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50)

99화

“…나는 처음부터 황위를 노릴 생각은 없었다. 수도로부터 적당히 떨어진 후작 위가 목표였지.”

“…….”

“그래서 네 손을 망설임 없이 잡을 수 있었다. 버려야 할 게 딱히 많지 않았으니까. 그것들에 미련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고.”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널 일부러 속여서 따라나선 게 아니야, 레티시아.”

“알아요.”

레티시아는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단지, 그녀는 미카엘이 중간에 변심하거나 본디의 욕망을 이기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꽤나 오랫동안.

얼마나 멍청했는가.

미카엘은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의 설명은 길지도 자세하지도 않았지만, 레티시아가 알아야 하는 사실들은 모두 담겨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진작 알았어야 하는 사실들이.

레티시아는 의문이 가는 사항이 있어도 질문하지 않았다. 아니, 질문할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진실의 홍수가 레티시아를 잠식하여 놓아주지 않았으니까.

미카엘은 정말로 자신의 신분과 권력을 버리고 레티시아와 함께 국경을 넘을 생각이었다.

그가 제국에 돌아와 그간 관심도 없었던 황위에 오른 이유는 오직 성소를 불태워 레티시아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레티시아는 무너지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몇 번이고 노력해야 했다.

마침내, 미카엘이 눈을 내리깔며 설명을 끝마쳤다.

“그렇게 된 거다. 네가 만족할 만한 설명이었는지 모르겠군.”

침묵이 흘렀다.

레티시아도, 미카엘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 뿐.

레티시아는 혼란한 와중에도 미카엘이 어딘가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 순간, 입에서 막을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폐하, 저는…….”

하지만 너무나 많은 뜻을 담고 있는 레티시아의 말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덩어리에 가로막혀 이어지지 못했다.

“왜…….”

그녀는 비틀거리며 차가운 벽면에 몸을 기대었다.

업자가 시공을 실수한 탓에 툭 튀어나온 벽면의 고리가 등을 크게 긁어 통증이 느껴졌다.

레티시아는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분노를 고통으로라도 누그러뜨리고 싶기도 했다.

“왜, 여태까지…….”

레티시아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왜 여태껏 말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미카엘은 그녀를 자책으로부터 지켜 주려고 한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울지 마라.”

“어떻게, 안 울 수가 있어요?”

레티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웬만하면 미카엘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지금만큼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저는… 저는, 그동안.”

“안다.”

미카엘이 덤덤히 얘기했다.

“나를 의심하고, 원망했겠지.”

“…….”

“하지만 그게, 너 자신을 원망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안 하니만 못 한 배려였다.

만약 진작 진실을 알았더라면,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하고 추궁하여 알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었으리라.

함께.

눈물이 손등에 떨어질 때마다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미카엘은 그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운명으로부터 도망쳐 진정 원하는 인생을 살 기회가 있었다.

도망치지 않았던 건, 오직 레티시아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물론 미카엘이 전생이나 소설, 운명에 대해 알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그 탈주가 지긋지긋한 정쟁과의 연을 완전히 끊어 버릴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카엘은 황실로 돌아와, 황제를 그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겨우 보잘것없는 번역기 하나를 살리기 위하여…….

“레티시아.”

레티시아는 숨을 멈추었다. 미카엘이 그녀를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모든 결정을 내린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나는 네가… 행복해지기를 원했다. 네가 원하는 일을 하기를 원했어. 하지만 그럼에도… 널 내 곁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레티시아는 도저히 미카엘의 얼굴을 더 바라볼 수가 없어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욕심이 지나쳤지. 미안하다.”

“…….”

머리가 아찔하니 어지러웠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미카엘은 그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금은 자기 연민 따위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물기 서린 시야에 미카엘의 상이 맺혔다.

레티시아는 그의 어깨를 천천히 건드렸다.

“제가 원했던 게… 폐하의 곁에 있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넌 늘…….”

“쉿.”

레티시아는 불과 며칠 전의 그녀였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을 해냈다. 미카엘의 입을 손으로 과감하게 막아 버린 것이다.

