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50)

94화

‘원래는 이걸 팔아 보려는 생각도 했었지.’

하지만 두카트는 판매는 시도하지 않았다. 상업은 베스도, 레티시아도 발을 들여 본 적이 없는 분야였으며 두카트의 현재 서비스를 지속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금 고발장에서 볼 수 있듯 청소, 빨래, 보육과 같은 서비스들은 귀족의 입김이 강한 이 판에서 아무런 죄가 없어도 영업 정지 1년쯤은 우스웠고, 당연히 순식간에 사그라들 수도 있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상업이라면.

영업 정지를 당한다고 한들 다른 상단에 물건을 납품하는 방식으로라도 영업이 가능하다.

물건만 불티나게 팔리면 된다.

심지어 두카트를 이용하는 고객이라면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갖추고 있으니, 판매를 시작할 수 있는 초기 조건은 모두 갖춘 셈이었다.

‘대신, 불티나게 팔릴 물건이 필요해.’

만약 지금이 위기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레티시아는 좀 더 다양하게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상업은 큰돈이 소요되었기에 쉽게 뛰어들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두카트는 위험했고, 레티시아는 당장 불티나게 팔릴 만한 제품을 생각해야만 했다.

‘청소 도구는 아니야.’

장기적으로 보면 청소 도구는 큰 시장성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두카트의 경쟁 업체가 하나둘 생겨나고 있는 지금, 굳이 두카트를 차별화해 주는 청소 도구를 대량생산하여 그들이 두카트의 장점을 따라 할 수 있는 기회를 손에 쥐여 줄 필요는 없었다.

‘굳이 두카트의 정체성에 매달릴 필요는 없어.’

레티시아에게 필요한 건, 지금 당장 두카트를 견인시켜 줄 만큼 불티나게 팔릴 인기 상품이었다.

“뭐가 있을까.”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베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

“베스, 우리… 물건을 만들어서 팔자.”

“미쳤어?”

당장 베스의 입에선 크게 반대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레티시아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베스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된 게, 우리가 계속 사업을 확장해서잖아! 그런데 또 확장하자고? 그냥 테렌스 경에게 도움을 요청하자니까! 또 일을 벌였다가 망하면 그땐 빚이 너무 많아서 도움을 받는다 한들 파산을 막을 수도 없을 거야!”

“잠깐만, 베스. 내 말을 좀…….”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생각보다 거센 반대였기에 레티시아는 당황하고 말았다. 베스는 그녀의 미약한 제지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네 말을 듣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여태까지 다 네 말을 들었잖아. 이번엔 내 말 좀 들으면 안 돼? 잘난 레티시아 우즈 님껜 힘든 일이겠지만!”

베스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며 씩씩거렸다. 레티시아는 그녀가 말을 모두 쏟아 낼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방 안이 조용해진 다음에야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 베스. 일이 이렇게 된 것도… 다 내가 일을 벌여서가 맞고.”

이것만큼은 베스의 말이 맞았다. 레티시아는 별다른 고민 없이 쉽게 쉽게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고, 그 결과가 눈덩이처럼 굴러 눈사태를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미안하다고는 하지 않겠어. 그중 무엇 하나 떳떳하지 않은 일은 없었으니까.”

“…너답네. 그래, 나도 사과받기 위해 꺼낸 소리는 아니야. 그냥 네가 미친 짓을 그만둬 줬으면 할 뿐이지.”

레티시아는 베스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걸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베스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타입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레티시아 우즈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우습기까지 했다.

한번 결정한 건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강행하곤 했으니까.

미카엘의 말을 제외하면.

“어차피 이대로면 우리는 망해.”

레티시아는 베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베스, 내 생각 말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말고 다른 방법이 있다면 말해 봐.”

“도움을 요청하면 되잖아, 레티시아. 괜한 고집 좀 그만 부려.”

“이게 고집처럼 느껴져?”

“그래.”

“만약 내가 테렌스 경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쳐. 테렌스 경 역시 지금 자금이 없는 상태야. 그럼 가장 최선의 수는 던워디 백작가가 우리를 후원하는 모양새가 될 거고, 그렇다면 결국 운영권은 던워디 백작에게로 넘어가겠지.”

“……!”

그제야 베스는 레티시아가 왜 이렇게까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려고 하는지 이해한 듯했다.

“물론… 테렌스 경께 부탁할 일이 아니기도 해. 이미 나 하나만 보고 자선 사업에 돈을 투자해 주셨으니까. 하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었어. 나도 성인군자는 아니니까.”

“성인군자면 이런 일을 벌일 리가 없지.”

베스는 뾰로통하게 대답했지만, 다행히 화는 어느 정도 풀린 듯했다.

“그래서 대체 뭘 팔지를 생각 중이었다?”

