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Chapter 13.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
새로운 집은 많은 면에서 황실보다 아늑했다. 레티시아는 더는 평범한 벽면을 볼 때 그 뒤에 숨은 비밀 통로를 찾으려 하지 않았으며, 언제 어디에 암살자가 숨어 있을까 봐 마음을 졸이지 않았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아직도 자신이 거금을 들여 장만하고 꾸민 집이 그녀 소유의 집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베스에게 상담을 해 보았지만, 그녀는 특유의 흥, 하는 비웃음을 내었을 뿐이었다.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뭐가 문제야?’
‘정말 모르겠어?’
‘…….’
한 가지 웃기는 사항은, 레티시아 본인도 문제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황실이 그리웠다.
좀 더 정확히는, 미카엘과 함께하는 삶이 그리웠다.
레티시아는 일전 자신이 미카엘을 자발적으로 떠나려 했을 때, 성공했더라면 이런 기분을 느꼈을지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결론은 ‘그렇다’였다.
‘당연한 과정이야.’
레티시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은 10년을 일한 직장이자 집을 떠났다. 당연히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레티시아는 새로운 비서가 누구인지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사방이 모두 그 얘기였기 때문에 싫어도 억지로 들어야 했다.
비서의 이름은 이자크.
그간 황궁에 공식 출입 한번 하지 않았고, 신원조차 불분명한 떠돌이 기사였기에 담당 각료가 뇌물을 먹었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물론 레티시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미카엘은 의심이 많았다. 만약 그가 비서를 아예 두지 않거나 호르헤 경을 비서로 두는 방법이 아닌, 여태까지 수면 위로 한 번도 올라온 적이 없는 이를 등용했다면 그건 이미 그 자신의 사람임을 미카엘이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수면 위든 밑이든, 미카엘을 위해 일하고만 있으면 되는 문제 아니겠는가?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고 두카트의 장부를 집어 들었다. 자선 사업엔 그녀와 테렌스 경의 자산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한들 두카트의 재정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하지만 사업이란 건 그렇게 단순하게 굴러가지 않는 법이다.
두카트의 대표가 던워디 백작가 같은 부유한 가문과 손을 잡고 야심차게 출발한 자선 사업이 무너진 데다 그 레티시아 우즈 역시 황제의 비서를 완전히 그만두었다는 사실에, 두카트에 투자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일제히 뒷걸음쳤다.
두카트에 투자자가 딱히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걱정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더군다나 레티시아와 베스는 새로운 투자자들을 모아 두카트 역시 지금보다 더 키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법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처음부터 레티시아가 대대적으로 자선 사업 홍보를 하지 않았다면 두카트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을 투자자들이다.
지금으로선 최대한 현상을 유지하면서 가진 자산으로 두카트를 잘 운영하는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덕분에 레티시아가 일에 몰두하고 또 몰두할 수 있었으니까.
미카엘과의 삶을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로.
* * *
“상자.”
“폐하께선 베리스 백작의 부당이득을 국고로 환수하라고 명하셨습니다.”
“…….”
침묵이 흘렀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그러겠다고 대답했을 파크 재상은 덜덜 떨며 황제의 눈치만을 살폈다.
황제의 미간은 확연히 찌푸려져 있었는데, 새로운 통역의 방금 해석이 탐탁지 않음을 뜻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감히 통역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황제의 의중은 다른 데 있다는 걸 알았기에.
쿵.
미카엘이 앉은 자세 그대로 허리에서 단검을 빼내 탁자 위에 냅다 가져다 꽂았다.
단검은 그들이 조금 전까지 펼쳐 두고 열심히 논의하고 있었던 베리스 백작가의 상징 위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이젠 모두가 미카엘이 뜻하는 바를 이해했다.
멸문.
베리스 백작의 죄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단지 일부 영지민들에게 정해진 세율보다 조금 더 높은 세를 걷어 온 것. 그리고 국가에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아 추가 수익을 모두 홀로 횡령한 것이 전부였다.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주들은 공공연히 저지르고 있는 짓이기도 했다.
베리스 백작이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간 크게도 수도 바로 인근 영지에서 그와 같은 행각을 벌인 것이었다.
사실 그의 일탈을 큰 문제로 받아들이는 자는 없었다. 베리스 백작은 페르 공작 등 미카엘의 정적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자였으며,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데브란트 제국에 비리는 만연했으므로 흔하디흔한 문제 중 하나였다.
이렇게 황제의 코앞까지 안건이 올라온 건 고발한 자가 바로 각료 중 한 명인, 드웨프 후작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말을 꺼낸 그조차도 거창한 명분 때문에 베리스 백작을 고발한 게 아니었다. 그는 각료들 중 유독 한직을 맡았고, 발언권은 더더욱 없었기에 이렇게라도 황궁에서의 자리를 지켜 보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무려 황제 본인이 사소한 문제를 큰일로 키우다니.
