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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91/150)

91화

레티시아는 기시감을 느꼈다. 테렌스 경은 조금 전 그녀가 미카엘에게 물었던 질문을 그대로 들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테렌스 경이 그녀와 미카엘의 대화를 알 리가 만무하니, 그저 우연의 일치이리라.

“네. 뭔가요?”

레티시아는 결심했다.

그 어떤 당혹스러운 질문을 받든 간에 솔직하게 대답해 주겠다고. 조금 전,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던 미카엘과는 달리.

테렌스 경은 입을 제대로 열지 못한 채 잠시 머뭇거렸다. 절실하게 그 답을 듣고 싶은 질문이 있으나 정작 상대의 입에서 나올 답이 두려워 망설이는 자의 모양새였다. 레티시아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조금 전 미카엘이 그녀에게 준 충격만큼은 못 할 것이다.

“…대체 왜 폐하께서 우즈 양을 내치신 겁니까?”

레티시아의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을 지경까지 커졌다. 테렌스 경은 이번에도 레티시아를 당황시키는 데 성공하고 말았다.

레티시아는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아파 왔다. 자신의 사직은 해고가 아닌, 일전 한 번 있었던 자진 사퇴로 알려졌다.

사실 레티시아는 해고당했다고 알려져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좀 부끄럽고 사업에 지장이 가기는 하겠지만, 실제 일어난 일이 그런데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미카엘은 이번에도 레티시아가 자진해서 사퇴했고, 자신은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으며, 황궁에서 나간 이후에도 레티시아는 여전히 황실의 일원일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덕분에 생활이 훨씬 편해지기는 했기에, 레티시아는 미카엘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이런 걸 보면 나도 참 비겁하긴 하단 말이지.’

어차피 진실보다 미카엘이 꾸며 낸 것들이 사람들이 더 좋아할 만한 말들이었다.

아마 몇몇 각료들에게서 연락은 오겠지만, 이미 그녀와 미카엘 사이의 기류가 심상치 않는다는 점은 알 테니 눈치껏 처신하리라.

하지만 테렌스 경은 이제 더 이상 황실 소속도 아니요, 그와 레티시아의 마지막 만남 이후로 황실에 출입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미카엘이 자신을 내쳤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말인가.

레티시아는 일단은 성실하게 대답하기로 결심했다.

“…모르겠어요.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모르겠어요.”

“역시 그렇습니까…….”

테렌스 경은 신음에 가까운 한마디를 뱉어 냈다.

“어떻게 아셨나요?”

“그저, 짐작했을 뿐입니다.”

“감이 좋으시군요. 예지몽이라도 꾸셨나요?”

“설마요.”

테렌스 경은 어딘가 구슬프게 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지 우즈 양이, 지금으로선 황제 폐하를 떠나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았거든요. 그러면 남은 가능성은… 폐하 본인이시니까요.”

“원하던 대로 되셨네요.”

허를 찔린 기분이 들자 가시 돋친 말이 튀어나왔다. 테렌스 경이 예전부터 미카엘을 일종의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야 눈치챈 지 오래였다.

뭐, 딱히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테렌스 경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미카엘에게 인생 전체가 붙들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얼마 전, 바로 미카엘에 의해 레티시아를 붙들고 있던 고리들이 모두 떨어졌다.

그러니 레티시아는 테렌스 경의 소원대로 움직일 확률이 높을 거라고, 테렌스 경은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테렌스 경은 여전히 슬퍼 보이는 눈으로 레티시아를 응시할 뿐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나요?”

“저는… 우즈 양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원했습니다. 원해서… 저를 선택해 주기를 바랐죠.”

“…….”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즈 양은 영영 이곳에서 떠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레티시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왜 제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거죠? 지금 떠나고…….”

“그리고 이곳을 그리워하겠죠.”

“…….”

“저는… 우즈 양이 왜 그렇게까지 이곳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즈 양에게 돈과 명예, 사랑을 안겨 준 건 저 바깥 아니었던가요?”

“…여긴 제 집이었어요.”

레티시아는 굳이 미카엘이 자신의 가족이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테렌스 경이 거기까지 짐작했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설령 짐작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입으로 확인시켜 줄 필요가 없었다.

“천만에요, 우즈 양.”

테렌스 경은 그녀에게 면박을 주려는 투가 아니었다. 단지, 담담하게 현실을 일깨워 줄 뿐이었다.

“황실이 집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황족뿐입니다. 우즈 양과는 거리가 멀죠.”

“…….”

“우즈 양의 집은 밖에 있을 겁니다. 여태까지 없었다면 지금 새로 지으면 돼요. 어렵기야 하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집을 짓는 걸 도와주겠다는 말인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테렌스 경이 씁쓸하게 웃었다.

