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레티시아는 질문을 위해 입을 벌린 그 모습 그대로 얼어붙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달음박질하던 심장이, 무덤덤하게 내뱉어진 말 한마디에 산산이 조각났다.
“…….”
침묵이 아프게 느껴졌다.
미카엘은 그 한마디만을 내뱉은 채 입을 열지 않았고, 레티시아는 어떻게든 말을 꾸며 내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 다시 닫을 수밖에 없었다.
“…폐하.”
레티시아의 입에서 제대로 된 소리가 되지 못한 채 사그라지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미카엘은 그 미세한 소리를 잡아낸 듯했다. 곧바로 잘 빚은 대리석 조각 같은 이마가 찌푸려진 걸 보면.
“대체…….”
레티시아는 계속해서 속삭였다. 말을 해야만 했지만, 여느 때처럼 또렷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인가요?”
레티시아는 겨우 한 문장을 완성했다. 이 상황을 감내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벅찼기에 이유를 묻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졌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물어야만 했다. 아니, 알아야만 했다.
왜, 그간 항상 자신을 온갖 수단으로 붙잡아 왔던 미카엘이 이제 와서 그녀를 내쫓는지.
그 이유가 정말로 그녀가 생각하는 그 이유인지, 아니면 미카엘이 정말 그녀를 내쫓고 싶어서인지.
“말해 줄 수 없다.”
“……!”
“네게 대답해야 할 의무는 없을 테다만.”
레티시아는 비틀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 결코 그의 입에서 나올 리가 없는 말을 입 밖으로 내고 있었다.
만약 레티시아가 조금만 더 차분했더라면 미카엘의 얼굴에서 몇 가지 복잡한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이미 이동 교실이 습격당한 사실 탓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미카엘의 얼굴은 그가 보여 주려고 의도한 무감정한 얼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느껴졌다.
“후임은 걱정하지 말도록. 믿을 만한 자를 뽑아서 앉힐 테니.”
“저는…….”
레티시아는 입을 닫아 버렸다.
차마 뒷말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어서였다. 자신은 믿을 만하지 않아서 그만두라고 하는 거냐고, 그런 거면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하지만 레티시아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입 안을 맴도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일까 봐 두려웠기에.
둘은 움직이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송곳처럼 레티시아의 살갗을 찔렀다. 그들은 결코 눈을 깜박이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는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균형을 깬 건 레티시아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방을 나서는 순간, 레티시아는 더는 미카엘의 사람이 아니게 된다.
지금 묻지 않으면 영원히 그 답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폐하, 명하신 대로… 물러나겠습니다. 인수인계는 매로프 양에게 준 자료를 그대로 사용하시면 될 듯합니다. 단…….”
레티시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하게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등잔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빛 머리칼, 조각 같은 이마와 콧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처럼 일렁이는 청록빛 눈…….
레티시아는 그간 번역을 위해 저 잘생긴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곤 했다. 눈을 감으면 솜털 하나, 점 하나, 관자놀이 쪽으로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의 모양새까지도 일일이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이제 저 얼굴은 레티시아가 감히 닿을 수도 없는 용안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카엘의 얼굴을 기억하고자 하는 레티시아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는지, 입을 먼저 뗀 쪽은 레티시아였으나 그녀의 집요한 시선을 버티지 못하고 먼저 고개를 돌리고 만 건 미카엘이었다.
레티시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미카엘에 대한 기억들이 순식간에 쏟아져서 수십 수백 개의 불꽃으로 화하는 폭죽처럼 머릿속에서 팡팡 터졌다.
10년.
그동안 레티시아는 이 천사처럼 아름다운 남자와 수없이 많은 일들을 겪어 왔다.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주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미카엘은 좋은 상사는 아니었지만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궁에서 함께 자란 가족이었으니까.
가족과 헤어진다는 게 이렇게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니.
레티시아는 입 밖으로 내었다간 당장 불경죄로 붙잡혀 갈 듯한 생각을 하면서도 용감하게 말을 이었다.
“질문 한 가지, 해도 될까요?”
“…….”
미카엘은 거절하지 않았다.
즉, 레티시아의 질문 자체를 막지는 않겠다는 말이었다.
다행이었다.
레티시아는 제 발로 궁을 떠나는 게 아니다. 미카엘이 그녀를 사실상 해고했다. 즉, 이 순간이 지나면 더는 레티시아에게 아무런 기회가 없었다.
레티시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미카엘이 자신을 왜 이제 와서 해고하는지, 대체 그 믿을 만한 자가 누구인지, 심지어 원래 물으려 했던 이동 교실의 습격을 사주했는지조차 물을 생각이 없었다.
