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레티시아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정화라니.’
황태자 궁과 정화라는 말은, 그간 그녀가 잊고 있었던 먼 옛날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대리석 바닥과 거울처럼 맑은 호수, 티 한 점 없이 투명한 유리 천장.
‘아…….’
레티시아는 눈을 감았다.
그날, 어렸던 자신의 눈에 비친 미카엘의 모습과 마치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정소가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랐다.
지금 자신의 몰골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황궁의 지하 감옥.
비밀 통로를 도무지 통과할 수 없는 모습으로 그곳까지 간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불가능해요.”
“가능해, 레티시아.”
“이 몸으로, 어떻게……!”
절망한 레티시아의 목에서 반쯤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미카엘이 그녀를 일으켰다. 레티시아는 그를 상처 입힐까 봐 두려워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지만, 미카엘이 강한 힘으로 그녀를 끌어당겨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갈 수 있어.”
미카엘이 힘을 주어 말했다.
“날 믿어.”
레티시아는 당연히 미카엘을 믿지 않았다. 어떻게 믿겠는가?
그는 신도 마법사도 아닌데.
하지만 레티시아는 더는 반박하지 않고 미카엘을 조용히 따랐다. 어차피 어디에 있든 비참하기만 할 뿐이다. 미카엘이 바라는 대로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행히 이곳으로 끌려올 당시, 그녀가 저항을 더 하지 않은 탓에 다른 구속 장치는 되어 있지 않았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점은, 적어도 미카엘이 그녀를 혐오스럽게 바라보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그 어떤 얼토당토않은 계획을 내세우든 따라나설 생각이었다.
“어떻게요?”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추궁하려는 게 아니었다. 단지 그의 계획을 묻고 최대한 협조하기 위해 물었을 뿐이었다.
물론 미카엘에게는, 전자의 의미로 들렸겠지만. 그래서인지 미카엘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갈기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통할지 몰라서 아직은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올게.”
미카엘은 등불을 우리 앞에 내려다 놓고 나갔지만, 그의 존재가 사라짐과 동시에 어둠이 방을 지배하는 듯했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의 짧은 시간은 가히 레티시아의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라고 할 만했다.
만약 미카엘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레티시아는 눈을 감았다.
‘믿어야 해.’
그녀는 결코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직접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최소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미카엘을 도우려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미카엘을 돕는 유일한 방법은 그저 가만히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무력감이 레티시아를 지배했다.
이전까지와는 달랐다. 기존의 무력함은, 레티시아가 이겨 낼 수 있는 종류였다. 그 무력함을 안고 나름의 역할을 찾을 수 있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레티시아는 울고 싶었으나,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져 사람들이 달려올 것이 걱정되어 신음 소리 한번 내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미카엘이 돌아왔다.
그 어떠한 장비나 도구, 혹은 조력자도 없이 그 혼자서.
레티시아는 벌떡 일어서다 큰 소리가 나자 지레 겁먹고 뒤로 물러섰다. 미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없다. 밖에 아무도 없으니.”
“사람을 물리셨어요?”
“그래. 성 전부에.”
“……!”
그제야 레티시아는 왜 이렇게 미카엘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이럴 때 아니면, 내 이름을 어디에 쓰겠어.”
미카엘이 웃었다.
“황태자 궁도 모두 비웠다.”
“하지만 모두가… 미쳤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게 무슨 상관이지?”
“…미카엘.”
“어차피 나는 미쳤다는 소리를 어린 시절 내내 들었어. 즉위 후엔 피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지. 조금 더 듣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달라요.”
레티시아는 천천히 반박했다.
“그때 미카엘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많아요.”
“없다.”
“네?”
“없어.”
미카엘은 고집스럽게 한마디만 내뱉을 뿐이었다.
“왜 없어요!”
레티시아는 나지막하게 부르짖었다. 지금 이 순간마저 큰 소리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미카엘을 선망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레티시아.”
미카엘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레티시아에게는 자신의 자그마한 입을 미카엘이 큰 손으로 막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상은 그 반대이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차마 그를 제압하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을 다 합친 것보다, 네가 소중해.”
“…….”
“가자. 시간이 그리 많지가 않으니. 나도 그렇게 생각이 없는 황제는 아니라서, 잠깐만 물렸다.”
“…네.”
