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레티시아, 이거 좀 봐 줘!”
베스가 숨을 헐떡이며 레티시아에게 서류 무더기를 넘겼다. 레티시아가 질린 얼굴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게 다 뭔데?”
“네 바보 같은 짓에 동참하겠다는 사람들의 명단. 네가 사람 보는 일은 잘하잖아. 안 그래?”
레티시아는 간략한 인적 사항과 자기소개, 그리고 이력이 적혀 있는 서류들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모두 보육원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에 자신이 얼마나 소질이 있고 또 원하는지 설명하고 있었다.
보육원은 두카트의 새로운 시도 중 하나였다. 처음엔 아이가 있는 사내 여성들의 원활한 업무를 돕기 위해 시작한 복지 시설이었는데, 그동안 데브란트 제국에 아이를 돌보는 시설이라곤 갈 곳 없는 고아들을 키우는 고아원밖에 없었기 때문에 획기적인 시도였다.
점차 소문이 퍼지며 보육원에 아이를 맡기기 위해 두카트에 취직하는 걸 절실하게 원하는 여자도 종종 나올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당연히 지금으로선 직원들의 아이를 감당하는 것만으로 벅차서, 네 살이 넘는 아이를 데려오는 걸 금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네 살, 다섯 살짜리 아이들도 집에 혼자 내버려 두기엔 너무 어리다는 직원들의 애원이 들려온 탓에 레티시아와 베스는 보육원의 확장을 구상했다.
좀 더 정확히는, 베스는 투덜거리긴 했지만 레티시아의 구상을 도와주었다.
투자자들이 떠난 건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그전까지 청소와 빨래라는 두카트의 영역 이외로 확장하는 걸 반대하던 베스가 외부 아이들의 보육으로 사업 자금을 충당하는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레티시아는 어쩔 수 없는 방치를 받으며 크는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수도 없이 봐 왔기 때문에 처음부터 두카트 보육원의 확장에 찬성했다.
“그런 것치고는 성과가 좀 그렇긴 한데……. 알겠어.”
“단, 최종 결정을 하기 전엔 나도 한번 볼 거야. 넌 사람이 너무 좋으니까. 알겠지?”
“누굴 아직도 어린애로 보고.”
베스가 눈을 부라렸다.
“아직도 솜털 보송보송한 어린애 맞구먼. 이상한 일들이나 해 대는 걸 보니까. 뭐, 이번만큼은 돈이 필요하니까 봐줄게.”
“베스…….”
레티시아는 결국 웃고 말았다. 베스의 말들이 결코 가시 돋친 의미 그대로 들리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베스는 그녀 나름의 방식대로 레티시아에 대한 걱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열심히 해 볼게. 그런데 너무 걱정하지는 마. 이렇게 힘든 일에 자원하는 사람이니, 대체로 좋은 사람들 아니겠어?”
“그게 바로 순진한 어린애 같은 생각이라는 거야.”
“어린애라니!”
“내 말 들어. 사람은 일단 의심하고 봐야 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으신 베스 님.”
레티시아는 빠르게 후보를 수십 명 추려 냈다. 베스가 교차 검증을 거칠 예정이었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정할 수 있었다. 이 중 문제가 될 듯한 자를 베스가 걸러 내게 될 것이다.
다행히 보육원 운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두카트가 보육원에 외부 어린아이도 받는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어느덧 예약자 명단을 만들어 두어야 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심지어 예약 번호를 두고 패싸움마저 일어날 정도였다.
레티시아는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했지만, 죄책감을 얻을 정도로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을 할 땐 밝은 면을 보아야 오래 일할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언제 황제의 비서였냐는 듯 이제 명실상부한 두카트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베스는 스스로 그녀 뒤로 물러났고, 두카트는 어느덧 레티시아가 없다면 지속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레티시아는 자신의 위상이 두카트에서 높아지기만 한다는 사실이 불편하게만 느껴졌으나, 베스는 그녀의 고민을 간단하게 일축했다.
“그게 정상이야. 두카트는 원래 네 것이었으니까. 비정상이었던 게 정상으로 돌아왔을 뿐인데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하지만, 내가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네가 다시 황실의 개가 되는 게 아니라면 그럴 리가 없잖아. 왜, 돌아가고 싶어?”
“…아니.”
레티시아는 조금 허를 찔린 느낌이 들었지만 황급히 부인했다. 베스는 기묘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 말이 거짓말만 아니길 바라야겠네.”
레티시아가 손사래마저 치며 거짓말이 아니라고 할 때였다. 그녀가 직접 고용한 급사가 헐레벌떡 사무실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채, 헐떡이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무슨 일이지?”
“…보, 보, 보육원이 고발당했습니다.”
“뭐?”
