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아무리 좋은 집이라 한들 겨울날엔 한기가 들 수밖에 없다. 잠만 자고 나가는 공간이면 더더욱.
하지만 미카엘의 말에 실린 무게감이 훅 하고 다가오는 동시에, 차갑기만 하던 공간에 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레티시아, 날 봐.”
“…….”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아니, 따를 수가 없었다. 좀 전, 미카엘에게 아주 잠시 안겼을 때부터 달아오른 얼굴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레티시아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으나 미카엘은 그녀에게 깊이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힌 것이다.
레티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미카엘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언가를 호소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무엇을?’
답은 금방 떠올랐다.
레티시아의 승낙.
미카엘이 말하는 세상은, 단순히 레티시아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 자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었다.
미카엘이 살아가는 세상은 황실이었다. 레티시아가 그토록 도망치고 싶어 했던 잔혹한 정쟁의 생태계.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미카엘을 제외하고서, 그 곁을 수족처럼 지켰던 레티시아만큼 그 세계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곁에 있기로 결심했다.
미카엘 역시 그 사실을 이제는 모르지도 않을 테고. 하지만 이렇게 미카엘이 물음 없는 대답을 갈구한다는 건,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리라.
레티시아의 혀가 그녀 자신도 모르게 움직였다.
“절대… 폐하의 곁을 떠나지 않을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레티시아.”
미카엘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느 때처럼 그녀를 향해 손을 뻗다가도 움츠리고 말 움직임처럼 보였으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숱하게 사람을 죽여 온 거친 손이 레티시아의 귀 옆머리를 넘겨 주더니, 푸른 눈이 그녀를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그림자 밑에서 숨만 간신히 내쉬었다. 그가 자신의 숨을 막은 것도, 공기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숨을 쉬기가 힘들게 느껴졌다.
“폐, 폐하.”
얼굴이 달아올랐다.
레티시아는 이게 다 미카엘의 얼굴 때문이라고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의 얼굴은 일견 무표정해 보였지만, 레티시아는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읽어 냈다.
그 감정들은 둘둘 말려 있던 두루마리처럼 풀려서, 순식간에 레티시아의 마음을 침범하여 놓아주지 않았다.
단순히 그뿐이었다.
‘미카엘의, 감정이야. 내 감정이 아니라…….’
하지만 왜일까.
마치 레티시아가, 미카엘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가슴이 뛰며 애달파한다고 느껴지는 건.
“조금만… 떨어져 주세요.”
미카엘이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침묵이 흘렀다.
그 이면에 담긴 감정 탓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침묵이.
레티시아는 천천히 미카엘에게서 물러났다. 조금 전 미카엘에게 그를 평생 따르겠다고 말을 했는데도, 지금만큼은 그에게서 떨어져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미카엘을 돌려보낼 말을 생각했다.
이미 시간이 늦었다거나, 내일 황궁으로 가겠다거나, 정리할 시간을 달라거나…….
무엇 하나 당치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침묵은 깨어지지 않은 채, 둘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둘 모두 차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 때문에, 미카엘은 레티시아 때문에.
툭.
무언가가 창문을 때렸다.
레티시아와 미카엘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창문을 서둘러 확인했다.
“…풉.”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눈 때문에 부러진 작은 나뭇가지가 창문을 때린 것이다.
하지만 이내 레티시아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본디 눈이 쌓여 있던 나뭇가지에, 눈이 더 쌓여 부러지고 말았다.
레티시아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폐하, 빨리 돌아가셔야겠어요. 해도 졌는데 눈이 더 내리면 길이 위험하니까요.”
미카엘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레티시아를 향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
레티시아는 망설였다.
아무리 미카엘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 그의 말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줄어들었다 한들 이 정도도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미카엘은 소리 없이 레티시아에게 청하고 있었다.
함께 가자고.
레티시아가 탈출하기를 원했고, 그녀의 원대로 미카엘이 내쳐 준 그 황실로 함께 돌아가자고.
망설임은 깊었으나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미카엘의 손을 잡았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인 나이와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남자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거칠고 굳은살이 박인 손이었으나 따뜻했다.
‘……?’
미카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레티시아가 의아해하며 올려다보자, 미카엘이 흠칫 놀라며 손을 놓아 버렸다.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폐하?”
“한 번… 한 번만 더 말해 줄 수 있겠나.”
“뭐를, 요?”
“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자신은 이 불쌍한 남자에게 무슨 짓을 해 왔다는 말인가.
겨우 열 살일 때부터 봐 온 어린 소년에게…….
“네, 폐하. 절대 떠나지 않겠어요. 제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전 폐하의 곁에 있을 거예요.”
“얼마나?”