레티시아는 빠르게 미카엘을 따라나섰다. 마음만 먹으면 이 몸으로 얼마든지 빠르게 달릴 수 있었기에, 그들은 금방 황태자 궁의 정원에 도착했다.
가는 길은 미카엘이 말한 대로 사람 한 명 없이 적막했다.
‘…….’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레티시아는 더는 여타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몸을 되돌리는 일이었고, 그녀를 위해 미카엘이 다소 위험한 일을 했다고 하여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황태자 궁의 입구로 향하려는 레티시아를 미카엘이 제지했다.
‘……?’
레티시아는 가만히 멈춰 섰다. 아마도 다른 통로를 이용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미카엘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대신 그들이 있는 자리에 칼을 찔러 넣었다.
“미카엘……?”
레티시아는 조용히 그를 불렀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미카엘은 계속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을 찔렀는데, 그 모습은 마치 바닥에 숨은 적을 사살하는 냉엄한 군인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레티시아는 반쯤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쾅!
굉음과 함께 거대한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질 때까지.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레티시아의 눈에 어린 시절 단 한 번 보았던 바로 그 장소가 보였다.
정소는 더 이상 기억 속의 포근한 공간이 아니었다. 거대한 호수는 위압적인 심연처럼 느껴졌으며 유리 천장엔 방금 그들이 떨어지며 낸 구멍이 뻥 뚫린 채였다.
공간의 모든 요소들이 그들을 침입자로 인식하고 적대감을 띠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망설이지 않고 호수로 몸을 던졌다.
이 추악한 마법을 자신에게서 벗겨 낼 수 있다면, 타오르는 불길에라도 몸을 밀어 넣을 자신이 있었다.
‘……!’
숨이 막혀 왔다.
‘달라!’
호수가 그녀를 전력으로 밀어 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레티시아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숨을 헐떡이고, 몸을 크게 뒤틀었다.
하지만 그중 무엇 하나 효과가 있는 게 없었다.
레티시아가 죽음을 맞이할 때, 크게 뜬 눈에 비친 건 그녀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어들어 오는 미카엘이었다.
그녀는 살이 찢겨 나가는 고통과 공포 속에서 생각했다.
나름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고.
* * *
미카엘은 쓰러진 레티시아를 품에 안은 채, 한참 동안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정화 과정을 거치고 본디의 모습으로 돌아온 레티시아는 도통 의식을 차리지 못했지만 맥박과 숨소리가 일정한 걸 보니 걱정할 상황은 아니었다.
‘…….’
미카엘은 숨을 죽인 채 레티시아의 매끄러운 머리칼을 매만졌다.
정소는 레티시아를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게 가꾸어 놓았지만, 미카엘의 눈에 비치는 레티시아는 항상 이토록 아름다웠다.
하지만 미카엘은 알았다.
자신의 품 안에서 여느 때와 같은 모습으로 평온하게 숨 쉬고 있는 레티시아는 결코 이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레토 바틀렛의 추악한 마법 때문에, 믿었던 자들과 공간이 모두 그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경험을 했다.
그런 레티시아가, 다시 예전처럼 밝고 스스럼없이 웃을 수 있을까?
미카엘은 여태까지 그 앞에서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자들을 많이 봐 왔다.
이제 그런 하찮은 이들은 그에게 타격 하나 주지 못했지만, 그 과정을 고스란히 봐 왔던 레티시아가 가슴앓이를 했던 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겪은 일에 대해서도 그렇게 반응하는데, 실제 그녀 자신에게 인간 전체를 불신하고도 남을 만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세상을 원망한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미카엘은 고개를 숙여 레티시아의 이마에 맞댔다.
레티시아의 온기가 자신에게로 옮아오는 듯했다.
미카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결정은 끝났다.
“널… 이렇게 만든 자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 자체가 그 자신의 책임이었다.
‘내가 너무 물렀다.’
여태까지 그는 행동하기에 앞서 인과적으로 뒤따를 여러 결과들을 생각한 다음에야 움직였다.
자연히 여러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제국의 황제였기에.
하지만 이 관이, 저 높은 황좌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레티시아가 없다면 당장 재가 되어 무너져 버릴 것들에 불과한데.
미카엘은 맹세했다.
레티시아를 이 상황으로 몰아넣은 모든 것들을, 부수어 버리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