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살벌한데.”
미카엘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왜 웃어요?”
“그냥.”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아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지만, 공작 영애라도 에스코트하는 것처럼 정중히 손을 청했다.
“멀쩡한 걸 보니 기쁘군요, 우즈 양. 함께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럼요. 그런데 정소는…….”
“걱정 마라.”
미카엘은 머리 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레티시아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
분명 그녀가 떨어지며 부서진 천장이 완벽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이곳은 절대 파괴되지 않아.”
“성소가 복구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이곳 역시 그러리라고 생각했어요.”
“이곳은 만물을 정화하지. 파괴 역시 정화한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아.”
“만물을 정화…….”
레티시아는 중얼거렸다.
미카엘의 말이 자신의 머리를 자극했다. 거의 다 맞추어 놓은 퍼즐에서 단 한 조각이 모자랐는데, 옆에서 건네주는 느낌이었다.
레티시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곳이 레토 바틀렛 역시 정화할까요?”
“안 돼.”
미카엘이 엄격하게 말했다.
언짢은 기색이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내비쳤다.
“그자에게 이곳을 알려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어차피 저 상태로 죽이지는 못하잖아요. 폐하께서 죽이시려 해도 정화를 거쳐야…….”
“아직 완성되려면 제법 멀었지만 연구 중이다. 그때까지 통로만 폐쇄하면 돼. 그러면 저 안에서 스스로 말라 죽을 수도 있겠지.”
“미카엘, 정말 레토 바틀렛이 폐쇄된 통로 밖으로 못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
“그자의 힘은 이미 우리를 능가해요. 저를 보셨잖아요. 그자가 어떤 존재인지…….”
“레티시아.”
미카엘이 조용히 말했다.
“그자는 음험하다. 인간으로 되돌아와 지금의 힘을 잃는다 한들 그 장소를 알게 되면 또 무슨 계책을 꾸미게 될지 몰라.”
“죽이셔야죠.”
“…레티시아.”
“왜요, 놀라셨어요?”
레티시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여태까지 자신은 미카엘의 학살을 반대한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먼저 형을 청한 적도 없었다.
레티시아가 살육을 끔찍이도 꺼려 한다는 건 굳이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도 알고 있는 황궁의 상식 중 하나였다.
“전 성녀는 아니에요.”
먼 옛날 제국에 나타났다는 성녀는 살생을 싫어해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그 어떤 이유라도 인간을 죽이는 건 금기였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물론, 사람을 죽이지 않고서도 문제를 해결할 무수한 방법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가로 미카엘의 목숨이 위험에 빠져야 한다면?
레티시아는 차마 그 꼴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아마 미카엘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성녀는 아니지만… 사람이 죽는 건 싫어하잖나.”
“레토 바틀렛은 죽기를 원해요.”
레티시아는 조용히 말했다.
“그를 이곳으로 데려와 인간으로 되돌리고, 목숨을 빼앗는 게 그를 위한 일이 될 거예요.”
“…정말로 그자가 죽음을 원한다고 생각하나?”
“네.”
침묵이 흘렀다.
대답을 고민하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대답을 밖으로 내뱉을지를 고민하는 데 걸린 침묵이었다.
“그자가 널 현혹시킨 거다.”
“미카엘, 절 그렇게 못 믿어요?”
“…….”
“저는 아주 멀쩡해요. 현혹되지도 않았고요. 그자가 저를 괴물로 만든 건… 괴물이 할 법한 짓이었죠. 하지만…….”
레티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게, 미카엘이 한 일을 되돌리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해요.”
“…….”
“미카엘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미카엘은 틀린 선택을 했어요. 자책하는 건 쓸데없는 일이지만 바로잡아야 할 건 바로잡아야죠.”
“나는 통로 자체를 폐쇄하려고…….”
“이미 레토 바틀렛은 성의 일부가 되었어요. 통로를 폐쇄한다면, 이 성 전체가 거대한 통로의 일부가 되지 않을까요?”
“…….”
미카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마침내 고집스러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여긴 너와 나만의 장소야. 그런 자를 들여서 더럽힐 수는 없다.”
레티시아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미카엘, 여기는 저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을 거예요!”
“아니야.”
“……?”
레티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먼 옛날 만들어진 비밀스러운 공간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장소 자체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통로는 내가 만들었다. 그 이전까지는 누구도 이곳으로 오는 길을 몰랐지.”
“하지만 그때, 미카엘은 겨우 열 살이었잖아요.”
미카엘이 웃었다.
“관습적으로 후계자에게 내려지는 마도구가 몇 개 있다. 사용법은 까다롭지만, 쓰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아.”
