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50)

95화

‘연필…….’

레티시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생의 기억들 속 자신이 누리고 살던 기술 대부분은 너무나 아득하고 찬란해 마법처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쉽게 구현할 수 있을 법한 물건들은 너무나 그리웠다. 가볍고 잘 씻을 수 있는 접시, 편하고 오물이 잘 빠지는 속옷, 튼튼한 빨래 건조대 등.

비록 구현을 시도하다가,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포기해 버렸지만.

그중 레티시아가 가장 그리워한 건, 일상적으로 쥐던 연필이었다.

물론 전생에서도 펜을 종종 썼지만 필기할 때 가장 유용하게 사용한 건 바로 연필이었다.

가볍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데다 지워지기도 잘 지워져서 일상적으로 사용하기엔 그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에 반해, 깃펜은 얼마나 불편한가.

‘하지만 만들려면… 흑연과 나무를 거래해야 하는 데다 제조할 공장도 필요해.’

무엇 하나 지금의 두카트에는 버거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자재를 모으고 도면을 제작한 다음 대량생산을 성공할 때까지의 기간을 생각하면 연필로 두카트를 살리겠다는 건 허황된 꿈이었다.

‘정말로 만들 수 없는 걸까.’

레티시아는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전생에서 사용하던 연필은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비슷한 거라도 괜찮지 않을까.’

꼭 흑연을 고집할 필요도, 나무를 고집할 필요도 없다. 지금의 펜보다 휴대성이 뛰어나면서도 싸고 접근성 좋은 필기구면 된다.

집 안 먼지 속에 굴러다니는 걸 집어도 바로 사용이 가능할 정도로 내구성까지 좋으면 금상첨화고.

‘물어보자. 이건 최대한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게 중요해.’

만약 레티시아가 귀족들을 겨냥한 물품을 구상했다면 조사에 상당히 애를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전 제국민이 사용할 수 있고 또 사용하기를 원하는 물건을 만들기를 원했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연령층의평민들이 모인 두카트는 가장 훌륭한 표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다음 날, 두카트의 회의실 안.

레티시아의 새로운 사업에 대한 길고 긴 설명이 마침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니, 생각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비판도 좋고, 대안도 좋으니 망설이지 말고 얘기해 주세요.”

말을 마친 레티시아는 조금 긴장하면서 회의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두카트의 직원 중 가장 성실하고 믿을 만한 자 2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제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평가할 것이다.

잠시간 침묵이 흐르더니, 말석에 앉은 젊은 직원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기구요? 그걸 어디다 쓰죠?”

“……?”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저는 글을 쓸 수 있지만, 제 동생들은 전혀 몰라요. 그리고 제가 쓸 수 있는 글도 제 이름과 부모님의 이름 정도고요. 그런데 필기구가 왜 필요하죠?”

“…….”

“값싼 필기구만큼 애매한 상품도 없다고 생각해요. 저희 같은 사람들은 쓰지 않고, 높으신 분들은 값비싼 필기구를 쓰겠죠. 이건… 잘못 잡으셨다고 생각해요.”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태까지 자신이 생각지 못한 지점들을 찍어 주는 말에, 속이 쓰렸지만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만약 레티시아 단독으로 결정해 거금을 들여 연필이나 연필의 대용품을 생산했더라면 두카트는 물론 직원들까지 나락에 빠질 수도 있었다.

“조, 좋은 생각 고마워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제점들이네요.”

여태까지 레티시아에게 독설을 쏘아 내던 직원은 잠깐 망설이며 대답했다.

“너무… 기분이 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여태까지 저희에게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 주셨는지도 알고, 사실… 두카트를 만드셨으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큰 은혜를 입은 거죠.”

“전혀 상하지 않았으니, 걱정 말아요.”

레티시아는 일단 그녀를 안심부터 시켰다.

“애초에 그런 얘기를 듣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든 거니까. 그럼 필기구는 제외해야겠네요. 다른 생각 있는 분?”

다행히 회의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레티시아는 곧 전생의 기억들이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생의 그녀는 레티시아와 사는 세계 자체가 달랐고 그 세계의 물건들은 그 세계의 자재가 있어야 쉽게 생산할 수 있었다.

아무리 길거리에 웃자란 잡초로 옷을 만들어 보려고 해 봤자 허사로 돌아갈 뿐이다.

“옷 장사가 최고입니다.”

“무슨 소리, 먹는장사가 최고라고요!”

“차라리 이 기회에 무역에 도전하는 건 어떻습니까?”

회의는 점점 열기를 띠어 갔다. 레티시아의 연필만큼이나 허무맹랑한 생각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개중 쓸 만한 아이디어가 없지는 않았다.

