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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110/150)

110화

어둠.

레티시아는 불그스레한 빛 속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너무나 편안한 나머지 몸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 살이 뜯기던 고통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던 미카엘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미카엘!’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충격이 그녀를 덮쳤다.

레티시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 어둠에 무겁게 짓눌렸다.

“아…….”

레티시아의 입에서 흘러 나간 신음은 먹먹한 울림이 되어 되돌아왔다.

아무래도 아직도 물속인 모양이었다.

‘그럼 이건, 환각일까.’

레티시아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호수는 그녀가 격렬하게 반항할수록 잔인하게 몸을 찢어발겼다. 하지만 모든 걸 포기하는 순간 자신의 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은 것 역시 이 호수였다.

‘생각대로야.’

호수는 레티시아가 천천히 움직이자 그녀를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흔들림에 따라 부드럽게 움직여 주었다. 레티시아는 성급해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퍽 어려운 일이었는데, 애타게 그녀를 찾고 있을 미카엘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발을 동동 구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레티시아가 가장 먼저 한 건 자신의 모습을 살피는 일이었다.

‘다친 데는 없어.’

석회석 가루들은 흔적도 없이 씻겨 내려갔다. 군데군데 생겼던 생채기들도 멀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레티시아가 무엇보다도 알고 싶은 건 그런 사소한 사실들이 아니었다.

‘정화가 완료된 걸까.’

분명 자신은 죽음에 필적하는 고통을 맛보았다. 살이 뜯겨 나간 것 역시 정화라면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그림자를 보아야 해.’

움직임이 제약된 공간에서 믿을 건 오감밖에 없다. 하지만 불그스레한 빛은 그 어떤 그림자도 만들어 주지 않았으며, 레티시아는 자신의 실제 모습이 어떠할지에 대한 단서를 전혀 찾지 못했다.

레티시아는 발로 바닥을 천천히 내리찍었다.

바닥은 단단한 흙바닥이 아닌, 마치 물처럼 울렁였다.

‘역시.’

레티시아는 확신했다.

이 모든 건 정소가 그녀에게 보여 주는 환상이라고.

‘내가 아직 완전히 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가지 못하는 거야.’

레티시아는 전신을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그 어디에서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몸은 정화되었어. 남은 건…….’

정신이었다.

레토 바틀렛은 그녀의 정신마저 짐승의 그것으로 만들어 놓았던 게 틀림없었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미약한 저항이 느껴졌지만, 아까처럼 그녀를 극렬하게 공격하지는 않았다.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정소는 원하는 게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레티시아가 주기 전까지는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레티시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떻게 이걸 생각하지 못했지?’

레토 바틀렛은 당연히 악한 자였다.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단지 미카엘에게 고통을 주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그녀를 괴물로 만든 건 아니었다.

‘미카엘이야. 미카엘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지.’

악인과 인간이 아닌 존재는 엄연히 구별해야 한다. 레티시아는 괴물이 되어 보았기에 그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악인은 자신이 저지르는 행위 자체로 인해 비난받는다. 하지만 괴물은, 단지 그 존재만으로도 척결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건 아니야.’

레티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레토 바틀렛이 얼마나 악한 자든 간에, 미카엘은 그를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들어서는 안 되었다.

적으로서, 그리고 군주로서 죄인을 처형했어야 했다.

“미카엘.”

레티시아는 소리 내어 미카엘을 불렀다.

“당신이 잘못했어요.”

그때였다.

붉은 빛이, 눈이 따갑도록 쏟아지는 햇살로 바뀐 것은.

눈을 연거푸 깜박인 다음에야 겨우 형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레티시아!”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체취, 익숙한 품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레티시아는 손을 올려 미카엘의 얼굴을 매만졌다.

지금 자신의 손은 야수의 앞발이 아닌, 평범한 인간의 손이었다.

그 사실이 기쁘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입맛이 썼다.

“레티시아, 나는 네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줄 알고…….”

뜨거운 눈물이 레티시아의 손등을 타고 흘렀다. 미카엘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었다.

‘아니, 어린아이였던 시절에도 미카엘은 저렇게 울었던 적이 없어.’

레티시아는 애써 웃었다.

“괜찮아요. 봐요,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처음에는 금방 깨어날 줄 알았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일어나지 않길래……. 차라리 널, 그 상태로 두어야 했었다고 얼마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저는 죽더라도 돌아오고 싶었어요.”

