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데브란트 제국의 황제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의 낮은 직무로 가득 차 있었고, 밤은 책략과 음모로 가득 차 있었기에 오롯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은 세 시간가량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미카엘은 그 소중한 시간에 숙면을 취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머지 길고 긴 하루를 도저히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는 지독한 불면증을 겪고 있었다.
‘…….’
미카엘은 침대에 누워 잠시 뒤척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잠을 자지도 않는데 괜히 누워 있을 필요가 없다. 그는 책상으로 다가가 낮에 보다가 남은 서류들을 꺼내서 훑기 시작했다.
그때, 오른쪽 창문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미카엘은 빠르게 움직였다. 창문을 열고 날아오는 막대기를 손으로 잡은 것이다.
불빛에 비추어 보니 초록색 띠가 둘러진 막대기였다.
‘…이자크군.’
미카엘은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이자크가 문밖에서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루드밀라가 이동 교실 습격의 꼬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페르 공작이 맞더냐?”
“네.”
이자크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미카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놀라진 않았지만 조금 실망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아니길 바랐건만.’
예전부터 자신을 충실하게 섬겨 왔던 네 명의 심복들은 여전히 호르헤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다행히 레토가 처리된 이후로 페르 공작가가 몸을 사리면서 호르헤를 의심하는 목소리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다시 이렇게 페르 공작이 설치기 시작했으니 그들은 사사건건 호르헤를 물고 늘어질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내버려 둬라.”
“예. 보고서는 작성할까요?”
“아니.”
이자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너희와 나, 그리고 호르헤 경밖에 없게 될 것이니 입단속하도록.”
‘호르헤’라는 말을 들은 순간 이자크의 이마가 꿈틀댔지만 별다른 반대는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평소와 별다를 게 없는 미카엘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아니, 평소와는 상당히 다른 하루였다.
“구름.”
“폐하께서는 작년처럼 올해도 목화병이 염려되니…….”
미카엘은 레티시아만 기척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조금 손을 들어 올렸다. 레티시아가 곧바로 움찔하며 말을 바꾸는 게 느껴졌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몸이 좋지 않아서……. 폐하께서는 고산지대 거주민들의 건강이 염려되니 상주 의사를 보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미카엘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으로 뻣뻣이 굳어 있던 레티시아의 몸이 조금 풀어졌다.
두 시간 후.
그야말로 재앙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아침 회의가 끝났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말을 무엇 하나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 심지어 미카엘이 가장 쉬운 단어 몇 가지로 얘기를 하자, 레티시아보다 빨리 그 의미를 정확히 알아챈 각료도 몇 있을 정도였다.
레티시아의 모습 역시 평소와 달랐는데, 항상 여유 있고 차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만 계속 흘리고 있었다.
미카엘은 그 이유를 알았다.
너무나 잘.
마침내 회의가 끝나고, 미카엘은 호르헤와 단둘이서 빈 비밀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회의실에서 집무실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기 때문에 평소 자주 다니는 통로였다.
먼저 말을 꺼낸 건 호르헤였다.
“저대로 두실 겁니까?”
“뭐를?”
“아시잖습니까. 우즈 양을요.”
“…….”
“저렇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지금이라도 말씀을 하셔야……. 좀 전에는 너무 안쓰럽더군요.”
“지금처럼 해야 해.”
“예?”
호르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저걸… 의도하셨다는 말입니까?”
“…….”
미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의도하지는 않았다. 이동 교실이 탐탁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레티시아가 그렇게 정성을 들인 것을 박살 낼 만큼 자신은 비정한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페르 공작이 술수를 썼을 때 조금 잘되었다는 생각을 한 건 사실이었다.
그 직후 혐오감이 밀려오기는 했지만. 그리고 미카엘은 그 혐오감 속에서 답을 찾아내었다.
이대로 그녀가 자신의 곁에 머물렀다간 언젠가는 자신의 손으로 망가뜨리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레티시아 우즈는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와 함께해선 안 되었다.
그리고 지금이 그녀를 보내 줄 유일한 기회였다.
* * *
‘미카엘…….’
레티시아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황제의 이름을 읊조렸다.
오늘, 그녀는 아주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쓸모없는 존재가 된 기분이 들었다.
