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Chapter 14. 폭풍의 눈
황제의 선언은 전 제국을 충격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아니, 전 제국뿐이던가?
제국과 국경을 인접한 나라들도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혼란에 빠져들었다. 개중 도무지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사절단을 보내온 나라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충격도 잠시,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황제가 바뀐 것도 아니요, 새로운 정책이 시행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벙어리인 줄 알았던 황제가 실은 말을 제대로 한다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몇몇 의문은 오래도록 세간의 가십거리가 되었다.
그중 사람들에게 가장 미스터리로 남은 건, 바로 10년간 그의 곁을 지켜 온 비서 레티시아 우즈의 존재였다.
그리고 그 쓰임새가 다했는데도 아직도 황실에 머무르는 이유 또한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당사자인 레티시아는 자신의 뒤를 떠도는 모든 소문을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신경을 쓰지 않는 것과 남들이 신경을 쓰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귀하신 몸이 이런 곳까지 혼자 와도 돼?”
베스는 평소처럼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투가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레티시아를 걱정하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 예전보다 안전하니까.”
“그래도…….”
“호위가 셋이나 붙었어.”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을 과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레토 바틀렛의 행방이 해결되지 않은 데다 미카엘의 갑작스러운 선포로 반 황제파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에 과보호라고 탓할 수는 없었다.
“셋? 서른 명은 붙어야 할 것 같은데.”
심지어 베스조차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랬으면 여기로 오지도 못했지.”
“그건 좀 곤란한데. 내가 황궁으로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베스도, 레티시아도 그 사실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레티시아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지위도 없이 황궁으로 돌아오게 된 그녀가 심상치 않은 상대라고 생각했는지 암살 시도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레티시아의 밤잠을 설치게 하기엔 충분한 공포였다.
베스와 레티시아는 별 이변이 없는 두카트의 근황을 살폈다. 레티시아는 자신의 지속적인 관여가 없어도 두카트가 제대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을 베스에게 밝히지 못하고 조용히 묻어 두어야 했으리라.
“베스, 할 말이 있어.”
“하지 마.”
레티시아는 혀를 찼다. 눈치 빠른 베스는 바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눈치챈 듯했다.
“해야 해.”
“그래도 하지 마.”
베스는 그녀의 입을 억지로 막으려는 모션까지 취했으나 레티시아는 빠르게 몸을 뒤로 뗐다.
“베스, 나는 두카트에선 손을 완전히 떼겠어.”
“레티시아 우즈!”
“말려도 소용없어.”
몇 번이고 심사숙고한 결과였다.
레티시아는 지금 자신의 상태가 영원토록 지속될 순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아무런 지위도 없이, 그저 미카엘의 곁을 지키기만 하는 삶을.
그렇다고 비서로 복직할 수도 없었다. 비서의 의미가 통역사를 뜻하는 건 아니었지만, 문관 아카데미를 나오지 않은 그녀가 황제의 측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미카엘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그 상황이 사라졌으니, 비서로 복직한다면 그 역시 특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레티시아 역시 번역이 아닌 비서의 일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기도 했고.
‘지금 와서 다시 국정에 관여할 수는 없어.’
레티시아는 자신이 한동안 미카엘의 국정을 도왔던 건 필요악이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미카엘은, 자신 같은 그림자 속 존재 없이 각료들과 함께 스스로의 힘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레티시아는 잘 굴러가는 톱니바퀴에 불쑥 걸려 전체적인 움직임을 망가뜨리고 마는 이물질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잠시간 침묵 이후, 베스가 조용히 물어 왔다.
반박이나 반대가 아닌, 그녀의 미래에 대한 단순한 질문이었다.
“…황후가 될 생각이야?”
“아니.”
레티시아는 딱 잘라 말했다.
만약 한 달만 더 전이었다면 레티시아는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 무슨 가당치도 않은 일이냐고.
하지만 이제 레티시아는 확신했다.
만약 자신이 미카엘에게 황후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면, 미카엘은 그가 감수해야 할 그 모든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레티시아를 제국 최초의 평민 황후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오직 레티시아를 곁에 두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그러면 난 황제를 홀린 희대의 요녀가 되려나.’
레티시아는 쓰게 웃었다. 역사에서 황제가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여겨진 여인의 결말은 대부분 좋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그들의 뒤를 이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비참하게 죽을 생각은 없거든.”
