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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106/150)

106화

레티시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당연히 호신용 무기는 지니지 않았고, 잠옷 안주머니에 넣어 둔 브로치도 레토 바틀렛이 의도적으로 빼내었는지 보이지 않았으나 상대의 의도대로 도망칠 순 없었다.

그녀는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작은 방 크기의 공터에, 통로가 다섯.

레티시아는 황궁의 미로들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미카엘을 따라서 수십 번을 다녔기에 기본적인 지식은 있었다.

이 많은 길들 중 출구로 향하는 통로는 많아야 둘일 것이다.

그리고 저 중 그 어떤 길이든 레토 바틀렛이 그녀보다 훨씬 잘 알고 있을 것이고.

‘…….’

레티시아는 인정했다.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걸 제외하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레토 바틀렛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레티시아는 자신의 집에서 마주쳤던 그 레토 바틀렛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미카엘의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하얗게 서린 머리카락, 핏기가 완전히 빠져나가 인간의 피부라기보단 대리석처럼 느껴지는 창백한 얼굴, 무엇보다도 그 몸.

레티시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레토 바틀렛은 더는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지 않았다.

켜켜이 쌓인 석회가 그의 몸 전체를 감싸고 있어 레토 바틀렛은 인간이라기보단 석회석 조각상이라도 된 듯한 모습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이 레토 바틀렛이 진짜였다.

‘인간이… 아니야.’

레티시아는 의연하게 버티려 했지만 본능적으로 뒤로 뒷걸음칠 수밖에 없었다.

레티시아는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온몸이 공포로 얼어붙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레토 바틀렛이 그녀를 이곳으로 납치한 이유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미카엘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

그 미끼를 이렇게 찾아온다는 건, 레티시아에게 무언가 원하는 바가 있다는 뜻이리라.

‘아니면…….’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면, 단순히 미카엘을 이끌어 낸다는 역할을 이미 달성했기 때문에 이번에야말로 그녀의 몸을 빼앗으려고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레티시아는 그 가능성은 제법 적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를 죽이거나 몸을 훔칠 기회는 이미 자고 있을 때 충분히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 한들 레티시아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무력감이 레티시아를 사로잡았다.

그간 암살자들에게 당하기만 했을 때에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눈앞의 레토 바틀렛은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그 무언가였다.

‘대체 어쩌다가……?’

미카엘이 레토 바틀렛이 이렇게 된 원인이 그 자신의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물론 레티시아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미카엘은 항상 그의 잘못이 아닌 것들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곤 했으니까.

“도망치지 않는군.”

모골이 송연했다.

레토 바틀렛의 말은 그의 입처럼 보이는 기관에서 나오지 않았다.

바닥과 천장, 그리고 돌벽이 하나가 되어 말소리를 만들어 냈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대답했다.

조용히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지만,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도망쳐 봤자 붙잡힐 테니까.”

당황스럽게도, 돌아온 건 웃음소리였다. 벽을 긁는 듯한 웃음소리는 한동안 울리더니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레티시아는 끼쳐 오는 소름을 버텨 내려 애썼다.

그다지 소용은 없었지만.

“역시 현명해.”

“…….”

“지금 역시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겠지. 내가 빈틈을 보일 때만 기다리면서.”

“…….”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여.”

“…원하는 게 뭐지?”

“네 모든 것.”

레토 바틀렛의 그 말 한마디가, 사방에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레티시아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 냈다. 그녀는 무심코 벽에 몸을 기대었다가, 사람의 온기를 거부하듯 밀어 내는 진동에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그 말인즉슨, 레토 바틀렛과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레티시아는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내 몸을 빼앗을 생각이라면, 최악의 판단이야. 미카엘은 네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자마자 바로 죽여 버릴 테니까.”

“설마.”

레토 바틀렛이 눈을 치켜떴다.

“내가 그렇게 멍청하게 보이나?”

그는 레티시아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레티시아 우즈, 나는 그자가 나와 같은 고통을 맛보기를 원한다.”

“…미카엘을…….”

“그자를 나와 같이? 나쁜 생각은 아니군. 아니, 이미 해 보았던 생각이기도 하다.”

레토 바틀렛은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자는 너무 강하지.”

레티시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눈앞의 인간 아닌 존재가 암시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나를.”

“그래.”

레토 바틀렛의 한때 입이었던 기관이 호선을 그렸다.

“널, 내 동료로 만들 테다.”

레티시아는 뒤로 물러나다 돌벽에 부딪혔다. 돌벽이 성이 난 것처럼 진동했지만 레토 바틀렛과 가까워지는 것보다야 나았다.

