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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104/150)

104화

고요한 와중에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레티시아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떴을 때, 이 모든 것이 꿈으로 변하기라도 할까 봐.

하지만 동시에 꿈이 아니며 찰나의 착각 또한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싶었기에, 레티시아는 천천히 용기를 내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온 세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카엘의 눈에 담긴, 온 세상이…….

일순간, 몸이 흠칫 굳었다.

미카엘이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생경한 느낌이 레티시아의 몸을 지배했다. 그동안 미카엘과 포옹한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지금은…….

모든 게 달랐다.

미카엘이 그녀의 마음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되레 입을 맞추어 왔다는 점이 레티시아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일깨웠다.

생경한 감각은 미카엘이 그녀의 귀에 속삭여 왔을 때 극에 달했다.

“사랑한다, 레티시아. 내가, 그동안 널 얼마나 원했는지…….”

레티시아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미카엘의 말이 그간 그녀가 생각해 왔던 의미가 아니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에.

미카엘이 레티시아를 원해 왔던 건 그녀가 여태까지 생각해 왔던 가족적인 감정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으면 반대였지.

‘나, 정말 바보 같았구나.’

하지만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날아갈 것 같았다.

레티시아는 그녀와 미카엘의 미래에 대한 걱정거리들을 미래의 그녀가 해야 할 일들로 제쳐 두었다.

황제니 평민이니 하는 것들은 지금 생각할 게 아니었다.

지금만큼은,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전달한 진심이 허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기뻐할 때였다.

머리카락을 천천히 어루만지는 미카엘의 손길이 느껴졌다.

“폐하…….”

레티시아는 자그맣게 소리 내어 미카엘을 불렀다. 거부의 의사는 아니었다. 단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조금 전 레티시아를 사랑한다고, 원한다고 말해 준 그의 목소리를…….

“미카엘.”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레티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카엘이 무슨 의미로 그 자신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 의미를 되묻기도 전에 미카엘의 조용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미카엘이라고 불러 줘.”

레티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황제의 이름을, 감히……!

아무리 자신이 미카엘과 가깝다 한들 이건 아니었다.

“하지만 폐하…….”

“너에게만큼은, 그렇게 불리고 싶지가 않다.”

미카엘이 씁쓸한 웃음소리를 냈다.

“물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럴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둘만 있을 땐…….”

미카엘은 다시 그녀의 귓가에 속삭여 왔다. 레티시아는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그의 미성에 약하다는 점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내 이름을 불러 줬으면 해.”

“…….”

레티시아는 침묵했다.

가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세차게 뛰었지만, 긍정 혹은 부정 그 어느 쪽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미카엘을 이름으로 불렀던 건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마저도 그의 신분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깍듯이 호칭을 붙여 불렀고. 비록 내심은 그를 친근하게 여겼다고는 하나 실제로 입 밖으로 내는 호칭을 바꾸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반대하기에는 입이 차마 떼어지지 않았다.

‘저렇게 원하는데……. 괜찮지 않을까.’

남 앞에서 그리 부르라 한 것도 아니고, 단둘만의 호칭이다.

무엇보다도 레티시아 자신 또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미카엘과는 조금 다른 이유였다.

이름으로 부르면, 그와 자신 사이의 현실적인 벽이 조금은 낮추어지는 느낌이 들 것 같았기에.

고민은 길었지만 실행은 짧았다.

“미카엘.”

제국에서 가장 흔한 이름 중 하나가 입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겨우 세 음절에 불과한 말이, 무겁고도 황홀하게 느껴졌다.

미카엘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며 손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뜨거운 입술이 느껴졌다.

“레티시아…….”

레티시아의 몸이 굳었다.

미카엘의 시선엔, 그간 그 정체를 숨기고 있던 욕망이 타오르는 모닥불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그 욕망이 두렵지도 낯설지도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자신 역시 느끼고 있었기에.

레티시아는 다시, 그를 소리 내어 불렀다.

“미카엘.”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얼마나 흘렀을까.

어둑한 어둠이 창밖에 내려앉고 있었다.

미카엘이 이 방에서 오래 머무른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의심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지레 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만 가 봐야겠어요.”

“…벌써?”

“밤이잖아요. 설마, 여기서 주무실 생각이신가요?”

레티시아는 가볍게 농담하듯 말했지만 미카엘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래도 상관없다. 네 곁에 잠시라도 더 머물 수 있다면.”

“아쉽네요. 저는 제 방을 더 좋아해서요.”

