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이따금, 미카엘은 생각했다.
레티시아에게는 항상 보이지 않는 날이 숨어 있다고.
부드럽기만 한 붉은 머리칼, 금방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 같은 금빛 눈, 자칫했다간 부러질까 걱정스러운 가냘픈 몸매는 항상 그녀가 보호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꼿꼿한 자세로 일에 열중하는 레티시아를 본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녀가 보호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미카엘은 언젠가 그 시퍼런 날이 자신을 향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레티시아를 붙잡았다.
그래도 좋았다.
자신을 찔러 올 날도, 레티시아의 일부였으니까.
그 날이 자신을 향할 때가 온다면 미카엘은 기꺼이 모든 걸 내어 줄 생각이었다.
‘네가 진실을 알게 되는 날이, 바로 그날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카엘은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레티시아에게 미안해서라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는 말들이었다.
레티시아는 그가 그동안 얼마나 그녀를 기만해 왔는지 알았음에도 미카엘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
미카엘은 귓가를 매만졌다.
그를 사랑한다는, 그 황홀한 한마디를 들었던 순간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서.
지난 몇 년간, 미카엘이 꿈꾸는 몽상의 주인은 항상 레티시아였다.
그러나 몽상 속의 레티시아조차도 그에게 사랑한다 말한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어떻게 감히 레티시아를 상대로 그런 상상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그를 사랑한다고 말해 왔을 때, 일순간 금방 사라질 백일몽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과 품 안에서 부서질 것처럼 가냘픈 몸이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레티시아.’
미카엘은 폭신한 이불에 잠겨 곤히 잠에 빠진 레티시아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 자신은 바닥에 앉은 상태였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값비싼 카펫이 깔려 있을뿐더러,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잠이 오지 않았기에.
레티시아는 자신이 소파에서 자겠다고 했으나, 미카엘은 연인을 소파에서 재우는 볼썽사나운 남자가 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연인이라는 단어에 레티시아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반박은 들려오지 않았다.
미카엘은 잠에 빠진 레티시아를 감히 만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숨죽여 지켜보기만 했다.
귓가에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가 그녀를 깨울까 봐 지레 겁먹으면서.
그의 눈이 피곤에 항복하여 스르륵 감긴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작은 종이 울렸다.
대부분의 경우 미카엘은 스스로 깨어났지만, 늦잠으로 인한 정무 방해를 방지하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일반적인 귀족들은 당연히 시종 혹은 시녀가 깨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미카엘의 방에 그를 깨우러 들어온 사용인은 독 바른 비수를 꺼내 들어 미카엘을 죽이려 들거나, 아니면 미카엘의 지나치게 민감한 감각 탓에 멀쩡한 사용인을 잠 중에 공격하는 일들이 일어났기에 황실 기술자들은 기묘한 장치를 구상했다.
바로 매일 한 번, 미카엘이 지정해 놓은 시간에 맞추어 시끄럽게 울리는 종이었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괘종시계의 원리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황실 기술자들은 특별한 기능을 하나 발명해 냈다.
바로 종을 손으로 치기 전까지는 울림을 멈추지 않는 기능이었다.
보통 종소리를 듣고 일어났다는 건, 극도로 피곤한 데다 이후 일정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기에 미카엘은 시끄럽게 울려 대는 댕댕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계속 잠자곤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레티시아가 놀라겠지.’
카펫에 앉아, 침대에 머리를 누인 채로 잠에 빠져들었던 미카엘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종은 침대 머리맡에 있으니, 레티시아가 깨기 전에 재빨리 두들겨 멈출 생각이었다.
‘……?’
종을 향해 뻗어 가던 손이 뻣뻣이 아래로 떨어졌다.
분명 잠이 들기 전까지만 해도 침대에 평온하게 누워 있던 레티시아는,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사람이 자연스럽게 일어난 듯한 자국만이 시트에 남아 있을 뿐.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알았다.
그녀는 항상 일어나면 이부자리를 깨끗이 정돈했다. 더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지위와 부를 손에 넣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바닥에서 불편하게 잠든 그를 깨우지 않을 성정 역시 아니었다.
댕댕댕댕…….
종은 계속 정신 사나운 금속성 음을 울려 대고 있었다.
그 종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숨이 가빠졌다.
미카엘은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침실은 특별한 장치가 되어 있었기에 함부로 남이 드나들 수 없었다.
비밀 통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유일한 용의자가 범인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레토 바틀렛.’
미카엘은 이마를 짚었다.
손에서 뛰는 고동이 이마로 전해져 왔다.
