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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101/150)

101화

“…레티시아.”

레티시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미카엘의 조용한 부름이 들려왔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뿐만 아니라, 미카엘 역시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대한, 레티시아의 반응을 걱정하면서.

‘이걸, 어떻게…….’

레티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작스레 달아오른 이 마음을 감히 입 밖으로 내놓을 수가 없었다. 아니, 입 밖으로 내놓아선 안 되었다.

미카엘에게 자신이 세상의 전부인 건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했다.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었던 어린 소년에게 레티시아의 존재는 그야말로 구원이었을 테니.

하지만 미카엘 역시 레티시아의 삶을 바꾼 구원이 되어 주었다.

그간 가족의 사랑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레티시아에게 미카엘은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

그동안 레티시아에게 호의로 접근한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각자만의 집과 가족이 있었고, 레티시아가 진정으로 애착을 느끼고 같은 종류의 외로움을 서로 달랠 수 있었던 건 오직 미카엘뿐이었다.

그렇게 지난 10년 동안 레티시아와 미카엘은 서로에게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다.

레티시아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그 이유만으로 미카엘의 곁에 평생토록 머무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카엘이, 그 자신의 거짓말을 고백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

입술을 아무리 아프게 깨물어 보아도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버린 심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감히, 내가…….’

레티시아는 이 감정이 품어서는 안 될 종류의 것이라는 걸 알았다.

미카엘과 그녀의 정신적인 관계가 어떠하든 실질적으론 레티시아는 일개 평민이었다.

‘더군다나 미카엘은…….’

미카엘은 단지 그녀를 옆에 계속해서 두고 싶어 할 뿐이다.

레티시아와는 달리 미카엘은 헛된 착각 따윈 하지 않았고, 그들이 서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았다. 그래서 레티시아를 붙들어 놓으려 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 사실에 기쁨을 느끼다니.

레티시아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를 지경이었다.

“…미안하다, 내가.”

“사과하지 마세요.”

레티시아는 단칼에 미카엘의 말을 끊었다. 사과할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감히 일국의 황제에 대해 삿된 감정을 품은 자신이.

‘우리 둘 다 위험해질 수 있어.’

순간, 레티시아의 머릿속에 미카엘에게 연정을 고백하는 자신이 떠올랐다. 그녀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역시, 좋을 게 없는 감정이었다.

그간 미카엘에게 가족이자 세상이 되어 주었던 자신이, 연정을 고백한다면?

미카엘은 그녀를 곁에 두기 위해서라도 고백을 받아 줄 것이다.

실제론 같은 종류의 감정이 아니면서도.

‘착하니까, 착각할 수는 있겠지.’

어쩌면 자신은 제국 최초로 하녀 출신의 황후가 될지도 모른다. 미카엘이라면 충분히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간 단순한 정치적 이유로 결합한 탓에 금실이 좋지 않기로 유명했던 황제, 황후들보다는 훨씬 더 사이좋은 잉꼬부부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알았다.

미카엘에게 자신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꼭 황제와 황후 사이에 사랑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아니, 사랑은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부가적인 무언가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경우, 황제와 황후는 서로에게 정치적인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미카엘에게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다.

단지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곁에 있다는, 안정감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그 안정감은 꼭 황후의 위치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레티시아는 속으로 자신을 비웃었다. 마치, 황후가 될 기회라도 온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정신 똑바로 차려, 레티시아.’

지금은 미카엘과 함께 황실로 돌아가는 데 집중할 때였다.

있어서는 안 될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아니라.

“지난 일은 묻어 두기로 해요. 저 역시 폐하께, 많이 잘못했으니까…….”

“없어.”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단호한 어조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단 한 번도 없다. 네가 나에게 잘못한 적은.”

“그건…….”

“네 스스로 나에게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내가 의도했을 뿐이다.”

“폐하.”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향해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그녀 자신이 담은 헛된 감정을 떠올리고는 움츠렸다.

하지만 레티시아가 그 손을 얌전하게 떨구기도 전에 미카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 행동이 담고 있는 의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설마…….’

레티시아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조금 전 그녀의 등줄기를 쭈뼛하게 만든 생각이 결코 그 헛된 감정이 일방적이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니라면.’

만약 미카엘과 자신의 관계가 이렇게 복잡하게 엮여 있지만 않았다면 벌써 고백했을지도 모른다.

레티시아는 답답한 것만큼은 딱 질색이었으니까.

테렌스 경과의 관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레티시아는 미카엘에게 깔끔하게 고백하고 즉각 거절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은 달랐다.

미카엘에게 레티시아는, 이 세상 모든 것이었기에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면 인생과 지위를 건 거짓말이라도 할 사람이 바로 미카엘이었다.

그 자신의 인생을 내던져 가면서.

그래서 레티시아는 차마 자신의 마음을 미카엘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설령, 미카엘이 그녀와 같은 마음이더라도…….

‘그 경우엔 문제가 더 커져.’