“평생.”
말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튀어 나갔다. 레티시아는 자신의 말의 무게감을 말한 다음에야 깨달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진실이었으니까.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폐하의 곁에 있겠어요.”
“나 역시 평생, 네 곁에 있겠다.”
그제야 미카엘은 한결 안도한 듯했다. 어느새 닫혀 버린 현관문을 열며 레티시아를 밖으로 잡아끌었으니까.
“폐하, 제 짐들은…….”
“시종을 시켜서 가져오라 하겠다. 어차피 별 짐도 없잖나.”
“…반박, 못 하겠네요.”
“네 방은 그대로 있어.”
“……?”
“네가 예전에 쓰던 방, 좋아하는 공간들……. 모두 그대로다.”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당연히 황궁의 방들은 수도 없이 많았으며 그중 그녀가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공간들을 비워 두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자신이 미카엘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핑계로 그간 황실에서 얼마나 특혜를 받아 왔는지 알았다.
미카엘의 즉위 이후, 그녀의 침실과 사무실은 보안과 이동이 용이하도록 황궁 중심부로 옮겨졌다.
당연히 계속 비워 두기에는 아까운 공간이었다.
“제가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신 건가요?”
“아니.”
미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 자리에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안 될 것 같았어.”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변명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네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틀리셨어요.”
레티시아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틀렸지. 네가 이렇게 돌아왔으니.”
미카엘의 상반신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지만 레티시아는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치웠으면 큰일 날 뻔했군.”
“하지만 저는, 이제 더는 폐하의 비서가 아니에요.”
미카엘의 미소가 사라졌다.
레티시아는 그 사실에 멈칫하면서도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이미 다른 분이 통역사가 되셨고… 저는 그분이 그만두는 걸 원하지 않아요. 이미 전하의 말을 옮길 능력도 없고요.”
“괜찮아.”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제가 복직했다고 생각할 거예요. 차라리 처소를 황궁의 변두리로 옮기면 그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할 수…….”
미카엘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조금 전에, 그녀가 그에게 한 것처럼 손바닥으로.
하지만 더욱더 부드럽게.
레티시아가 원하기만 한다면 금방이라도 쳐낼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하게 얹어 놓기만 한 힘이었다.
“네 방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미카엘의 손을 내렸다. 좀 전 그녀는 미카엘의 헛소리를 막기 위해 그의 입을 막았지만, 지금 미카엘은 단순히 자신의 고집을 부리기 위해 그녀의 입을 막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카엘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폐하, 저는 비서로 복직하지 않을 거예요. 제게는 이미 두카트가 있고… 두카트를 그만둘 생각은 없어요.”
“안다.”
미카엘의 얼굴에 어딘가 그 뜻을 읽어 낼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약속하지. 네가 다시 내 비서가 되는 일은 없을 거다.”
“정말인가요?”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정말로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비서라는 직위에 알맞게 최적화된 그녀의 침실과 사무실이 그대로인데 어떻게 그 사실을 믿겠는가.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요구하는 게, 단순히 약속이 아닌 확증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나지막한 한숨이 허공에 잠시간 걸렸다.
“조만간 내 비밀을 모두에게 알릴 생각이다.”
“……!”
레티시아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미카엘을 향해 반절 쓰러지듯 비틀거렸다. 등 뒤를 받쳐 주는 단단한 손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정말… 정말인가요.”
조금 전과 같은 단어였지만 전혀 다른 결의 질문이 레티시아의 입에서 튀어 나갔다.
미카엘은 어딘가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이 연극을 끝내야지.”
“하지만 분명 일전엔 안전하다는 걸 확신하긴 전까지는 멈출 수 없다고…….”
“레티시아.”
미카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한 결심을 한 투였다.
“…내겐 그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네가 있고, 없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었지.”
“그럼……!”
“그래, 널 잡아 놓기 위한… 볼썽사나운 몸부림이었다.”
“…….”
충격에 눈코입이 모두 먹먹해질 정도였지만 레티시아를 가장 놀라게 한 건 미카엘의 고백이 아니었다. 만약 그리 멀지도 않았다는 예전이었다면, 그녀는 그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다시금 분노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했고, 그리고…….
‘기뻐.’
레티시아는 불현듯 떠오른 꼴사나운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으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기뻤다.
미카엘이 그 정도로 자신을 원했다는 사실에.
아무리 몸부림을 쳐 보아도 그 꼴사나운 감정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
그녀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
레티시아는 바싹 마른 입을 살짝 벌렸다. 오직 자신에게만 들릴 말을 되뇌기 위해서.
왜 여태까지 몰랐을까.
레티시아의 세상 역시 미카엘이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