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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108/150)

108화

‘잘못… 잘못 들었겠지.’

레티시아는 다시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귀를 감쌌다.

가슴이 쓰라렸다.

미카엘이 그녀를 알아보았을 리가 없다. 지금 이 괴물의 모습 속에 갇힌 자신을……!

조금 전 거울 속 비친 모습을 보았을 때가 눈에 선했다. 레토 바틀렛은 잔인하게도 그녀를 제국에 존재하지 않는 맹수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다. 누가 보아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 야수로…….

오직, 그녀 자신만 제외하고는.

차라리 자신에게도 맹수로 보인다면 상황은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레티시아의 눈에는 이리저리 멍들고 흉이 진 가느다란 다리와 너덜너덜한 옷자락, 연약한 손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 괴리감이 레티시아를 미치게 만들었다.

레티시아는 그녀 자신에게는 가녀린 손가락으로만 보이는 손 틈 사이로 미카엘을 훔쳐보았다.

문가에 못 박힌 듯 선 미카엘은,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는 들리지 않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마침내, 그가 움직였다.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더는 미카엘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괴물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그 시선을…….

하지만 레티시아의 귓가에 다시금 들린 건 달콤한 목소리였다.

“…레티시아.”

레티시아는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에는 분명히 착각이 아니었다. 두 번이나 잘못 들을 수는 없다.

미카엘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단번에.

“미카엘.”

레티시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미, 미카엘…….”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의 자물쇠가 열렸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차마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미카엘이 지금 그녀를 그녀 본연의 모습으로 봐 주는 이 기적이 사라질까 봐 두려웠기에.

하지만 미카엘은 성큼 다가와서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

목이 메어 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레티시아가 자신이 단순히 괴물로 보이는 환상에 걸린 게 아니라, 괴물로 변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신체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움직였고 또한 감각 또한 이전과 달랐다. 무엇보다도 통각이 거세라도 된 것처럼 고통이 느껴져야 할 때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목에 느껴지는 이 따끔거림은 무엇이란 말인가.

“꿈… 꿈은 아니죠?”

“꿈이 아니야.”

미카엘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어서 미안하다, 레티시아.”

“…….”

레티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울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는데, 자신의 몰골을 생각했을 때 그것만큼 끔찍한 것도 없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녀는 간절한 희망을 하나 담아 입을 열었다.

“저… 어떻게 보이나요?”

레티시아는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미카엘의 눈이 확연히 흔들렸기에.

레티시아는 눈을 감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냥, 너야.”

하지만 미카엘의 입에서 나온 답은 그녀가 예상한 그 무엇도 아니었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라니.”

미카엘이 조용히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레티시아의 눈에는 평소 자신의 머리칼로 보였지만 남들에겐 흉측한 맹수의 갈기 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그 머리칼을.

레티시아는 조심스레 팔을 내밀어 미카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만에 하나라도 미카엘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미카엘이 본능적으로 그녀에게서 뒤로 물러서며 어깨를 매만졌다.

“……!”

레티시아의 눈이 공포에 질렸다. 미카엘이 입고 있는 상의의 어깨 부분이 그대로 찢겨 나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손으로 그 부분들을 가려 낸 이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한 어조로 레티시아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라.”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 그냥…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괴물이 아니라고…….”

“당연히 괴물이 아니지.”

“아뇨.”

레티시아는 이제, 그동안 자신이 눈을 막고 귀를 막던 냉엄한 진실들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는 아무리 좋게 쳐 줘도 사람의 음성이 아닌, 짐승의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아주 집중해서 들어야 부분 부분 낱말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미카엘은 그 파편들로 레티시아와 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레티시아의 눈을 가린 환상은 아직 그녀가 보고 싶어 하는, 본디의 여린 몸을 보여 줄지 몰라도 차가워진 머리는 본디의 진실을 보여 주었다.

레티시아는 자신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았다. 절대 사람의 형상을 띠고 있지 않은 그림자는, 미카엘이 바닥에 내려 둔 등불을 타고 거대하게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웅크리고 있던 자리는 어떻고.