그 물음들뿐만 아니라 그동안 쌓여 온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한데 뒤엉켜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레티시아가 뱉어 내지 않고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폐하, 왜 그때… 국경을 넘지 않으신 건가요?”
레티시아가 그간 미카엘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지지 않은 건 아니었다. 미카엘이 결국 권력에서 등을 돌리지 못한 게 이유였다고 한들 그가 황궁으로 돌아오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카엘이 동요했다.
그녀에게 사직하라는 말을 던지던 입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닫혀 있었으며 눈은 레티시아의 시선을 받아치지 못하고 흔들렸다.
미카엘이 답변할 생각이 없다는 게 확실해지자 레티시아는 더 추궁하지 않고 천천히 문으로 향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미카엘은 단순히 황위를 탐하여 돌아온 건 아니었으나 그녀에게 진실을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레티시아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녀가 완전히 빠져나가려는 찰나, 미카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부터 이 자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를… 방심시키기 위해 네 놀음에 잠깐 어울려 주었을 뿐이다.”
피가 얼어붙었다.
미카엘의 말이 담고 있는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적어도 저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 만큼 당시의 상황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미카엘이 그녀와 함께 야반도주를 하여 선황이 방심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미카엘이 포기해야 했던 것들도 많았으리라.
무엇보다도 결국 돌아올 생각이었다면, 그 기간 동안 레티시아와 함께 진정으로 미래를 꿈꾸었던 미카엘은 대체 어디의 누구였다는 말인가?
그 당시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진실은 확실했다.
미카엘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
진실을 얘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
그녀는 미카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차분하게 집무실을 나서고서, 육중한 문을 힘을 주어 닫았다.
마치 안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 * *
오늘로 황궁을 떠나기 위해 짐을 꾸리는 건 무려 네 번째. 그중 세 번을 함께한 애슐리는 이제 담담하게 반응했다.
“이번에는 어디 이상한 곳에 끌려가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해요.”
“조심할게요.”
“레티시아 님은 항상 말만 그렇게 하신다니까!”
“이번에는 진짜로 조심하려고요. 용병도 여럿 고용했어요.”
레티시아는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실력 좋다는 용병을 수소문하여 거금을 쥐여 주고 자신의 호위로 삼았다.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그때 가서 수를 줄일 생각이었다.
“다행이네요.”
애슐리가 대놓고 안도하며 레티시아를 껴안았다.
“그럼, 잘 지내야 해요. 황궁에도 종종 놀러 오시고요.”
황궁 방문이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은 아니었지만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애슐리를 보기 위해서라도 올게요.”
레티시아는 용병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대기실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그동안 몇 번이고 떠나고 싶어 했던 곳이기에 장소 자체에 대한 애착은 없었다.
용병은 본디라면 황궁에 발 자체를 들일 수 없는 자들을 위한 대기실에서 그녀를 기다리다 마차에 함께 타기로 되어 있었다.
‘……?’
대기실 문을 벌컥 열자마자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눈앞에 자신이 고용한 우락부락하고 거칠디거친 용병과는 거리가 먼, 말쑥한 기사가 벽면에 기대선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테렌스 경이었다.
할 말을 잃은 것도 잠시, 다행히 레티시아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의례적인 인사말 하나 없이 딱딱하게 물었다.
“테렌스 경, 제가 고용한 용병을 못 보셨나요? 계약 조건에 따르면 여기서 저를 기다리고 있어야 하거든요.”
“길거리 건달에도 질 것 같은, 그 실력이 형편없는 놈이 우즈 양께서 고용한 사람이었습니까?”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테렌스 경 역시 한때 황태자의 검술 교관을 맡을 정도의 실력자.
대귀족이 아닌, 작은 사업체의 대표에 불과한 레티시아가 구할 수 있는 용병이 성에 찰 리가 없었다.
“그래서 제가 고용한 용병을 쫓아내신 건가요?”
“쫓아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자가 저를 먼저 이곳에서 내보내려고 했기에, 그걸 막았을 뿐입니다.”
“…그자는 어디에 있죠?”
“친절하게 의사를 불러 주었습니다.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여서요.”
“…….”
“우즈 양.”
“…….”
“제가 이런 일을 하는 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이러지 않고서야, 다시는 얼굴을 볼 기회가 없을 것 같더군요.”
“…….”
테렌스 경의 말 중 무엇 하나 틀린 게 없었기에 레티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 사이의 끈은 오직 자선 사업의 파트너라는 점 하나뿐이었고 그 끈은 이동 교실이 습격받으면서 끊어져 버렸으니까.
“우즈 양, 전에 제가 했던 잡설들은 잊어 주십시오. 단… 질문 한 가지만, 해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