레티시아는 가볍게 말했지만 미카엘의 함의에 가슴이 가빠졌다.

미카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까지 데려다주겠다.”

“바로 이 옆이에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지.”

미카엘이 레티시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왔다. 레티시아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태까지 자신은 미카엘의 말에 완전히 따르며 살아오지는 않았다.

당연히 레티시아와 미카엘은 서로 생각인 다른 타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미카엘이 설령 산 채로 불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명한들 따라야 할 것 같은 충동이 가슴 깊은 곳에서 일어났다.

“지금 자러 갈 건가?”

“네.”

둘은 레티시아의 침실에 금세 도착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에게 가볍게 감사 인사를 하고, 침실 문을 열었다.

“……!”

그녀는 놀라서 뛰쳐나오다가, 아직 방 밖에서 서성이던 미카엘과 부딪칠 뻔했다.

“레티시아!”

미카엘의 단단한 두 손이 그녀의 양팔을 붙들었다.

레티시아는 턱을 딱딱 부딪쳤다.

“진정해라.”

“저 안에… 레토 바틀렛이…….”

그 말을 들은 순간, 미카엘은 반쯤 이성을 잃은 듯 침실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레티시아를 조심스레 자신의 등 뒤로 돌려세우는 걸 잊지 않았지만.

“…하.”

미카엘의 입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레티시아의 침실에는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그 카펫 위에 바스러진 돌 부스러기가 사람 모양을 나타내고 있었다.

언뜻 보면 특이할 게 없는 돌 부스러기였으나 그와 레티시아는 불과 얼마 전 정확히 같은 것들을 보았다.

바로 레토 바틀렛이 보낸 분신이, 그의 단칼에 썰려 사라질 때 남은 흔적이었다.

‘이건 경고다.’

이 궁전의 그 어느 곳이든,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으니 각오하라는 경고.

그리고 이제는 미카엘이 아닌 그의 소중한 사람을 노리겠다는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내가 아닌, 레티시아를 노려 놓고선.’

비겁한 자다.

처음부터 사람의 약점을 후벼 파는 비열한 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대적할 힘이 없는 레티시아를 건드리는 건 비겁하다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미카엘은 동요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여기는 안 되겠군. 너무 위험하다.”

레티시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네요. 차라리, 황궁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어요.”

미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의 시선에서 레티시아가 벗어난다면, 최악의 수가 될 것이다.

“소용없어. 네 집까지 찾아왔는데, 어디든 찾아갈 수 있다고 보는 게 맞다.”

“…….”

“네가 꺼려 한다는 건 알겠지만… 오늘은 내 침실에 있는 게 좋겠다. 괜찮은가?”

미카엘은 조심스럽게 레티시아의 의향을 물었다.

몇 년 전, 그가 그녀를 침실에서 재웠을 때 일어났던 파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손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겠다. 단지, 안전을 위해서…….”

“알았어요.”

미카엘은 잠시 귀를 의심했다.

레티시아는 그런 그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한 눈치였다.

“어쩔 수가 없네요. 그래도, 들키지는 않게 해 주세요. 시끄러워지는 건 싫으니까.”

“최대한 노력하겠다.”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손을 잡았다.

레티시아는 그를 밀어 내거나, 혹은 근래 보여 주었던 모습처럼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는 대신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미소가, 자신의 것이라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미카엘.”

레티시아의 목소리가 다시금 그의 귓가를 스쳤다.

미카엘은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다는 황홀한 사실에 잠시 취해 있다가, 이어지는 레티시아의 말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고마워요. 전부 다.”

“…….”

미카엘은 바보처럼 그녀에게 무엇이 고마운지 묻지 않았다.

자신이 여태까지 레티시아에게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가 소소한 일상에서, 자신에게 얻어 간 것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 * *

레티시아는 몸을 일으켰다.

싸늘한 냉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그사이 미카엘이 자신을 방으로 옮겨 주었던 모양이었다.

깨워서 이동했으면 굳이 힘들여 옮길 필요가 없었겠지만, 그런 사소한 것까지 자신을 배려해 주는 게 미카엘다웠다.

‘……?’

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건 익숙한 자신의 침실도 미카엘의 침실도 아닌 차가운 외벽이었다.

잠이 퍼뜩 달아났다.

“이, 무슨……. 미카엘?”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소리쳐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어딘가 눈에 익은 광경을 발견했다.

돌 부스러기.

사방에 돌 부스러기가 보였다.

돌벽과 바닥에 난 손톱자국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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