저 인간 아닌 존재와……!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레티시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된 자신도 이성만 살아 있다면 미카엘의 곁에 머무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레티시아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는 레토 바틀렛의 말을 들었을 때, 엄습하는 공포와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어서라도 미카엘 곁에 남아 있고자 하는 욕망이라니.

“…나는, 너와 달라.”

레티시아는 간신히 한 음절 한 음절을 뱉어 냈다.

“나는 너처럼 되어도… 결코 미카엘을 해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 또한…….”

“네가 어떻게 움직이든 내 알 바가 아니다.”

레토 바틀렛이 쉭쉭거리는 소리를 냈다.

“단지 레티시아 우즈, 네가 나와 같은 존재가 되어 이 어둠 속에서 영원히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레토 바틀렛의 말에 숨겨진 의미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라니.’

그건 레토 바틀렛 스스로가 죽음을 원한다는 뜻이 아닌가.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레토 바틀렛을 죽일 방법이 없다고 한 말을 떠올렸다.

최근 들어 무언가 다른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보고를 받을 때마다 늘 얼굴을 찌푸렸기 때문에 마음처럼 잘되고 있지 않은 듯했다.

“…죽고 싶은 거군요, 당신은.”

레티시아가 다시 존칭을 쓰기 시작한 건, 레토 바틀렛에 대한 혐오감이 누그러졌다거나 그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레티시아는 되새기고 싶었다. 그와 자신은 다르다는 걸, 이다지도 다른 존재이면 자신은 결코 그와 같은 존재가 되지 않으리라는 걸…….

침묵이 흘렀다.

레토 바틀렛은 석회 낀 손을 내밀었다. 레티시아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물러날 곳이 없었기도 했지만, 도망치다 잡힌 작은 동물 같은 형색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차가운 이물질이 레티시아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참 신기하지.”

레토 바틀렛의 목소리가 공기를 긁었다.

“너와 난 이렇게나 다른데……. 어떻게 나를 잘 알지?”

“…….”

“그래. 나는 죽음을 원한다. 이제는 알겠어. 죽음보다 더 못한 게 있다는 사실을…….”

“어쩌다가.”

레티시아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된 건가요?”

“…….”

레토 바틀렛의 석회 낀 눈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알게 될 거다. 곧.”

바로 그 순간,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레티시아는 비명을 지르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이내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돌가루에 숨이 막히고 말았다.

저항도 잠시, 숨이 막힌 레티시아의 몸은 금세 축 늘어져 쓰러지고 말았다.

어둠이 통로에 깊게 내려앉았다.

* * *

레티시아는 바닥에서 허우적대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안… 죽었어.’

그녀는 황급히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다행히 석회에 깊게 잠겼다 빠져나온 것처럼 돌가루들이 사방에 묻어 있을 뿐, 레토 바틀렛처럼 인간이 아닌 몰골로 변화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세차게 깜박여 눈에 고여 있던 석회도 털어 냈다.

주위를 살펴보니, 이곳은 아까 그들이 있던 장소와 사뭇 다른 새로운 공간이었다.

‘……!’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너무나 익숙한 문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틈새 사이로 대낮의 따스한 햇볕이 스며드는 문이…….

그녀는 당장 달려가서 문을 열려다가, 이것이 레토 바틀렛의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레토 바틀렛.”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떻게 한담.’

그녀는 문에서 몇 발자국 떨어졌다. 자신이 그동안 역경을 조금만 덜 겪었더라면 덜컥 문을 열고도 남았겠지만, 황궁에서의 10년은 레티시아에게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너무나 쉽게 찾아온 출구는 의심하라는 사실을.

하지만 동시에,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교훈 역시 안겨 준 게 지난 세월이었다.

레티시아는 문을 열었다.

어차피 머물러도 레토 바틀렛의 손아귀, 출구로 나간다 한들 함정이라면 나가는 게 낫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레티시아는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눈을 깜박였다.

왜인지는 몰라도 정말로 레토 바틀렛은 그녀를 풀어 준 듯했다.

레티시아는 서둘러 복도로 나섰다.

자신을 놓아주었다는 사실은 단 한가지만을 의미했다.

미카엘을 손에 넣어, 그녀에게 더 이상 흥미가 없어졌다는 것.

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걸음을 재촉하며 복도의 모서리를 돌다가 한 하녀와 거의 부딪칠 뻔했다.

“꺄아아악!”

하녀가 비명을 질렀다.

엄살이 제법 심하다는 생각을 하려던 찰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뒤로 기다시피 물러나는 하녀의 목소리가 레티시아의 가슴에 칼날처럼 박혔다.

“괴,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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