레티시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오랫동안 혹사당한 입술에서 피 맛이 느껴졌지만 자학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미카엘 역시 그녀를 사랑한다고 치자.

제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후라니, 미카엘에게 얼마나 커다란 짐 덩어리가 될지 감히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황제의 단순한 애인이나 정부로 남는 건 미카엘 자신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항상 레티시아에게 최고의 자리만을 주고 싶어 했으니까.

‘…….’

다시금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레티시아는 천천히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의도하셨든, 의도하지 않으셨든… 저 역시 제 의도로 폐하께 상처를 입혔어요.”

“…….”

“그리고 폐하께 상처를 입었고요. 그러니… 우리 둘 모두, 서로에게 하나씩 잘못하고 하나씩 잘한 것으로 해요.”

“내가, 너에게 잘한 게 있었나.”

순간 레티시아의 목이 먹먹하게 치달았다. 미카엘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항상 그가 레티시아에게서 받기만 해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요.”

레티시아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너무 많아서… 무엇 하나를 꼽지도 못하겠어요.”

미카엘의 얼굴에 빛이 스쳐 지나갔다. 레티시아는 그 빛이, 자신이 맞고 죽었다 살아났던 그 벼락보다도 더욱더 밝고 강력하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그들은 레티시아가 기거하고 있는 저택의 회랑을 지나 미카엘이 말을 세워 둔 입구에 도착했다.

“돌아가기 어렵겠군.”

“…….”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밖으로 한 걸음 나간 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눈이 좀 많이 내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몰아쳤다.

미카엘 혼자라면 몰라도, 둘 모두가 함께 돌아가기에는 상당히 어려워 보이는 날씨였다.

“…어쩔 수 없네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폐하를 모시기에 조금 누추하기는 해도, 하룻밤 정도니까 참아 주세요.”

“괜찮다. 더 못한 곳도 많이 다녔으니.”

레티시아는 일전, 자신이 티스베였고 그가 카일이었던 시절을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미카엘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황실에 비하면, 그 어떤 곳이든 황금 이부자리에 비교해도 지나치지 않지.”

이번에는 정말로 농담이었다.

레티시아는 웃으며 응수했다.

“이 누추한 곳을 황금에 비교해 주시다니, 정말 영광인데요.”

“누추하지 않아.”

미카엘이 천천히 레티시아의 보폭에 맞추어 걸으며 말했다.

“너와 함께라면, 그 어떤 곳도 누추할 수가 없다.”

레티시아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혀끝에 감도는 수십 개의 대답은, 그 무엇 하나 감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는 것이었기에.

* * *

레티시아 우즈의 복귀는 황실 내 제법 화제가 되었다.

만약 비서로 복직했다면 잠시 가십거리가 되고 멈추었을 것이다. 어차피 황제의 비서로서 레티시아 우즈만 한 사람이 없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으니.

문제는, 돌아온 그녀에게 그 어떤 직책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레티시아 우즈는 회의를 비롯하여 황제의 공식 일정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간혹 두 명이 같이 있는 모습을 목격한 사용인들이 있었으나, 모두가 그 사실마저 함구하라는 명에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결국, 그녀의 존재가 회의 안건으로 올려진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폐하, 외람되오나 우즈 양의 위치가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원래는 일개 남작에 불과했으나 공을 세운 덕에 마침 공석이 되었던 후작 위를 수여받은 한 각료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우즈 양을 위해서라도 비서로 복직시키는 게 옳다고 봅니다. 그만한 사람이 없는 건 사실 아닙니까?”

“하지만 이미 통역사가 그 자리를 잡았지 않습니까?”

황제의 새로운 통역사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로 알려진 각료가 반대하고 나섰다.

“우즈 양의 능력을 보아할 때, 지금이라도 문관 아카데미 졸업 자격을 부여하여 문관으로 임명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만약 복직시킬 생각이었다면 폐하께서도 진작 복직시켰겠지요.”

“마찬가지 논리로, 폐하의 뜻이 문관 임명에 있으시다면 진작 임명하셨겠지요.”

그 누구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소모적인 토론만 흘러갔다.

토론은 끝내 참지 못한 호르헤 경이 한마디 했을 때에야 끝났다.

“여러분, 가장 중요한 건 폐하와 우즈 양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폐하의 뜻이 우즈 양을 저대로 내버려 두는 거라면…….”

“그럼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거역할 생각입니까, 르웨타 후작?”

“아, 아닙니다. 그저 비서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우즈 양이라 생각하여… 실언을 하였을 뿐입니다.”

후작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때였다.

회의실에, 황제의 목소리가 울린 것은.

“됐다.”

삽시간에 혼란에 빠진 회의실과는 달리 미카엘은 단정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더는 헛소리를 들어 줄 수가 없군, 호르헤 경.”

“예.”

“전 제국에 선포하라. 나,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이제 내 말을 전달하기 위한 그 누구도 필요치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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