“죽기는. 평생을 금은보화에 묻혀서 행복하게 살 텐데.”
“…….”
레티시아는 분하게도, 베스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금은보화 때문이 아니었다.
미카엘의 마음이 어떠하든, 그의 황후가 된다면 레티시아는 행복할 것이다.
단지 그의 아내가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 * *
황궁으로 돌아온 레티시아는 바로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제는 그녀의 일상 공간이 된 사무실은, 레티시아를 위한 물건보다는 미카엘을 위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당연히 미카엘이 자신의 물건을 굳이 가지고 온 게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좋아할 만한 물건들을 하나씩 방에 들여놓았는데, 그가 자연스럽게 자신이 준비한 물건들을 사용할 때마다 묘한 만족감을 느끼곤 했다.
오늘 역시 그러했다.
레티시아는 방을 들어서기도 전부터 미카엘이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선호하여 피워 놓곤 하는 싱그러운 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레티시아는 빨라지기 시작하는 심장 박동과 함께 덩달아 빨라진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늦었군.”
“얘기할 게 많아서요.”
“그랬나.”
미카엘은 수긍만 할 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이미 그가 자신에게 붙여 준 호위들 중 한 명에게서 보고를 들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알고 계시죠?”
“…네가 두카트를 완전히 포기하겠다고 말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게 확정인지는…….”
“확정 맞아요.”
“……!”
미카엘의 눈이 커졌다.
“많이 아쉬울 텐데.”
“아쉽죠.”
레티시아는 수긍했다.
“지난 10년 동안의 꿈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공도 많이 들였고……. 사실 지금도 이상해요. 제가 두카트와 곧 아무 관련도 없어질 거라는 게, 거짓말처럼 느껴진다니까요.”
레티시아는 웃었지만, 미카엘은 웃지 않았다. 아니, 웃지 못하는 사람처럼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그렇게까지 느껴진다면 계속하는 게 좋지 않나.”
“아뇨.”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폐하의 곁에 계속 있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요.”
“아니다.”
미카엘이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레티시아, 나는 이런 걸 원하지 않았어.”
“알아요.”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는 제가 폐하의 곁에서, 안전하게… 제가 원하는 걸 하기를 원하셨겠죠. 안 그런가요?”
“그래. 그리고 넌 그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 무엇이든……!”
“네.”
레티시아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제가 지금 원하는 건 폐하의 곁에 평생토록 머무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제가 그보다 덜 원하는 걸 버려야만 하죠. 그게 두카트일 뿐이에요, 폐하.”
“레티시아.”
미카엘의 목소리는, 레티시아가 알지 못하는 감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하고자 했던 말을 계속 이었다.
“문관 아카데미에 들어갈 생각이에요. 그동안 좀 떨어져 있어야 하긴 하겠지만, 통학도 가능하니까요. 하급 문관부터 시작한다 하더라도 승진에 제한이 없으니, 곧 폐하의 곁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그게, 네가 예전부터 원하던 것이었나?”
“아니죠.”
레티시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가장 원하는 것이기도 해요.”
“레티시아…….”
미카엘은 그녀에게서 비틀거리며 떨어졌다. 레티시아는 무심코 그를 바라보았다가,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항상 날이 잘 서린 비수처럼 보였던 미카엘이 지금만큼은 느슨하게 흐트러진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 방에 발을 들였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으니, 자신이 두카트를 그만두고 문관 아카데미를 가겠다는 말에 생각보다 큰 충격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미카엘이 신음에 가까운 말을 토해 냈다.
“나는… 너에게 최고를 주고 싶었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서… 원하는 걸 무엇이든 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레티시아는 타들어 가는 속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과연 미카엘이 그녀가 정말, 진정으로 원하는 걸 들었을 때에도 저렇게 말하고 생각할까?
레티시아는 도저히 미카엘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허공 한편을 응시했다.
“저 역시 폐하께서 원하시는 걸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걸 위해서 문관 아카데미를 가려고 한 거고요. 옆에서 폐하를 보필하기 위해…….”
미카엘이 별안간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자연히 레티시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
미카엘의 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열망과 절망이 뒤엉킨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짐승의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가 그의 목에서 터져 나왔다.
“내가 가장 원하는 건… 레티시아, 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