돌바닥은 육중한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그새 군데군데 깨어졌고, 발톱 자국도 보였다.

레티시아는 눈을 비볐다.

자신은 정말로 괴물이었다.

미카엘의 곁에 어울리지 않는.

만약 그가 그녀를 이곳에서 구해 주기 위해 이 괴물이 레티시아 우즈이며 극진히 대우하라고 명한다면 모두가 미카엘을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차라리, 나를 못 알아보는 게 나았어.’

레티시아는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짐승인 체할 걸 그랬다. 미카엘이 대체 어떻게 자신을 알아보았는지는 몰라도, 시치미를 떼고 이성을 잃은 야수로 행세해야 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진실에서 눈을 가리고 본디의 모습인 것처럼 미카엘을 부르고, 반가워하고, 급기야 그에게 상처도 입혔다.

“레티시아, 네가 뭘 생각하는지 안다. 하지만 이건 레토 바틀렛의 술수일 뿐이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

“그걸 누가 믿을까요?”

“믿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아. 그게 사실이라는 게 중요하지.”

“…위험해요.”

“나는 이보다 훨씬 위험한 일들을 해 왔어.”

레티시아는 반박할 수 없었다.

당장 미카엘은 그녀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황제가 되었다.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게 세상에 어디 있다는 말인가.

미카엘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레티시아는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미카엘의 저 강인해 보이는 손이 야수의 발톱 아래 무참히 찢기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를 알았는지, 미카엘은 조용히 그 자신의 손을 뒤로 물렸다.

“일단, 여기에서는 나가야겠군.”

“…나가지 않겠어요.”

“레티시아.”

“여기가 제게 맞아요. 나가면… 마법을 풀 기회조차 사라질 거라고요. 그걸 왜 생각을 못 하세요?”

레티시아는 답답한 나머지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미카엘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한들 상관없었다. 정확한 말이 그대로 전달되지는 않을지 몰라도 치밀어 오르는 울분은 그대로 전달될 테니까.

레티시아는 속에 있는 감정들을 그대로 토로했다.

“저는 어떻게 되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폐하께서…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요.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상황인데!”

레티시아는 아직도 소설 속 미카엘이 어떻게 죽었는지 잊지 않았다.

그는 병으로도, 전쟁으로도 죽지 않았다.

황실 암투에 밀려 죽은 많은 황제들처럼 암살로 목숨을 잃었다.

황권이 강건할 때에야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자신의 존재가 미카엘을 그러한 상황으로 밀어 넣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약점?

미카엘은 그 자신의 약점 정도는 지킬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평판?

황제에게 사람이 좋다는 건 칭찬이 아니다. 냉혹하고 비정하다는 미카엘의 수식어야말로 최고의 찬사였다.

하지만 평판을 망가뜨리면서 미카엘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약점이 나타난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 약점이 자신이라면…….

레티시아는 도저히 그 상황을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미카엘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레티시아가 쏟아 낸 말들은 그저 짐승의 포효처럼 들렸던 모양이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에게서 최대한 물러났다. 원인은 자신이었으니, 그를 탓하는 것도 미련한 짓이었다.

나가지 않겠다는 의사만 표현된다면 그걸로 족했다.

어차피 자신 같은 맹수를 어떻게 억지로 옮기겠는가.

이곳 역시 그녀가 순순히 끌려오지 않았더라면 칼로 찔러 죽여 고깃덩어리로 분해한 다음에야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미카엘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레티시아, 나는 네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낼 생각이 없어. 그런 목적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레티시아의 입이 바싹 말랐다.

자신의 정체를 알릴 생각이 없다면, 답은 하나다.

미카엘은 그녀를 놓아주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 그게 차라리 나을지도 몰라.’

레티시아 역시 이 차갑고 축축한 지하 감옥에 사는 게 달갑지는 않았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어디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 사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미카엘은 이번에도 레티시아의 예상을 완전히 깨트렸다.

“황태자 궁으로 가자. 정화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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