항상 레티시아는 누군가에게든 쓸모가 있는 사람이었다. 집에서도 그랬고, 집에서 탈출한 뒤 일했던 남작가에서도 그랬고, 황궁에 들어와서도 그랬다. 딸에서 하녀로, 하녀에서 번역기로 계속해서 역할이 바뀌었지만 레티시아는 그 무엇이든 우수하게 해내었다.
하지만 오늘, 레티시아는 몰아치는 파도에 엉망진창이 되는 모래성처럼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다.
레티시아가 미카엘의 말을 전달할 때마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계속해서 예전처럼 미카엘의 의중을 열심히 살피려고 했지만 왜인지 입 밖으로 나오는 건 하나같이 그의 뜻을 헛짚는 의미뿐이었다.
‘미카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자기를 의심하고 있는 걸 눈치챘을까. 아니면 내가 단순히 충격 탓에 집중력이 떨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했을까…….’
레티시아는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원래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을 오래 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미카엘에 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정신 차리자, 레티시아. 미카엘이 이동 교실에 손을 썼다는 게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심증일 뿐이야. 일에 지장이 갈 정도로 의심해선 안 돼.’
레티시아는 필사적으로 미카엘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연히 그 자리를 차지한 건, 테렌스 경이었다.
‘…….’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과 관련된 문제만 해도 해결하기가 너무 어려운데, 답변을 미뤄 둔 테렌스 경과의 문제를 생각하니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결국 레티시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 오후에 다시 미카엘과 마주해야 한다. 회피하는 것보다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게 낫다.
‘이건 순전히 내 문제야.’
이동 교실을 파괴한 게 미카엘이 맞는다 하더라도 레티시아는 그의 곁에서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해야 했다. 그녀가 아니면 수행할 사람이 없으니까. 떠날 때는 떠나야 하더라도,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 주어진 역할에서 강제로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말하자.’
레티시아는 결심했다.
‘대놓고 말을 하는 거야. 말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않으니까.’
그동안 일종의 기술이라고 생각해 왔던 레티시아의 능력은 그간 미카엘이 그녀를 속여 왔다는 게 밝혀지면서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지만, 레티시아는 이런 문제에서만큼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더는 미카엘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필사적으로 애쓸 필요가 없었으니까.
지금, 레티시아에게는 미카엘의 진심이 필요했고, 진심은 오롯이 발화자의 말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법이다.
레티시아는 예정보다 몇 시간이나 일찍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미카엘이 다소 놀란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아니, 놀란 얼굴이 맞기는 한 건가? 다시 보니 무표정한 얼굴인 것 같기도 해서, 레티시아는 자신의 판단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들에게 미카엘이 놀랐는지, 아니면 감정을 감추고 있는지 설명해야 할 때가 아니었기에 레티시아는 더는 미카엘의 얼굴을 분석하지 않았다.
“…레티시아.”
“오늘, 죄송했다고 사과드리려고 왔어요.”
“…….”
“죄송해요. 제가 너무 집중을 못 해서……. 요새 다른 일들에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아요.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요.”
“…레티시아.”
미카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왔다. 묘한 위압감이 느껴진 탓에 레티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미카엘은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은 채, 묘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일은 크게 신경 쓰지 마라. 그런 일도 겪었으니, 충분히 이해하니까.”
“네?”
레티시아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머리로 피가 몰려 귀가 먹먹했다.
“네… 사업 말이다.”
미카엘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무장 강도들에게 습격당한.”
“무장 강도가 아니었잖아요. 그때 폐하도 같이, 보고를 들으셨는데…….”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팔에 소름이 우수수 돋아났다. 만약 정말로 범인이 미카엘이 맞는다면 자신은 지금, 위험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다
“그래. 어디의 사병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사업에 원한을 지닌 이들이 있다.”
“자선 사업이에요. 사업 자체에 원한을 가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있다면 저 자신에게겠죠.”
“그렇지 않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굳이 미카엘의 표정을 살피려 하지 않은 채 시선을 창문으로 돌린 레티시아와 달리, 미카엘은 여전히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녀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었다. 그 사실 역시 불편하여 레티시아는 자리를 옮겼다.
‘이제 말해야 해.’
레티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말을 빙빙 돌리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카엘이 무슨 말을 하건 간에 믿기로 결심하며 이 자리에 왔다.
이제는 그 말을 들을 차례였다.
“폐…….”
레티시아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미카엘의 무거운 음성이 그녀의 귀에 꽂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 한마디가.
“사직해라, 레티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