“잠깐만요. 그럼 다른 비밀 통로 중에서도…….”
“그래, 몇 개 뚫었지.”
레티시아는 할 말을 잃고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자신은 미카엘의 기이할 정도의 기억력이 타고난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비밀 통로를 직접 만들 정도의 전문가가 아닌가.
일순간 소름 끼치는 깨달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레토 바틀렛도 통로를 뚫을 줄 아는 건가요?”
“더 쉬울걸.”
“미카엘!”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레토 바틀렛을 저대로 방치한다는 건 안 될 말이었다.
“두더지 같은 작자다. 어둠 속에서는 제왕이지만, 밖에 나오면 눈이 멀어 어쩔 줄을 모르지.”
“미카엘.”
레티시아가 조용히 반박했다.
“어둠은 황궁 전체에 서려 있어요. 그 말대로라면… 이곳은 그자의 왕국이죠.”
“…….”
미카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도 왜 미카엘이 그자를 이곳에 데려오고 싶어 하지 않는지 충분히 이해해요. 저 또한… 미카엘의 상황이라면 그런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 같아요.”
“아니.”
미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너는 몰라…….”
“미카엘?”
“이곳의 한계 역시, 있다.”
미카엘이 지친 듯 눈을 감았다 떴다. 열대 바다처럼 일렁이는 눈 속에는 레티시아가 감히 추측할 수 없는 감정들이 넘실거렸다.
“마법은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도, 불가능하게도 하지. 그래서 가끔 잘못되면… 이곳에 던지는 방법밖에 없었다.”
“설마…….”
“이곳은 살아 있는 공간이다.”
“……!”
“감당이 안 될 것을 던지면 분노하더군. 한참이 지나면 회복하긴 하지만……. 레토 바틀렛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잠깐만요. 그러면 저 역시, 위험했던 건가요?”
“아니다!”
레티시아는 박력 있게 그녀의 양팔을 쥐어 오는 미카엘에 놀라 흠칫 떨며 뒤로 물러났다. 미카엘은 그녀가 겁에 질렸다는 사실을 자각했는지 한숨을 내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 주었다.
“절대, 절대 아니야.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마라. 이곳이 화가 난 이유는, 내가 일을 저지른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분노 역시 나를 향했고.”
“잠깐만요. 그럼 일을 저지른 게 아닌, 다른 사람이 밀어 넣으면 문제가 없다는 건가요?”
“내 생각은 그래.”
미카엘이 천천히 대답했다.
“하지만 확신할 순 없지.”
“…제가 레토 바틀렛을 이곳으로 데려오겠어요.”
“레티시아.”
“미카엘은 아예 들어오지도 마세요. 분노가 미카엘을 향한다면, 저는 절대 미카엘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요.”
미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를 위한 마음은 알겠다만, 이건 너무 위험하다.”
레티시아는 발을 굴렀다.
“왜 미카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죠? 이건 저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
그녀는 미카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의 잘생긴 얼굴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저라고 레토 바틀렛이 지배하는 곳에서 살고 싶겠어요? 좋든 싫든, 황궁은 미카엘의 집이에요. 이제 제집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저를 위한 일이죠. 엄밀히 말해서.”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흘겨보았다.
“미카엘은 레토 바틀렛이 어둠 속에 살든 말든 괴상망측한 거미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레티시아, 대체 무슨 수로 그자를 이곳으로 데려오겠다는 거지?”
“설득하겠어요.”
레티시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요. 그자가 저를 단번에 죽여 버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죠, 그렇죠?”
“…….”
“하지만 저는 돌아왔잖아요, 미카엘.”
“…그래서 그자가 네 모습을 보고 설득당할 거라고?”
“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대화가 통하는 느낌이었다.
“약속할게요. 만약 그자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거나, 그자가 저를 공격하면 바로 물러나겠다고.”
“그땐 이미 늦었을 때다.”
“뭐, 미카엘이 절 구해 주지 않겠어요?”
레티시아는 웃었지만, 심각한 분위기는 조금도 완화되지 않았다.
“…레티시아.”
미카엘이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알겠다.”
“……!”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손을 꽉 붙들었다.
“고마워요. 정말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는 거, 알아요.”
미카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반대한다고 한들 넌 해내고야 말 테니까.”
“그건 그렇죠.”
레티시아는 다시 웃었다.
지난 10년간의 세월이 아주 허사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단 몇 시간 후, 자신의 판단을 재고해 보아야 했다.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황궁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를 그 자신의 방에 가두어 버렸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