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레티시아 우즈는 기억력이 좋았다. 단 두어 번 만난 게 전부였던 이 남자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레토 바틀렛.
분명, 황궁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던 남자가 그녀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피가 얼어붙었다.
위기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레토 바틀렛은 마치 그가 실종되었던 몇 달간 혼자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낸 것처럼 머리가 허옇게 세고 핏기 없는 얼굴엔 주름이 져 있었다.
하지만 눈.
본디도 인상적이었던 그 눈만큼은 도리어 사라지기 이전보다 증오심으로 더 형형히 빛났다.
레티시아는 멍하니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이야말로 나이를 가늠하는 척도였으니.
‘…….’
검버섯이 피어 있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레티시아는 덜덜 떨며 레토를 바라보았다. 레토의 존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기에 더욱더 두려움이 증폭되었다. 그는 레티시아의 반응이 흡족한 듯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로군.”
레티시아는 대답 대신 재빨리 품속에서 브로치를 꺼냈다. 궁을 떠날 때, 레티시아는 비서로서 받고 향유했던 물건을 모두 내려놓고 왔지만 브로치만큼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미카엘은 그 브로치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레티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것을 일종의 기념품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지난 10년간의 세월에 대한 기념품.
비록 브로치는 어릴 적처럼 신비롭고 위안이 되는 물건으로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지만, 추억은 추억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법이었으니.
하지만 지금, 브로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레티시아에게 큰 희망이 되어 주었다.
레티시아는 당장이라도 브로치를 작동시킬 준비를 하며 움켜쥐다가, 번쩍이는 브로치를 확인하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여는 레토 바틀렛을 보고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깟 케케묵은 마법사들의 장난감으로 시간을 끌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이 케케묵은 장난감을 빼앗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도 있지 않았던가요.”
레티시아는 최대한 부드럽고, 차분하게 대답하려고 애썼다. 자신의 목적은 시간을 끌어 이자에게서 어떻게든 도망치는 데 있었다.
자극하는 게 아니라.
이 브로치에 얼마나 많은 힘이 들어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비록 미카엘이 직접 손을 화롯불에 넣어 가며 힘을 실어 주었지만, 번개보다는 약할 것이 아닌가.
대체 어떻게 돌아왔는지, 여태까지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지, 달라져 버린 그 모습은 뭔지, 왜 하필이면 자신을 찾아왔는지…….
머릿속에 수십 가지 의문이 떠올랐지만 지금 당장 레티시아에게 중요한 건 오직 이 남자에게서 달아나는 방법뿐이었다.
“그걸 쓸 필요는 없다. 나는 너를 해치려 온 게 아니니.”
“…그럼, 뭐죠?”
“동업자 요청.”
레티시아는 말을 내뱉는 동시에 뒷걸음질 쳤다. 이 남자가 실제로 원하는 게 그 무엇이든,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 한 가지는 명백했다.
만약 레티시아가 아직도 미카엘의 비서였다면 단칼에 거절하는 대신 레토 바틀렛이 대관절 무슨 꿍꿍이인지 자신을 미끼로 걸어 서라도 알아내려고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레티시아는 미카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미카엘에게 정말로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자신은 책임지고 있는 두카트를 더욱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했다.
달아날 기회만을 엿보던 레티시아를 끌끌 비웃던 레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하던… 그 무엇이었냐. 그래, 이동 교실. 복수하고 싶지 않나?”
레토는 이동 교실 자체에 대해선 한 톨의 관심도 없다는 투였다. 레티시아는 곧바로 그의 의도를 읽어 냈으나,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폐하를 배신하라고요? 제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았나요?”
레티시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
레토가 고개를 저었다.
“범인은 황제가 아니다.”
“……?”
“페르 공작이지.”
“……!”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그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페르 공작이 자신과 테렌스 경의 자선 사업을 수포로 만들면서 얻을 이익이 만약 실패하거나 들통날 경우 잃을 손해보다 턱없이 적어 진작 폐기한 가설이었다.
“그다지 얻은 것도 없었잖아요.”
“없기는.”
레토가 말라비틀어진 나무 지팡이 같은 팔을 레티시아를 향해 뻗더니, 검지를 까닥거렸다.
“너.”
“……?”
“네가 황실에서 나갔지.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레티시아는 레토의 말을 딱 잘라 끊었다. 이제 그의 목적이 자신을 해치는 게 아니라,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회유임을 알았으니 깍듯이 대우할 필요가 없었다.
“정녕 모르겠다는 건가?”
“…폐하께선 새로운 통역을 뽑으셨고, 국정은 제가 나가기 전과 전혀 다름없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 짧은 혀로 뭐라고 나불거리든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요.”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레토가 삿된 수작을 들켜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흔들고는 한숨을 토해 냈다.
