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50)

98화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미카엘은 말 한마디로 레티시아가 서 있는 이 평범하디평범한 공간을 순식간에 탈출구 없는 미로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이 있었다. 레티시아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뗐다.

“제가… 무슨 자격으로 폐하의 곁에 머물죠? 이미 비서는…….”

“내 곁에 머물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쿵.

다시금 큰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레티시아는 이내 그 소리가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아닌, 크게 뜀박질하는 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 들으셨군요.”

“입은 막혔을지 몰라도, 귀가 먹었던 시절은 없으니까.”

괜히 실없는 소리를 해 보던 미카엘은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레티시아와 얼굴을 마주했다.

“레티시아.”

심장이 미친 듯이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그 원인이 여태까지 그녀 자신에게마저 숨겨 오고 부정하던 진실을 미카엘에서 들켜서인지, 아니면 자신조차 감히 추측할 수 없는 다른 이유에서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미카엘의 말에 집중하고 또 집중할 뿐이었다.

“아까, 나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고 한 게…….”

미카엘은 말을 차마 잇지 못했지만 둘 모두 그에 담긴 완전한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집요한, 동시에 희망이 더러 담겨 있는 시선으로부터 도망치듯 고개를 돌렸다.

“네, 맞아요.”

그녀는 뻐근한 목에서 겨우 대답을 쥐어짰다. 그간 레티시아는 말 그 자체엔 늘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게 무슨 꼴인가. 구멍이 송송 난 바구니로 물을 길으려는 자처럼 제대로 된 단어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꼴이라니.

레티시아는 아주 천천히 진실을 골라냈다.

“저는 항상… 항상 폐하의 곁에 있고 싶었어요.”

“레티시아.”

“그걸 얼마 전에야 겨우 알았어요. 얼마 전에야……. 그랬더니 폐하께선 저를 내치시더군요.”

“그러고 싶지 않았어.”

“……!”

다리에 힘이 풀렸다.

레티시아는 눈을 크게 뜬 채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미카엘의 얼굴엔 홍조가 떠올라 있었고 오른손은 레티시아를 향해 미세하게 움직이다 곧 뒤로 물러나곤 했다.

“그냥… 그게 네 뜻이라고 생각했어. 널 배려하는……. 너는 항상 궁을 떠나고 싶어 했으니까.”

“예전에는 그랬어요.”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분명 그녀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황궁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추한 발버둥을 다 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이제야 그때의 자신이 어떤 감정으로 움직였는지 깨달았다.

황궁에 진절머리가 나서도, 사업에 진심으로 전념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무서웠으니까.

이대로 황실에서, 미카엘의 비서로 살며 오직 그밖에 모르는 삶을 살게 될 자신이…….

하지만 옛 사람들이 말하듯, 잃은 게 있다면 얻은 것 역시 있는 셈이다. 당시의 레티시아는 대관절 자신이 무엇을 얻고 있는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았다.

미카엘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예전이라면, 지금은?”

이번엔 레티시아는 답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불경스럽게도 미카엘의 오른손 끝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마치 기사가 서임식을 하기 직전 주군의 옷을 잡는 모양새였지만 레티시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설령 누군가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해도 레티시아는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지금, 미카엘이 개의치 않고 말없이 레티시아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지금은… 들으신 대로예요. 폐하의 곁에 있고 싶다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는데, 그 직후 폐하께선 저를 밖으로 내쫓으시더군요.”

“레티시아, 그건 정말…….”

미카엘이 말꼬리를 흐렸다.

레티시아는 자조하듯 웃어 보였다. 다시금 입 밖으로 내자니 정말 민망했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말했어야 할 일이었다.

더군다나 같은 사실을 레토에게 고백하다 미카엘에게 들키지 않았는가. 지금 와서 단순히 부끄러움 같은 문제로 해야 할 말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이건 기회였다. 미카엘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된 기회.

그녀는 이 기회를 허투루 흘려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저는 폐하를 싫어하지 않아요.”

“…….”

“어쩌다 그렇게 생각하시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싫어하지 않아요. 설마 그게, 절 비서직에서 내쫓은 이유였나요? 제가 폐하를 싫어한다고 생각해서?”

레티시아의 말은 점점 더 과감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알아야만 했으니까. 미카엘의 진심이 뭔지, 그의 입으로.

미카엘이 천천히 레티시아의 손을 그의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당연히 레티시아의 몸이 기울어져 미카엘의 숨소리가 들릴락 말락 할 거리에 당도했다.