이번 황제 대에 들어서 빈번해지긴 했지만 멸문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가주와 후계자는 처형당하며 나머지 일가는 죄의 경중에 따라 처형당하거나 평민으로 신분이 강등된 채 뿔뿔이 흩어지고, 지위와 재산은 황실에 귀속된다.
이 문제를 회의로 가지고 온 드웨프 후작도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감히 누가 반대하겠는가.
국가를 속인 자를, 국가 자신이 처단하겠다는데.
“명, 따르겠습니다.”
재상의 떨리는 목소리로 회의는 끝을 맺었다.
잠시 후.
미카엘과 그의 심복 넷은 높다란 창을 통해 햇빛이 쏟아지는 방 안에 좁은 탁자를 두고 둘러앉았다.
힐데가르트가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이자크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냐, 이자크.”
“…….”
“폐하의 말을 잘못 전달하다니!”
“실수였습니다.”
“실수? 그게 실수라고? 우리가 함께 모여 정한 단어 중 하나였잖나! 심지어 암기력은 네가 우리 넷 중 가장 좋아서 너로 정했지. 누가 봐도 고의인데,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못할망정 나는 물론이고 폐하까지 속이려 들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미카엘은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그는 이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이자크가 그의 통역이 되었을 때부터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괜찮다. 예상했던 일이니.”
“예?”
“이자크를 탓할 것 없다. 너희 넷 중 누가 내 통역이 되었든 일어났을 일이니까.”
“아닙니다, 폐하!”
고개를 끄덕이는 이자크와 테오와는 달리, 힐데가르트와 루드밀라는 진심으로 억울한 목소리로 미카엘을 향해 외쳤다.
“너희들 모두, 내가 베리스 백작에게 너무했다고 생각하지 않나.”
“…….”
베리스 백작은 호인이었다.
단지 돈 욕심이 많아 탐욕스레 긁어모았을 뿐, 주위 사람에게 너그러웠으며 웬만한 잘못을 저지른 영지민들의 처벌도 면제해 주었다.
그래서 세금을 다른 지역보다 부당하게 많이 내고 있는 영지민들조차 베리스 백작을 좋아했다.
당연했다. 다른 영지에서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빵을 훔친 어린아이의 손목을 잘랐지만, 베리스 백작령에선 그 어린아이를 배불리 먹인 후 그 부모에게 강제 노역을 한 달간 시켰다.
몸이 힘든 게 어린 자식이 평생 불구가 되는 것보다는 나은 셈이다.
미카엘의 심복들 역시 그를 좋아했다. 베리스 백작은 콧대 높은 귀족이라기보단 속물근성이 가득한 상인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여태까지 미카엘이 죽여 온, 핏줄밖에 모르는 자와는 달랐다.
루드밀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베리스 백작의 경우엔 경고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그렇지?”
미카엘이 쓰게 대답했다.
“굳이 멸문까지는…….”
“필요해. 본보기가 될 테니까.”
“…아.”
알겠다는 신음이 루드밀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군요. 그렇죠. 예전부터 정해진 세율을 지키지 않는 건 폐하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으니까…….”
“이 제국의 골칫거리지.”
“그게 그것 아닙니까?”
미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일전에 레티시아의 손을 잡고 황실로부터 달아났던 바로 그 순간부터 황실과 자신을 분리했다.
하지만 그에게 이 자리를 맡겨 버린 사람들은 분리를 원하지 않았고, 이 네 명의 충신들 역시 그런 부류였다.
“베리스 백작은 시작에 불과해.”
“국경 지대의 소귀족들마저 모두 쓸어버릴 생각이십니까?”
“베리스 백작 같은 문제를 일으킨 자들만.”
“그자들이 문제가 크다는 건 알지만, 그들 모두를 쓸어버린다면 누가 그 지역을 다스립니까!”
“그들보다는 더 나은 자들이 다스리게 되겠지.”
“…과연 그렇군요. 폐하의 뜻, 받들겠습니다.”
결국 이자크마저 미카엘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 제국의 청사진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누었고, 국경 지대가 지금처럼 혼란과 수탈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데 모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전서구 한 마리가 창을 통해 들어왔다. 미카엘이 일어나서 전서구의 다리에 묶인 종이를 풀었다.
“…….”
미카엘은 종이를 단숨에 우그러뜨렸다.
“폐하, 무슨 일입니까?”
“두카트.”
“예?”
미카엘은 그 말 한마디만을 내뱉은 채 이를 악물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제대로 된 말은 단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사고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로 머리가 이글거렸기에.
레티시아가, 위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