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레티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귀를 매만졌다.
미카엘의 울림이, 귓가에 맴돌며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레티시아는 폐하, 라고 미카엘을 부르려다가 입을 닫고 말았다. 그 뒤 자신의 입에서 두서없이 흩어져 내릴 말들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카엘이 물러나서, 이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긴장감이 옅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미카엘은 항상 그랬듯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는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면서.
아니, 갈망하면서.
그동안 레티시아는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말해야 해. 말하고 싶어.’
레티시아의 본능은 바로 지금이 미카엘에게 그녀가 그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미련한 감정을 드러낼 순간이라고 외쳐 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이 혀에 족쇄를 채웠다. 만약 미카엘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게, 단지 가족과 같은 존재를 얘기하는 것이라면?
레티시아는 그의 곁에 단순한 문관으로서도 남지 못하게 될 것이다.
‘미카엘은 그래도 상관없다고 하겠지. 나를 남게 하려고 거짓말을 할지도 몰라. 여태까지 몇 번이나 그랬으니까…….’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카엘은 그래도 만족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미카엘이 가장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단순히 미카엘의 애정을 받아야겠다는 욕심에서가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알았다.
미카엘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했다는 죄책감이, 평생토록 그녀 자신을 갉아먹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게는 살 수 없어.’
미카엘이 저렇게까지 자신에게 간청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문관 아카데미를 가지 말라고.
그곳에 다니고, 신입 문관으로서의 절차를 밟으며 그와 떨어지게 되는 그 몇 년 동안을 도저히 버틸 감당이 되지 않아서이리라.
그래서 그 자신이 원하는 건 국정이 아니라, 레티시아임을 호소한 것이고.
미카엘의 애원은 간절하기야 간절했지만 레티시아의 귀에 들리는 바로 그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냥 내가 그런 말들을… 듣고 싶어서 그래.’
하지만 왜.
자신의 귀엔,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처럼 들리는가.
“…폐하.”
레티시아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미카엘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자신이라도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카엘이 그녀가 뒤로 물러나자마자 곧바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기에, 그들의 거리는 전혀 멀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아주 조금, 좁혀진 것 같기도 했다.
이미 달아오른 지 오래인 얼굴에서 열감마저 느껴졌다.
“…저는, 가야 해요.”
“그건 네가 원하는 게 아니야.”
미카엘이 상황에 비해 놀랍도록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날 위해서 네 인생을 바꿀 필요는 없다. 내겐, 있는 그대로의 너 하나면 충분해.”
“문관 아카데미에 가면 있는 그대로의 제가 아니게 되는 건가요?”
“아니지.”
미카엘의 대답은 단호했다.
“날 위해 사는 너지. 나는 그걸 바라지 않아.”
레티시아는 반쯤 자포자기하며 대답했다. 어차피 미카엘은 도저히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듯싶지 않았다.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여태껏 그들은 오직 서로를 인생의 첫 가족으로만 바라보았는데.
“제가 그걸, 바란다면요? 제 인생에 있어 그 어느 것보다?”
“…….”
침묵이 흘렀다.
동시에 레티시아는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이번엔, 미카엘도 그녀도 차마 말 한마디 꺼낼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미카엘의 아름다운 눈이 흔들리는 걸 보니, 그 역시 여태까지 레티시아가 생각했던 것처럼 남녀 간 일어나는 일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레티시아에게는 매우 불행하게도.
“제가… 주제넘었네요.”
레티시아는 비탄에 빠진 티가 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왜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형편없이 들리기만 했다.
“문관 아카데미는 가지 않겠어요. 어차피 폐하를 위한 것이었는데……. 폐하께서 바라지 않는다면, 저는 가만히 있겠습니다.”
갑자기 미카엘이 움직였다.
레티시아는 자리에 뻣뻣이 굳은 채, 숨조차 쉬지 못하며 눈만 굴려 그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미카엘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서 겨우 한 뼘 떨어진 위치에 도달했다.