“얼마 전 저는… 강하게 나서서라도 당신의 시선을 빼앗아 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난 듯하군요.”

“…….”

“우즈 양, 우즈 양이 저와… 같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 정도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달라질 가능성도 희박하겠죠.”

레티시아는 굳이 그렇지도 않다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조용히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테렌스 경은 정확히 짚었다. 레티시아가 테렌스 경에게 흔들린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그에 대한 없던 감정이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상징하는 삶 때문이었다.

황실로부터 벗어나, 그녀 자신의 행복을 찾으며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

레티시아가 몇 번이고 손에 넣으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던 그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달음박질치며 두근거렸던 것이다.

그리고 미카엘은 바로 그 삶 속으로 레티시아를 강제로 내던졌다.

“하지만 저는… 우즈 양이 원하는 삶을 드릴 수 있습니다.”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말에, 레티시아는 눈을 크게 떴다.

“다른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를… 사랑해 달라느니, 그런 허망한 요구를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테렌스 경의 손이 레티시아를 향해 아주 조금, 가까워졌다.

“하지만 이제 우즈 양은 좋든 싫든, 새로운 삶으로 뛰어드셔야 합니다. 제가 그 파트너가 될 순 없겠습니까?”

침묵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테렌스 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일전에 자신은 도망쳤지만 이제는 대답해야 할 때였다, 만약, 그가 물어 온 시기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그녀는 적어도 미카엘이 그 본연의 불안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그를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미카엘이 그녀를 내치지 않았는가.

이제 그녀가 테렌스 던워디에게 해야 할 말은 미카엘과 관련이 없이, 오직 그녀 자신의 의지만이 달려 있는 대답이었다.

“테렌스 경.”

“예.”

“저는… 경이 아무런 기약 없이 절 기다리고, 희생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레티시아는 돌려 말했지만 그 의미는 명확했다. 테렌스 경을 가지고 놀고 싶지가 않다는 것.

테렌스 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즈 양께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저도… 제 위치를 잘 알고 있고요. 둘 모두가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데, 어떻게 우즈 양이 절 가지고 노는 게 됩니까?”

레티시아는 오른쪽 손바닥으로 잠시 얼굴을 덮었다가 뗐다. 겨우 조금 전에야 깨달은 진실을 말하려니 입이 좀처럼 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테렌스 경은 알아야만 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결국엔 전 폐하께서 다시 부르시면 이곳으로 돌아올 테니까요. 경에게 그런 일을 겪게 할 수는 없어요.”

그는 결국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인지 레티시아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레티시아는 그의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우즈 양, 무례하다는 걸 알겠지만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

“대체 ?니까? 왜, 당신은 그렇게 계속 그자에게로 돌아가려고 하는 거죠? 연심도 아니고 충심도 아니다. 그러면 실체 없는 감정만이 남을 뿐 아닙니까! 당신 스스로도 정의 내릴 수 없는!”

“…가족, 이라고 생각해요.”

레티시아의 입에서 여태까지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미카엘 본인에게도 말한 적 없는 표현이 튀어나왔다.

테렌스 경의 눈이 경악으로 굳어졌다.

“그게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미, 아니 폐하는… 제게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분이셨고 한때는 저 역시 그분에게 비슷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오랜 기간 숨겨 왔지만 그 자리에 있다는 게 너무나 확고했던 감정을 내보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 폐하를 떠날 수가 없었어요. 항상 폐하께서 절 붙잡아 왔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제가 미카엘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쪽에 가까워요. 제 유일한 가족에게서…….”

레티시아는 자신이 미카엘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테렌스 경 역시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건 그 점이 아니었으므로.

마침내 마음을 정리한 테렌스 경이 쓰게 웃었다.

“가족, 가족이라……. 제가 물러날 수밖에 없겠군요. 우즈 양의 유일한 가족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

“하지만 우즈 양, 하나만 약속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우리의… 자선 재단에 사내 연애를 금지하는 조항을 만들어 주십시오.”

레티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현재로선 자선 재단에 그때그때 임시로 계약된 사람이 아닌, 정식으로 소속된 사람은 레티시아와 테렌스 경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경, 그 말은…….”

“가족에 졌다는 것보다, 내규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 없어서 물러났다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우즈 양의 파트너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테렌스 경이 어딘가 망설이고, 또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레티시아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레티시아는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고 악수했다.

“하나밖에 없는 파트너의 말인데, 들어드려야죠.”

“그렇습니까.”

테렌스 경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무너져 가는 일련의 감정들을, 가면 같은 미소 뒤로 숨기는 데는 성공했으나 삭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는 레티시아의 손을 평소의 악수보다 아주 조금 길게 잡았다가, 그녀가 눈치채기 바로 직전 겨우 놓아주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즈 양.”

이제 신사적인 동업자로 돌아갈 때였다.

적어도 당분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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