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레티시아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한 말도 잊은 채 몸을 당장 돌려 미카엘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가 어떻게,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미카엘이 지금, 그녀의 옆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미카엘은 차갑게 레토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레토는 그의 시선이 못내 버거운 듯 먼저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백마 탄 왕자님의 등장이로군. 아니, 황제라고 해야 하나.”
“…….”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흘낏 바라보았다. 그는 급하게 달려온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나 그 와중에도 칼을 쥔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폐하.”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부름에 미동 하나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레토에게서 잠시도 눈길을 떼지 않으며 경고했다.
“마지막 기회다. 칼을 내려놓고 두 손을 들어 올려라.”
놀랍게도, 레토는 순순히 미카엘의 지시에 따랐다. 레티시아는 조금 씁쓸해졌다. 자신은 그렇게나 무시하던 레토가 미카엘의 말엔 거역하려는 낌새 하나 내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레토와 같은 자들은 오직 힘에 의해서만 움직였고, 레티시아는 레토를 움직일 힘이라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생각했다.
그 힘은 차라리 가지고 있지 않은 게 더 나은 것 같다고.
그만한 힘은 평범한 인간에게는 버거워서, 처음에는 맨발로 충분히 건널 수 있는 야트막한 냇물처럼 보일지 몰라도 어느새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당장 눈앞에 레토 바틀렛이라는 좋은 본보기가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은가. 그 대가로 순식간에 젊음을 바쳐 버린…….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상황을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레토요, 난입한 것은 미카엘이었으니 자신이 할 일은 최대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는 바로 미카엘의 곁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미카엘을 향해 다가갔다.
레티시아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미카엘의 몸은 미세하게 진동했는데, 레티시아는 그 이유가 자신의 존재가 끼치는 부담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다.
어영부영 대응하다가 인질로라도 잡히게 되면 곤란해지는 건 미카엘이 아니겠는가. 물론 미카엘이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기에 다소 꺼림칙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레티시아의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카엘의 몸이 일순간 팽팽히 긴장하더니, 레토 바틀렛을 향해 도약했다.
‘……!’
그 찰나의 순간, 레티시아의 머릿속에 온갖 감정과 생각들이 뒤섞여 용암처럼 분출하고 말았다.
레토 바틀렛은 아직 그들을 공격하려는 모습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카엘의 공격이 그의 목숨을 단칼에 끊을 만한 기습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한 번 칼을 맞대었으니까.
미카엘의 실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레토가 그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
만약, 미카엘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역시.”
하지만 레티시아의 그 모든 걱정들이 무색하게도 귀에 들린 건 레토의 바람 빠지는 듯한 비명 소리와 미카엘의 씁쓸한 한마디였다.
레티시아는 조심스럽게 미카엘을 향해 다가갔다.
“……!”
금안이 커졌다.
분명 레토 바틀렛이 쓰러져 있어야 할 자리에는 오직 한 줌의 돌 부스러기뿐이었다.
‘…돌이 아니야.’
레티시아는 입술을 핥았다. 돌 부스러기라기엔 너무 잘고, 색깔이 이질적인……. 마치 손톱으로 돌을 수없이 긁어서 모은 돌가루처럼 보였다.
“진짜 레토 바틀렛은 그 아래… 그대로 있을 거다. 절대 빠져나올 수 없게 해 놓았으니.”
“…….”
“하지만 무언가 방법을 찾아내었다는 뜻이겠군. 내 실수다. 완전히 목숨을 끊어 놓았어야 했거늘……. 그러질 못했어.”
“이젠 방법이 없나요?”
“…무슨 짓을 해도 죽지는 않을 거다. 이런 일이 없도록 좀 더 철저히 대비하는 수밖에.”
“저런… 모습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요?”
“네 몸을 빼앗으려고 한 거야.”
“……!”
미카엘은 이를 꽉 악물며 대답했다. 마디마디에서 고통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무슨 말로 너를 꼬드기려고 했든… 결국엔 네 몸을 빼앗으려는 수작에 불과했을 게다. 저 몸은… 쉽게 무너져 내리는 그릇에 불과하니까.”
레티시아는 비틀거렸다.
레토 바틀렛이 인간 아닌 무언가가 되었다는 사실과, 그를 그런 존재로 만든 게 바로 미카엘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꽉 옥죄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탓하지 않았다.
대신, 이 모든 상황을 관통하는 질문을 불쑥 내뱉었다.
“왜 하필 저였을까요?”
“…레티시아.”
레티시아는 대답을 듣고자 하지 않았다.
“폐하께선… 저를 내쫓으셨잖아요. 그런데 왜 다들 제가 아직도 폐하의 사람인 것처럼 행동할까요? 제가, 절대 폐하를 떠날 리가 없다는 것처럼…….”
하지만 레티시아는 이미 마음 깊숙한 곳에서 깨닫고 있었다.