만약 외부인이 보았다면 감히 황제의 몸에 손을 댄 죄로 끌려가고도 남았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의 헛소리를 막으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미카엘의 숨소리가 그녀의 손 밑에서 거칠어졌지만, 레티시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가쁘게 뛰는 심장 탓에 말을 빠르게 쏟아 내야 했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떠나고 싶었던 건 황실이었고, 머물고 싶은 건 폐하였다고. 그래서 항상 폐하의 곁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고…….”

폐하께서 저를 내치기 전까지는.

레티시아는 뒷말은 속으로 삼키며 천천히 손을 미카엘에게서 뗐다.

미카엘에게서 열기가 전염이 되었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가웠던 손에 온기가 감돌았다.

그녀는 뜀박질하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미카엘을 천천히 살폈다.

“죄송해요, 폐하.”

“네가 사죄할 일이 아니잖나.”

“그래도요. 제가 죄송해요.”

“…….”

“폐하께서도, 제게 미안해할 일이 아닌데도 미안해하시잖아요.”

“아니다.”

“……?”

“나는 네게… 못 할 짓을 했어.”

“…….”

레티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에선 헛바람이 나올 뿐이었다.

미카엘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네가 진정으론 내 곁에 머물기를 원했다곤 해도… 그 당시 원했던 건, 나를 떠나는 것이었지.”

“황실을 떠나는 것이었어요.”

“같아. 나와 황실은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미카엘이 쓰라리게 대답했다.

레티시아는 그 사실 자체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미카엘이, 그 스스로를 황실로 끌고 와 쇠사슬로 황좌에 묶어 버린 이유가 바로 그녀 자신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렇다고 레티시아가 미카엘의 말을 가만히 수긍만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제가 황실을 떠나지 않았던 것 역시 제 선택이었어요.”

“……!”

“황실을 떠난다는 건 곧 폐하를 떠나는 걸 의미하니까요. 그래서 가지 않았던 거였어요. 폐하께서, 절 붙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답답함에 말이 터져 나왔다. 레티시아는 자신이 이미 했던 말을 또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지만 상관없었다.

레티시아가 잘 아는 미카엘은 그 자신이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선 몇 번이고 귀에 반복해서 들려줘야 겨우 마음이 동하는, 벽창호였으니까.

“대체 뭘 어떻게 말해야 믿으시겠어요? 지금 제가, 이렇게 말한 것만으로도 부족하신가요?”

“…레티시아.”

미카엘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는 듯한 목소리는, 레티시아의 귓가를 스쳤다가 이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제가 뭣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는지 아세요? 저 또한, 여태까지 폐하께서 절 붙들고 있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것이야말로 내 잘못이다.”

“천만의 말씀.”

레티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저 혼자 멋대로 착각하는데 폐하께서 잘못한 게 뭐가 있죠? 아, 그렇다고 여태까지 사실을 숨기셨던 게 잘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건…….”

다시금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올라 말을 멈추고 말았다.

레티시아는 잠시 쉬었다가 조금 전보다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다른 문제니까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녀는 눈을 감았다 떴다.

미카엘은 그 자신의 치부를 레티시아에게 모조리 드러냈다.

그에 비하면 지금 자신이 할 고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는… 그동안, 제가 폐하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10년이면 충분히 희생했다고 생각해서, 일을 그만두려고 한 거고요.”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던가.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위해 인생을 걸었다.

그에 비하면, 레티시아가 10년간 미카엘의 곁에서 동고동락한 것 따위는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레티시아는 차마 그 말들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지만, 미카엘은 이미 그 행간을 충분히 읽어 낸 듯했다.

“괜찮다.”

그녀를 위로하려고 했으니까.

“…제가 괜찮지 않아요.”

“내가 괜찮으니, 괜찮아.”

미카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레티시아는 일순간 그 모습에 홀려 버리고 말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 까마득하게 먼 옛날로만 느껴지는 어린 날, 레티시아의 눈길을 한눈에 잡아끌었던 어린 미카엘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사람의 온기라는 게 무엇인지 가르쳐 준.

“그리고 나는 널 위해 희생한 게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나를 위한 행동을 옮긴 것에 지나지 않아.”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눈을 길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 동안.

미카엘은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것처럼 무심히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방 안은 너무나 고요했고, 레티시아는 침묵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는, 미카엘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갈비뼈 바깥으로 터져 나올 것처럼 달음박질치는.

“내게… 너 없는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레티시아 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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