그때, 레티시아의 시선을 한 직원이 사로잡았다.

“저희만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건 어떨까요?”

“어떻게?”

“저희는 집집마다 방문하니까요. 그 점을 살려서… 물류를 전달하는 겁니다. 큰 거 말고, 작은 물품이요. 우유라거나 과일이라거나…….”

“안 돼요.”

다들 좋은 생각이라며 술렁거리던 찰나, 레티시아가 딱 잘라 말했다. 반대하는 게 아까울 정도로 좋은 생각이었지만, 지금 같은 긴급 상황에선 괜한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됐다.

“좋은 생각이지만, 지금 저희는 상업으로 돌파구를 찾아야 해요. 인력 지원만 더 늘었다간 반발만 더 심해질 테니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직원이 반박했다.

“소규모 물류 전달은 그 누구의 영역도 침범하지 않아요. 사원을 위한 복지도 아니니, 유인책이 되지도 않죠.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요?”

레티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듣고 보니 그랬다. 두카트의 장점은 인력. 어차피 상품을 생산하여 판매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차라리 그 누구의 반발도 받지 않을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다면?

레티시아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좋은 생각이군요. 이름이… 카렌 센트리, 맞죠?”

레티시아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놀란 카렌은 숨을 들이켰다.

“네.”

“앞으로, 잘해 봐요.”

레티시아는 카렌의 손을 힘주어 잡고 악수했다. 이제 두카트의 운명은 여태까지 말 한마디 섞어 본 적 없는 이 낯선 동료에게 달렸다.

하지만 이것 또한 운명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예상대로 두카트의 보육업 자체는 영업 정지를 받고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스러졌지만, 새로운 물류 산업은 승승장구했다.

레티시아는 카렌의 아이디어가 전생의 기억 중 배달, 혹은 택배와 굉장히 비슷하다는 점을 깨달았지만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두카트의 물류업은 반드시 청소나 빨래 서비스를 사용하고 있을 때에만 함께 사용할 수 있었다. 물류업에만 인력이 낭비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두카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고, 자선 사업의 실패에서 촉발된 문제점들은 모두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어딘가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보육원을 접은 건 오히려 두카트의 복지가 얼마나 좋은지 사방에 광고한 모양새가 되어, 이제는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에 사는 하녀들이 두카트에 입사하겠다고 상경하는 수준이 되었다.

떠났던 투자자들도 돌아와 이제 레티시아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상품 제작을 시작할 수 있었다.

레티시아의 불안은 바로 그 점에 기인했다. 모든 일이 너무나 잘 풀리고 있었다. 모두가 마음을 푹 놓은 이 순간, 누군가 배신이라도 한다면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 것이다.

‘설마 카렌이……. 설마.’

레티시아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제 자신은 미카엘에게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런데 자신을 노릴 사람이 있을 리가.

‘나도 너무 물들었군.’

레티시아는 황실 생활 탓에 의심만 많아졌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고는 새로 들어온 직원들의 급여를 계산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두카트 정도의 규모면 회계 담당이 있어야 마땅했지만, 레티시아는 자신이 하기를 고집했다. 남에게 맡기면 돈이 어떻게 새어 나갈지 모른다고 주장하면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티시아의 진짜 의도는 말의 본디 의미와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직접 회계를 보면서 자신 모르게 곳곳에서 새어 나가는 돈을 잡아낼 수 있었다.

‘이렇게 작은 규모에서도 비리가 나오는데…….’

국가라는 거대한 단위에선 어디서부터 썩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던 게 당연했으리라.

‘여기서라도 잘해야지.’

레티시아는 빠르게 숫자들을 훑어 내렸다. 다행히 그녀가 회계를 본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그간 몇몇 베테랑들이 어쩌다 쥐도 새도 없이 해고되었는지 모두가 눈치채기라도 한 듯 비리는 거의 근절되었다.

‘다행이야.’

마침내 일을 마친 레티시아는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한동안 제집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집 역시 이제는 고향처럼 느껴졌다. 레티시아는 집 곳곳에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을 쌓아 두기까지 했다.

황실에선 언제 어디서 암살자들이 튀어나올지 몰랐으므로 항상 방을 텅 빈 상태로 유지했기 때문에, 집을 어지럽히는 건 레티시아의 새로운 즐거움 중 하나였다.

‘역시, 나오기 잘했어.’

미카엘에게 섭섭한 마음도 잠시, 그가 그녀를 위해 황실에서 벗어나게끔 도와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레티시아는 지금의 삶에 만족했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 현관문을 열었다.

바로 그 순간.

정말로 오랜만에 불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몸이 뻣뻣하게 굳어 왔다.

그때였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 건.

“레티시아 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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