그게 진실이기 때문에.
레토 바틀렛은 결코 아둔하지 않았다. 아둔하고 능력이 부족한 자는 미카엘의 함정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할 테니까.
그는 어둠 속에서 간신히 찾아낸 유일한 희망을 레티시아에게 걸었다. 미카엘에게 들키리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 사실은, 얼마 전까지 그녀 자신조차 깨닫지 못했고 깨달은 뒤에도 남에게 극구 부정해 왔던 사실을 레토 바틀렛이 눈치챘다는 걸 의미했다.
굳이 그녀의 입 밖으로 내뱉지 않더라도.
결국 레티시아는 의미 없는 읊조림을 멈추었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여태까지 자신이 의미 없는 몸부림을 쳐 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탓은 아니었다.
조금 전, 그녀가 레토 바틀렛에게 내뱉은 말들을 미카엘이 들었으리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레티시아는 언제부터 있었냐고, 어디부터 들었냐고 묻지 않았다. 미카엘에게 그녀 자신이 내뱉은 말들을 절대 상기시켜 주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미카엘은 레토 바틀렛과 그녀 사이의 대화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의 질문에조차 대답하지 않으며 말을 부드럽게 돌렸다.
“…여기는 이미 노출이 많이 된 듯하군. 당분간 다른 숙소를 찾아라.”
미카엘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원한다면 사람을 보내 주겠다. 사설 용병들은 인간이 아닌 자에게 익숙지 않으니.”
레티시아는 자신에게 사람을 붙이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레토 바틀렛의 침입에 대해 알았는지 묻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미카엘을 의심하여 그 대가를 치르게 되었으며 심지어 레토 바틀렛의 입에서 그녀의 의심이 애당초 부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의심해 보았자… 결국은 후회하게 되겠지. 지금처럼.’
레티시아는 간단하게 감사를 표하고는 입을 닫았다.
“감사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해야 할 말을 몰랐기 때문이었고, 미카엘은…….
그녀는 미카엘의 생각을 읽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자격을 잃어버렸기에.
그래서 레티시아는 마침내 미카엘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이 그녀의 예상과 완전히 달랐을 때 놀라지 않았다. 놀람은 일어난 일이 예상과 다를 때 찾아오는 법이니까.
“레토 바틀렛 때문에 여기로 온 게 아니다.”
“네?”
“여긴 위험하다, 레티시아. 레토 바틀렛 때문이 아니야.”
“그럼…….”
“네 적이 너무 많다.”
입 안이 바짝 말라 갔다.
“제 적이라니요?”
레티시아는 입술만 겨우 달싹거려 속삭이는 듯한 소리를 냈다.
“사업… 관련인가요? 하지만 그자들은…….”
“생각보다 반발이 커.”
미카엘은 신중하게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고 있었다. 느껴지는 마음씀씀이에 말문이 턱턱 막혀 왔다.
“내게도 감정이 좋을 리가 없는 자들이다. 한두 명이라면 별로 문제 될 게 없지만, 수십 명은 족히 되니…….”
“제 잘못이네요.”
레티시아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자신은 귀족들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미카엘의 곁에서 10년 동안 일하지 않았는가.
고위 귀족은 물론 하급 귀족들과도 많이 부딪쳤다. 그자들이 뭘 기꺼워하고 싫어하는지는 충분히 깨우쳤다.
‘아.’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은 그들의 선호와 불호를 알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미카엘은 이 제국의 황태자요, 레티시아는 황제의 비서였으니까.
어차피 본인 잇속을 챙기려는 생각밖에 없는 자들을 열심히 회유하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작위를 빼앗고 새로운 사람을 앉히는 게 더욱 효과적이었다.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의 제국은 그렇게 고치를 하나씩 벗어 가며 기나긴 어둠을 탈피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평민 사업가 레티시아 우즈는 달랐다. 좋든 싫든, 그녀는 이제 귀족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으며 새로운 사업을 확장할 때 그들의 반발과 그 해결책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럼 뭐가 중요한 거죠?”
“네 목숨.”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자신을 내친 건 미카엘이었음에도 과보호하는 성향은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두카트를 망가뜨린다는 선택지가 있는데, 굳이 저를 죽이려고 할까요?”
“…잘 나가는 사업을 거꾸러뜨리는 것보다, 무방비한 사람을 죽이는 게 훨씬 쉬운 법이지.”
“…….”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폐하께서 오늘 레토 바틀렛과 만나게 된 건 우연이었군요.”
“그래.”
미카엘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레티시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레티시아, 귀족들이야 사람으로 막을 수 있다지만 레토 바틀렛은 또 틈을 노릴 거다.”
레티시아는 조심하겠다고 말하려다, 그대로 입을 닫았다. 대체 지금의 레토 바틀렛과 같은 존재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싫지만 않다면, 그가 처리될 때까지만이라도 내 곁에 머물 순 없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