“응.”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무모하게 일을 벌일 생각은 없어. 확실히 팔릴 만한 물건이 아니면 애초에 시작부터 하지 않을 생각이야.”

“잘 생각해야겠네, 그러면.”

베스는 한결 누그러진 얼굴이었지만 도와주려고 하지는 않았다.

“확실하게 말해 둘게. 나는 장사에는 반대야. 하지만 네가 장사를 시작한다면, 내가 말릴 수는 없지. 네가 두카트의 주인이니까.”

“네 것이기도 해, 베스.”

“내게 두카트는 어디까지나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일 뿐이야. 하지만 레티시아, 네게는 아니잖아.”

“…….”

레티시아는 베스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미카엘을 떠나온 지금, 두카트는 그녀에게 삶이었으니까.

“그럼 이렇게 중요한 건 네가 결정해야지. 그래야 나도, 너도 후회가 없을 거야.”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스의 말이 옳았다.

“그래도 조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그럼. 나도 직장이 하루아침에 파산하는 건 싫거든?”

다행히 제품의 컨셉은 쉽게 떠올랐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동시에 누구도 구현하기 어려운 것.

하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한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

바로 ‘편리함’이었다.

두카트가 표방한 가치이기도 한.

옷과 신발 등 타인에게 자신을 뽐내기 위한 물건들에 편안함을 적용시킬 수는 없었다.

물론 전생에 레티시아가 살던 세계에선 편안한 옷들이 매대의 자리가 모두 빌 정도로 열풍을 일으키며 팔려 나갔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 이 세상에선 모두가 괴작으로 여길 확률이 컸다. 두카트의 마지막 남은 재산을 가지고 그런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품질이 좋은 편리한 제품들을 만들어 낼 수도 없었다.

두카트는 그 정도의 자금력이 되지 않을뿐더러 그런 사치품을 살 정도의 고위 귀족들은 두카트의 고객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되지 않는다는 점에 더 가까웠다. 그들은 체면 때문이라도 두카트에 그 어떤 일도 맡기지 않았으니까.

따라서 레티시아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간단했다.

편리하면서도 신선한, 여태까지 시장에 없었던 제품을 만드는 것.

한참을 고민하던 레티시아의 머릿속에 마침내 반짝거리는 심상이 떠올랐다.

* * *

미카엘은 초조하게 방 안을 거닐었다. 이렇게 상황이 꼬여 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만약 알았더라면…….’

그는, 두카트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무너뜨렸을 것이다. 그게 레티시아에게 훨씬 더 안전한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예전의 그는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레티시아의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도 않았기에 이런 결과를 낳았다.

심지어 지금, 자신은 레테시아에게 전 직장 상사일 뿐이다.

여러모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레티시아…….’

미카엘은 신음을 쏟아 냈다.

보고에 따르면, 레티시아는 전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듯했다. 오히려 사업을 확장하고 무언가 새로운 장사를 시작하는 등 더욱더 과감한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문제는 아니었다. 두카트가 파산하면 레티시아는 상심하겠지만, 적어도 목숨에 지장이 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급 귀족들의 증오심이… 심각한 수준이군.’

하녀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보장해 주는 두카트가 생겨나면서, 기존에 배를 곯아 가며 일하던 하급 귀족들의 하녀들이 두카트로 대거 이탈했다.

그냥저냥 살 만한 가정들은 비용도 하녀를 전속으로 부리는 것보다 저렴하겠다, 두카트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자존심 높은 하급 귀족들은 달랐다.

전속 사용인 한 명 없이, 평민의 서비스를 이용한다?

사회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워낙 비용이 저렴했기 때문에 알음알음 두카트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하급 귀족은 꽤 생겨났지만 전속 하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사교계에서 천지 차이였다.

그래서 웬만한 하급 귀족들은 겨우 평민의 사업체에 밀려서 하녀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처우를 개선하거나 월급을 올려 주는 편을 택했다.

대다수의 하녀들은 신생 기업에 합류하는 것보단 차라리 원래 있던 직장에서 돈을 더 받는 편을 선호했기 때문에, 썩 균형이 잡힌 해결책이었다.

그렇게 상황이 안정이 되나 싶었는데, 레티시아가 비서를 사임한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두카트가 보육원을 시작한 것이다.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하녀들이 두카트에 몰려들었으며, 심지어 일반 영지민들도 두카트 보육원에 아이를 보내기 위해 생업을 내팽개치고 기웃거리는 수준이 되자 하급 귀족들은 물론 웬만큼 재산깨나 있는 상위 귀족들까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급 귀족들은 고발장을 보내는 정도에 그쳤지만, 그보다 작위가 높은 귀족들이 그런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효과도 보장할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할 리가 없다.

그 결과.

레티시아 우즈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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