미카엘은 레토 바틀렛이 비밀 통로의 침입자들을 잡아먹는 거미가 되기를 원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실패한 계획은 아니었다. 레토 바틀렛은 정말로 그런 존재가 되었으니까. 인간이라기보단 악마에 가까운 존재가…….
미카엘은 고대 마법으로 레토 바틀렛을 황궁의 미로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죽느냐, 아니면 질긴 생명력과 집념으로 살아남느냐는 오직 레토 바틀렛에게 달린 문제였다.
황궁의 비밀 통로를 통해 움직이던 암살자들이 순식간에 전멸당했을 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은 계획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레티시아가, 공격당하기 전까지는.
레토 바틀렛의 집념은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성공시켰다.
비록 본체는 영원히 성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으나 비밀 통로의 일부분으로 만든 분신들은 밖을 자유로이 나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분신들은 인간이라기보단 무생물이었기에 인간을 위해 고안한 각종 함정을 손쉽게 빠져나갔다.
‘내 잘못이다.’
미카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루드밀라가 비밀리에 연구 중인 레토 바틀렛을 완벽하게 소멸시키기 위한 장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간 레토 바틀렛의 목숨을 끊을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그 기회를 모두 마다한 채 레토 바틀렛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들어 버린 건 전적으로 미카엘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 벌을 받는 것일지도.’
그동안 이 자리에 서기 위해, 그리고 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몇 번이나 비슷한 행위를 저질러 왔다.
어쩌면 인간보다 못한 존재는 레토 바틀렛이 아니라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카엘은 멈출 수 없었다.
제국의 황제는 착하고 유순하며 올바른 존재를 위한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레티시아를 살리기 위해 황좌에 앉았고, 그녀를 붙잡기 위해 황좌에 머물렀으며 지금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 황좌를 지켜야만 했다.
계속해서 방 안을 살피던 미카엘의 시야에, 얼핏 보면 먼지와 비슷한 돌 부스러기 몇 점이 눈에 들어왔다. 만약 평범한 공간이었다면 먼지라 생각해 지나쳤을 법할 정도로 평범하고 특색이 없었으나, 이곳은 황제의 침실. 먼지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미카엘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범인은 흔적을 숨기려 했다.
그 말인즉슨, 저 흔적이 결코 함정이나 속임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발걸음을 내딛는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의 입가에 서늘한 살기가 어렸다.
* * *
“미카엘!”
레티시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상황을 파악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레토 바틀렛이 자신을 납치했다.
그렇다면, 미카엘은?
레티시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간을 탐색했지만, 미카엘의 모습은커녕 그 어떤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돌벽의 냉기만 전해져 올 뿐.
‘…미로구나.’
그것도 황궁 가장 깊숙한 미로 중 하나에, 그녀가 와 있었다.
햇빛이 아닌 어슴푸레한 빛이 공간을 가득 메운 건 제국의 깊은 지하에서만 자라나는 특수한 곰팡이 때문이었다.
레티시아는 눈을 감고 이마를 돌벽에 기대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황궁의 미로를 열심히 외워 둘 걸 그랬다. 하지만 자신은 여태까지 미카엘에게만 의지했을 뿐, 미로를 스스로 익힐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미로를 익히고 그 구조를 외운다는 건, 애정 혹은 절박함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애정이야 있을 리가 없었고 절박함은…….
입술이 바싹 말라 왔다.
그간 자신은 미카엘의 절반만이라도 절박했던가?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살리기 위해 불행 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졌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그 많은 시간 동안 미카엘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을 뿐이었다.
실은 그 반대였음에도 불구하고!
‘…….’
레티시아는 돌벽에서 떨어졌다.
때늦은 후회를 할 시간은 차고 넘친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머리를 비우고,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을 때였다.
‘레토 바틀렛은 나를 죽일 생각은 없어.’
하지만 일전에 그녀를 성급하게 회유하려다 실패한 것과 같은 실수를 다시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미끼구나.’
씁쓸한 깨달음이 그를 덮쳤다.
레티시아는 미끼였다. 미카엘을 이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더욱 씁쓸한 건, 미끼임을 자각했는데도 미카엘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나는 이곳에서 혼자 빠져나가지는 못해.’
섣불리 움직였다간 도리어 레토 바틀렛의 의도대로 움직여서, 더욱더 미카엘을 곤란하게 만들 가능성도 컸다.
‘미카엘은 날 구하러 올 거야. 그때 최대한 도움이 되어야 해.’
레티시아는 처음 자신이 일어났던 공간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몇 발자국 움직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레티시아가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피가 얼어붙었다.
온 본능이 지금 이곳에서 달아나라 외쳤다.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닌 기척과, 인간이 뿜어낼 수가 없는 냉기가 그녀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고 있었다.
선호작품 등록/취소
알림 등록/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