그 일련의 움직임 끝에 나온 말은 레티시아를 소스라치게 하고도 남는 내용이었다.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말을 할 줄 알아. 아주 멀쩡하더군. 어이가 없을 정도로…….”
“……!”
레티시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경우를 준비해 왔다. 비록 레토 바틀렛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지만, 호르헤 경과 달리 전혀 미카엘의 편이 아닌 사람에게서 그가 실은 말을 할 줄 아는 게 아니냐는 추궁을 받을 때를 얼마나 대비했던가.
“거짓말하지 말아요. 폐하께선 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세요. 그건, 제가 가장 잘 알아요.”
“연기하기는.”
레토는 벽에 기대섰다.
그는 레티시아나 레티시아의 집을 보고 있지 않았다.
도리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 한 자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 영원히 통로를 지키는 망령이 되라고……. 그리고 나를 저 깊숙한 곳에 봉인했지. 거의 성공할 뻔했다. 그것이 나를 돕지 않았더라면, 다시는 햇살을 볼 수도 없었겠지.”
레티시아는 그의 말을 반쯤 흘려들었다. 지금 중요한 건 미카엘이 그에게 어떤 연유로든 비밀을 발설했으며, 레토가 이제 누구에게든 그 사실을 퍼뜨릴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원하는 게 뭐죠?”
“내가 페르 공작의 자리를 차지할 수만 있게 해 주면 그걸로 족해.”
“……?”
레티시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한때의 동맹을 치겠다는 레토의 발상은 참 그다웠지만, 그의 계획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페르 공작이 거꾸러진다 해도 그의 후계자는 결코 레토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페르 공작가의 핏줄이 아니잖아요.”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게 바로 황제지.”
“…그럼 왜, 나를 찾아온…….”
“황제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너니까.”
“…….”
“잘 들어라. 나는 이제 아무 힘이 없다. 이 몸으로는 얼마 살지 못하니 황위를 노려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뿐이다. 페르 공작을 내치고, 그 자리에 내가 앉는 것.”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착각을 하는 자는 레토가 처음이 아니었으며 아마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미카엘이 그녀에게 특별하듯, 그녀 역시 미카엘에게 특별한 건 사실이리라.
그 증거로 미카엘은 그녀를 위해 잠시나마 그가 그렇게까지 원하던 황위를 코앞에 두고 떠나가지 않았던가.
그가 변심했다고 한들 힘든 결정을 레티시아의 한마디에 실행으로 옮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사람들이 으레 그녀를 과대평가하듯 자신이 비선 실세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미카엘은 결정적인 순간엔 항상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그 반대에 가까웠다.
오히려 레티시아가 항상 그녀를 붙잡는 미카엘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 남지 않았던가.
‘그리고 떠나라는 말도… 바로 받아들였고.’
입맛이 썼다.
결국 자신이 황궁에 머무는 것도, 떠나는 것도 모두 미카엘의 뜻대로 흘러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미카엘의 뜻대로 하는 게 바로 레티시아가 원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가장 속이 쓰렸다.
이거야 원, 아주 옛날 옛적 그녀를 천대하던 가족들에게서 도망치기 전 모습과 그다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사실을 충분히 잘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뜻을 따르게 되리라.
‘…그만 생각하자.’
레티시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옛날 생각이나 하는 건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틀렸어요.”
“틀렸다고?”
레토는 어딘가 즐거운 투였다.
“부정하고 싶은 거겠지. 그런 자리를 차고 나왔다는 걸…….”
“그것 역시, 틀렸어요.”
레티시아는 조용히 사실을 알려 주었다.
“제가 나온 게 아니에요. 폐하께서… 저를 해고하셨어요.”
“…뭐라고?”
레토는 처음으로 얼빠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얼굴이 어딘가 지금 그가 취하고 있는 노인의 모양새에 어울리지 않아, 기묘한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레티시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사실을 소리 내어 말할 날이 오리라곤 그간 생각하지 못했다.
그 상대가 레토 바틀렛이라는 건 더더욱.
“항상 저였어요. 항상, 떠나지 않으려고 폐하께 매달리는 건 저였다고요. 그 반대가 아니라…….”
레티시아는 때아닌 고백을 하느라 뒤에서 다가오는 인기척도, 상대를 발견하고 공격을 위해 몸을 움직이는 레토도 눈치채지 못했다.
칼과 칼이 허공에서 부딪칠 때까지.
“레티시아.”
익숙한 음성이 레티시아를 사로잡았다. 평생 잊지 못할 목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