찔렀기에.

“당신은… 호르헤 경과 다릅니다. 맹목적인 충성심과는 거리가 멀죠. 폐하의 곁에 남아 있는 이유 역시 충성심이 아닌, 다른 이유로 보입니다.”

레티시아는 우둔하지 않았기에 테렌스 경이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지 정도는 금방 알아차렸다. 그녀는 테렌스 경을 비웃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곧바로 받아쳤다.

“연심이라고 하시는 건가요? 제가, 감히, 폐하를?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보시나요?”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아닌 것 같으니, 제가 말을 꺼냈겠지요?”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다소 어이가 없었지만, 테렌스 경은 레티시아가 반박할 틈을 주지 않았다.

“따라서 우즈 양이 폐하의 곁에 머무는 건 충성심 때문도 연심 때문도 아닙니다. 제국을 대대적으로 뒤집어 놓으면서까지 한 번 그만두었다가 돌아온 것도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요. 그 이유를 알아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테렌스 경은 어딘가 슬퍼 보이는 시선으로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충성심도 연심도 아니라면, 항상 황제 폐하가 최우선인 삶에선 조금 벗어나셨으면 좋겠습니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 언제나 제 자신이 최우선이었어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황궁을 떠나지 않은 건, 상황이 제가 남을 수밖에 없도록 흘러갔기 때문이에요.”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미카엘을 탓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테렌스 경을 이해시키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 제가 곁에 있기를 원하시니까……. 누가 폐하의 명을 거역할 수 있을까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테렌스 경의 말문이 막혔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굉장히 할 말이 많지만, 함부로 입 밖으로 내었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아 고민하는 사람의 형색이었다.

마침내 테렌스 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좀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즈 양?”

“네?”

“정말로 폐하 때문에 못 떠나시는 게 맞습니까?”

레티시아는 의외의 질문에 놀랐지만, 태연한 기색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 다른 이유가 있겠어요?”

“바로 우즈 양 자신에게 있겠죠.”

“테렌스 경,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우즈 양, 정말로 충심도 연심도 아니라면 이제는 폐하가 아닌 당신 자신을 위해 사십시오. 이 궁은 당신에게 어울리는 곳이 아니에요. 그걸 아니까, 떠나려고 한 게 아닙니까?”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단순히 당혹감을 넘어 테렌스 경에 대한 분노가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했다.

테렌스 경과 그녀가 제대로 대화를 나눈 지 불과 몇 달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대체 자신과 미카엘에 대해 무얼 안다고 이렇게 몰아붙이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레티시아는 필요할 때면 자제력을 얼마든지 갖출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차분하게 응수했다.

“저는 언제든지, 폐하께서 저를 보내 주시기만 한다면 황궁을 떠날 거예요. 단지 상황이 폐하의 곁에 제가 머물 수밖에 없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에요. 이상한 생각은 그만두시는 게 좋…….”

“…우즈 양.”

어느덧 레티시아와 한 뼘가량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온 테렌스 경이 살짝 몸을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저는 저를 택해 달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여기, 오직 당신만을 위한 삶이 준비되어 있는 남자를.”

* * *

레티시아는 자신이 많이 늦었을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집무실에는 그녀와 미카엘 둘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호르헤 경 한 명뿐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 레티시아의 모습을 호르헤 경의 날카로운 시선이 훑었다.

“어디 아픈가?”

“네?”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의 걱정 어린 질문에 화들짝 놀라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테렌스 경에게 대답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난 여파가 아직 남아 있어 괜히 마음이 찔렸다.

“얼굴이 너무 빨갛군. 열이 있는 게 아닌가?”

“아, 아니에요!”

레티시아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냥, 아까 난롯불을 너무 쬐었나 봐요.”

“다행이군. 우즈 양이 아프면 제국 전체에 위해가 가니, 몸조심하도록 해.”

“네, 네.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딱딱한 집무실 분위기를 풀기 위한 레티시아의 장난 어린 대답에 호르헤 경의 눈썹이 꿈틀댔다.

“제대로 모르는 것 같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해 두지.”

레티시아가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냐고 되물으려는 찰나 미카엘이 집무실에 들어섰다.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항상 반짝거리던 잘생긴 얼굴이 심상치 않은 피로감에 젖어 있었다.

“폐하, 무슨 일인가요?”

“…….”

미카엘은 말없이 레티시아에게 검은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레티시아는 자신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숙이는 호르헤 경과 함께 보고서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

경악에 질린 두 쌍의 눈동자가 미카엘을 응시했다.

레티시아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보고서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동 교실이……!’

보고서에는 그녀와 테렌스 경이 그렇게나 고생해서 탄생시킨 새로운 이동 교실이 무장 강도의 습격을 받아 산산조각이 났다고 적혀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무장 강도는 결코 일반 강도가 아닌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행동했다는 점이었다.

마치, 제국의 정예 병사들처럼.

그런 자들을 미카엘의 정보망에서 벗어나게끔 운용할 수 있는 자들은 제국 전역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레티시아의 입에서 힘없는 물음들이 흘러나왔다.

아무도 답해 주지 못하는.

“…어떻게 이런……. 이렇게……. 왜……?”

자선 사업이다.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영지의 귀족들마저 환영할 정도로 정치색이 없고 복지 성격이 강했다.

비록 황제가 뒤에 있다는 소문이 팽배했으나 오히려 바로 그 소문 때문에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들은 교사들을 죽이고 물자를 강탈하고 이동 교실의 구조물들을 완전히 부숴 버렸다.

미카엘의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짓을 한 자를… 꼭 찾아내어 복수해 주겠다.”

“…….”

“그리고 너 역시 조심해라. 단순히 황실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보다 더한 무언가가 배후에 숨어 있는 게 틀림없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의심이 벼락처럼 레티시아의 음울한 머릿속을 직격한 것은.

황제의 정보망마저 피한 잘 훈련된 정예병들.

강도로 위장하려면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모조리 빼앗는 정도가 최선의 수였다.

하지만 이번 일은 명백히 이동 교실의 파괴가 최우선 목적이었고, 보란 듯이 절반 이상을 살려 두어 생존자들이 습격자들에 대한 정체를 말할 수 있게 했다.

마치 레티시아에게 엉뚱한 일을 벌이지 말고 지금 하는 일이나 잘하라고 경고하고자 하는 것처럼.

이 모든 단서들은 마치 짜고 친 것처럼 단 한 사실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레티시아는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건만 명백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증거는 미카엘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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