부드러운 그림자가 레티시아를 덮었다. 거칠고 단단하지만 따뜻한 손길이 레티시아의 어깨, 그리고 등에서 느껴졌다.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미카엘이 그녀를 금방이라도 깨져 버릴 것 같은 유리 공예처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감히, 손길 한번 제대로 대지 못 할 정도로.
레티시아는 얼어붙은 상황에서도 한 가지를 알아챘다.
미카엘의 심장이, 그녀의 심장과 정확히 같은 박자로 뛰고 있다고.
그 순간,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레티시아를 사로잡았다.
미카엘이 단순히 어릴 적처럼 그녀를 순수하게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조심스러울 것 같지가 않다는.
무엇보다도 미카엘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왔다.
지금 와서, 단순히 떨어져 지내는 그 몇 년도 참지 못하여 이렇게까지 애걸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럴 거면 진작… 나를 놓아주지 않았겠지.’
만약 미카엘이 그녀를 해고하기 이전이었다면 레티시아는 전혀 다른 이유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레티시아는 알았다.
자신이 그간 성장한 것만큼이나 미카엘도 성장했다고.
언제까지나 그 어리고 자신밖에 모르던 소년은 아니라고.
더 나아가, 자신의 미카엘에 대한 감정이 변화한 것처럼 미카엘 역시 변화할 수도 있다고…….
‘한번, 운에 걸어 봐도 되지 않을까.’
그동안의 결과만 보면 레티시아는 항상 운이 좋은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정해져 있던 운명을 깨부수어 준 미카엘을 만나지 않았는가.
지금 역시 그럴지도 몰랐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카엘은 그림자에 덮인 와중에도 찬란했다.
그녀는 그 이유가 미카엘의 단순한 겉모습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카엘에게는 항상 사람을 현혹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비록 레티시아 본인은, 자신만큼은 그 매력에 빠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
마침내, 침묵이 깨졌다.
하지만 레티시아와 미카엘 위에 숨이 막힐 정도로 드리워진 이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심해져, 레티시아의 숨통을 시시각각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미카엘에서 더 물러서지도, 그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오지도 않았다.
레티시아는 미카엘 역시 자신처럼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쩌면… 조금, 가능성이 있어.’
레티시아는 눈을 감았다.
지금부터 할 행동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아주 잠깐 마음의 준비를 다 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미카엘은 미동도 없이 그녀를 숨죽여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생각했다.
이 순간을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아주 잠시나마 미카엘이 그녀를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잠긴 바로 이 순간을.
하지만 착각은 오래가서는 안 될 것이었다. 달콤할수록 더더욱.
그래서 레티시아는 자신에게 착각이라는 달콤한 병을 완전히 떼어 내기 위해 말을 이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어도, 저를 벌하지 않으시겠다고 맹세해 주실 수 있나요?”
“내가 너를 벌할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설령 나를 해친다… 아니, 이미 해쳤다고 하더라도 벌하지 않겠다.”
바로 미카엘의 대답이 돌아왔다.
레티시아는 자신이 먼저 운을 뗀 것치고는 미카엘을 아주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그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미카엘을 바라보는 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만약 미카엘이 거짓말로 그녀의 마음에 호응하려고 한다면 그와 그녀 모두를 위해 조용히 황궁을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침묵은 레티시아가 말을 고르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길어졌다.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레티시아는 그간 자신이 화법에는 나름 자신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무려 황제의 대변인이요, 한 회사의 대표였으니까.
하지만 지금만큼은 레티시아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수사적 표현들은 그저 아무런 쓸모가 없는 잡다한 말들로만 느껴졌다.
마침내 레티시아가 입을 열었을 때, 밖으로 흘러나온 건 단 네 글자에 불과했다.
“사랑해요.”
자신의 무모함에 스스로 놀라고 만 레티시아는 설명을 덧붙이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를 내리눌렀기에.
‘……!’
수십만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지만 레티시아는 무시했다. 미카엘이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 하나만이 중요했다.
레티시아는 굳어지려고 하는 몸의 힘을 반강제로 풀어냈다. 아주 천천히, 청록빛 바다에 잠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