레티시아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돌아오지 못할 바에야, 죽는 게 나았어요.”

미카엘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렇지 않다. 어떻게든 살아야 해. 네가 그 어떤 모습이든, 너는 너야.”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으니까요.”

미카엘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잘 들어, 레티시아. 이런 일은 언제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어. 그때마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건가?”

그 순간,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그녀와 미카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미카엘이 악해서 레토 바틀렛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든 게 아니라는 걸…….

미카엘에게 죽음은 곧 끝을 뜻했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살아남으면, 훗날을 도모할 수 있기에.

바로 그 이유 탓에 미카엘은 여태껏 숱하게 많은 정적의 목숨을 무자비하게 끊어 왔던 것이다.

하지만 레토 바틀렛만큼은 달랐다.

미카엘은 그를 살려 두어 화근을 남기면서까지 괴물로 만들었다.

‘대체, 왜?’

레티시아는 멍하니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호수에 푹 잠겼다 빠져나온 미카엘은 그 마법 덕에 빛으로 빚은 조각상처럼 보였지만,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항상 이렇게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레토 바틀렛을 왜 죽이지 않았죠?”

미카엘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시선을 피하며 뒤로 물러나려다 레티시아의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대답해 주세요.”

“그는 벌을 받아 마땅한 자였어.”

“폐하께선 항상 사형으로 단죄하시잖아요.”

레티시아는 일부러 미카엘의 지위를 강조하며 불렀다.

“…레티시아.”

“사적인 복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요. 폐하께선 겨우 그 정도 감정에 휘말리실 분이 아니니까.”

침묵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미카엘의 대답을 기다렸다.

미카엘의 의중과 진심을 추측하려고 노력하던 시절은 한참 전에 끝났다. 그는 한때 그녀의 상관이자 가족이었으나 지금은 동반자로서 함께 가시밭길을 걸어갈 연인이었다.

자신의 진지한 물음에는, 미카엘 역시 진지하게 답해 줄 것이다.

“그가, 열쇠야.”

미카엘은 입술을 짓이기듯 대답했다.

“열쇠……?”

“그래, 저 지긋지긋한… 암살자들을 막아 낼 열쇠.”

“……!”

“레티시아, 나는 너에게 안전한 황궁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통로들이 있는 이상 안전이라는 건 불가능해.”

“…….”

“그래서 그는… 거미가 될 예정이었지. 그 통로를 들락날락하는 모든 해충을 잡아먹는.”

“도구로 보신 거군요.”

입에서 쇳소리가 나왔다.

“…….”

“사람에게 할 짓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지. 이젠, 내가 당한 것들을 갚아 줄 때다.”

“미카엘!”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앞섶을 부여잡았다.

“왜 그랬어요? 이건, 미카엘의 방식이 아니잖아요. 다른 모든 걸 떠나… 위험해요. 그만한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고요.”

“널 사랑하니까.”

미카엘이 중얼거렸다.

가볍게 울린 말이었지만, 레티시아는 그 무게감에 짓눌려 주저앉고 싶었다.

“나도… 옳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것보단 네게 안전한 집을 준다는 게 더 중요했다. 널 위해서라면… 네가, 황궁을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라면 그깟 악인이 아니라 무고한 어린아이라도 희생시킬 수 있었어.”

“미카엘.”

결국, 레티시아는 바닥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자신이 누누이 미카엘에게 말해 왔던 것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미카엘이 싫은 게 아니라, 황실이 싫었다고. 언제 암살당할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하는 황궁이 싫었다고…….

그리고 미카엘은 바로 그런 그녀를 위해서 한 사람을 괴물로 만들었다.

만약 레티시아가 괴물이 되어 보지 않았고, 더 나아가 정소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이 사실을 평생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두 가지 모두 겪었다.

진실이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그 말이, 비겁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카엘의 곁에 있고 싶으면서도, 황궁은 싫다니.

미카엘은 황제이며 황제는 곧 황궁이나 다름없었다.

그 본인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말을 지속적으로 해 왔으니,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 한들 어떻게 미카엘을 탓하겠는가?

“다, 내 잘못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마저도 미카엘은 그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잡아당겨, 입으로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

미카엘은 처음에는 놀란 듯했지만 이내 그녀에게 호응하며 강렬하게 응답했다.

잠시 후.

레티시아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뒤로 물러나며 미카엘에게 쏘아붙였다.

“한 번만 더 본인 잘못이라고 해 봐요. 그 혀를 잘라 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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