“그래. 네가 원한다고 생각했어. 항상 날 떠나기를 원했으니까.”

“전, 폐하를 떠나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레티시아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저는… 황실을 떠나고 싶었어요.”

“…….”

“하지만 폐하를 떠날 수는 없었어요.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시잖아요.”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청록빛 바다가, 그녀의 모습을 담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미카엘은 혼란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며 중얼거렸다.

“항상 나 때문이었잖나. 내가… 널 계속 붙잡으려고 해서.”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레티시아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절 해고하시기 전까지는.”

“……!”

레티시아는 이 말들이 자신의 미래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카엘이 진실을 알고, 그녀 역시 자신의 입을 통해 이 사실을 다시금 알린 이상 둘은 결코 예전의 겉으로나마 사무적인 관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레티시아가 어디 황족의 핏줄이라도 되는 것도 아니니, 그녀가 미카엘의 진짜 가족이 될 리도 없으리라.

하지만 레티시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단순한 손익 계산만으로 진실을 숨기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먼 길을 지나왔다.

“그때서야 저는 깨달았어요. 폐하를 떠나지 않으려 한 건 항상 제 쪽이었다는 걸…….”

“레티시아.”

미카엘의 몸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레티시아는 지금 속에서 울리는 소리가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 그의 심장 소리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 폐하가 싫지 않냐고 물으셨죠?”

“…….”

“싫지 않아요. 한 번도, 싫어한 적이 없었어요.”

아주 찰나의 침묵이 흐른 후.

미카엘은 천천히 그녀의 팔목을 놓아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레티시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미카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어떤 대답이 나오든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자신과 미카엘은 지금 완전히 뒤틀리고 부서져 버린 상태로 얼어붙어 버릴 뻔한 관계를, 서서히 녹여 내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널 배신했다.”

“네.”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미카엘 역시 조금 전 뒤로 얼마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또다시 미카엘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법한 위치에 도달했다.

“폐하께선 저를 배신하셨죠.”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말을 되풀이했다. 만약 반년만 더 전이었다면 목이 메어 감히 저 음절들을 입 밖으로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일을 스스로 그만두기도 하였으며, 복직도 했고, 해고까지 당했다. 그 결과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없는 삶을 살아 보았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이제 담담하게 과거를 얘기할 수 있었다. 그동안 그녀가 가슴 깊이 묻어 두기만 했던 이야기들을…….

“저는 여태껏, 전하께서 왜 돌아오셨는지 몰라요.”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옛 호칭으로 불렀고, 미카엘 역시 그녀의 말을 정정해 주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저는 황궁에 있었죠. 분명 불치병이었을 병은 깨끗이 나아 있었고.”

“…….”

“그동안 저는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했고, 이제 저는… 어떠한 직위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진실을 안다 한들 제 위치에 해가 가지 않아요.”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단순히 그러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에게 그날, 돌아온 이유를 숨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때 그녀는 미카엘이 단순한 죄책감 때문에 언급을 꺼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레티시아는 알았다. 진실을 알게 된다는 건 거짓으로 쌓아 올린 탑의 축을 하나씩 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탑은 무너진다.

번역기로서의 레티시아 우즈가 그랬던 것처럼.

‘아마, 내가 알게 된다면… 더는 내 자리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문제였겠지.’

레티시아는 차분하게 쐐기를 박았다.

“그날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폐하. 제 유일한… 소원입니다.”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머리께까지 손을 들어 올렸다가, 그녀의 옷깃 하나 스치지 않은 채 다시 아래로 늘어뜨렸다.

마침내 열린 미카엘의 입에서 고통과 고뇌가 엿보이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

“폐하, 전 이미 폐하를 원망하지 않아요.”

그 모든 원망들은 미카엘과 레티시아가 함께, 그리고 마침내 떨어져 겪은 사건들에 뒤섞여 서서히 녹아내려 한때 그 자리에 있었다는 흔적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동안 레티시아는 그 흔적들이 아직 생생히 살아 숨 쉬는 감정이라고 착각해 왔다.

‘이젠,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어.’

레티시아의 말을 들은 미카엘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다오.”

“약속할게요.”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은 미카엘뿐이었다.

애초에 원망 자체도 상대가 미카엘이었기 때문에 이토록 오래 지속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알았다.”

레티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들 사이의 깊은 응어리를 풀어낼 기회가, 마침내 그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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