급사는 더듬거리며 고발 사항을 주절거리더니, 레티시아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양피지 한 장에 빼곡히 적힌 고발 사항들은 사소하다 못해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발코니 규격을 지키지 않았다는 둥 만약 같은 기준대로라면 수도 모든 사람들이 잡혀가야 할 고발 사항들을 읽어 내리며 레티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하나같이 신경 쓸 게 못 되는 것들이야.”
“무, 문제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급사는 레티시아가 아직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자 발을 동동 구르면서 상황을 전달했다.
“고발자들 명단을 보십시오.”
“…….”
레티시아는 양피지를 든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고발자들엔, 수도에 사는 하급 귀족들의 이름이 열댓 명은 적혀 있었다.
누굴 탓할 것도 없는, 오직 그녀 자신의 실수였다.
보육원은 그동안 데브란트 제국 전역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가 힘든 시설. 당연히 본인의 사용인들이 두카트와 연을 맺는 걸 염려한 하급 귀족들의 후폭풍은 예상했어야만 했다.
그들 입장에선 오래된 사용인들이 그만두고 두카트에 영영 취직할까 봐 염려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레티시아는 당장 드러난 성과에 취해 그 부작용은 안이하게 머리 한편으로 치워 버렸다.
아무리 하급 귀족이라고는 하나 귀족들과 평민의 싸움.
그 끝은 뻔히 보이는 바였다.
‘나야 이런 일을 당해도 싸다 쳐도…….’
레티시아는 의식해야 할 위험성에서 눈을 돌린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를 믿고 따랐던 두카트의 직원들과 보육원에 아이들을 맡긴 사람들은 대관절 무슨 죄로 직장과 보육 시설이 휘청거리는 불운을 겪어야만 한다는 말인가?
레티시아 자신이 아닌, 그들 모두를 위해서 두카트를 지켜야 했다.
“레티시아, 네가 이런 걸 싫어한다는 걸 알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어. 열 배, 백 배로 돌려주면 되는 문제야.”
레티시아는 일부러 시선을 돌려 버렸다. 왜 베스가 저렇게 긴 서두를 떼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테렌스 경에게 도움을 요청해.”
예상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분명 예상한 바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는 말인가.
레티시아는 뻣뻣하게 굳은 혀를 천천히 움직였다.
“경껜 이미 지나칠 정도로 신세를 졌어.”
“그럼 신세 조금 더 진다고 딱히 달라지는 건 없겠네.”
“베스!”
“지금이 자존심이나 챙길 때야?”
“…자존심 때문이 아니야. 단지, 이보다 더 신세를 졌다간…….”
“네가 테렌스 경과 결혼이라도 해 줘야 할까 봐?”
베스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순진해라, 레티시아 우즈. 네가 테렌스 경과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건 지나가는 개도 알겠어. 테렌스 경 본인도 그걸 알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 돕는다는 건 본인에게 무엇인가 이득이 된다는 뜻이야.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레티시아는 베스가 틀린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테렌스 경을 이용한다는 기분이 지워진 것 역시 아니었다.
“테렌스 경이 싫으면, 다른 사람도 있잖아.”
“누구?”
“…저기 사시는 분.”
베스는 감히 그 칭호조차 입에 담을 수 없다는 듯 말을 얼버무리며 어깨로 창문 너머를 슬쩍 가리켰다. 황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레티시아는 어이가 없어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설마.”
“그래, 그 설마. 그래도 너와의 연이 10년이고 나쁘게 끝난 것도 아니었잖아. 심지어 한 번 붙드셨는데, 네가 박차고 나온 거고. 그럼 이런 경우에 외면은 안 하지 않겠어?”
“…….”
레티시아는 굳이 지적해 주지 않았지만 베스는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레티시아가 황실을 떠나게 된 이유는 그녀 본인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기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그 반대면 반대였지.
하지만 미카엘이 그녀를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추측만큼은 레티시아도 제법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테렌스 경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보다야 낫긴 한데.’
레티시아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정말… 방법이 없을까?”
“없긴 왜 없어. 도움을 요청하라니까? 그게 뭐가 어렵다고.”
레티시아는 베스의 투덜거림을 무시하며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새로 정비한 사무실에는 두카트의 짧은 역사가 담겨 있었다.
문득, 레티시아의 눈길이 일전 테렌스 경이 선물로 가져온 청소용 솔에 닿았다. 이제 두카트 전용 솔의 모델이 된 솔이었기에 사무실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
“레티시아?”
레티시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솔을 응시만 하고 있자 베스가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찾았어.”
“뭐를?”
“해결책.”
레티시아는 솔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기간 동안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손잡이가 손에 착 감겨들었다.
테렌스 경에게 더 폐를 끼칠 필요도, 옛정에 기대를 걸고 미카엘에게 도움을 요청할 필요도 없다.
두카트는 오직 두카트만의 힘으로 회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