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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112/150)

112화

쾅!

레티시아는 무려 황태자의 침실 문을 발로 걷어찼다.

조금 전을 떠올리니 어이가 없다 못해 달아날 지경이었다.

미카엘은 그녀를 부드럽게 침실로 안내한 다음, 쉬라며 소파에 앉히더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밖에서 문을 잠가 버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순순히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니었는데.”

일부러 들으라고 큰 소리로 볼멘소리를 내어도 밖에서는 인기척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당연하지.’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밖에는 자신이 탈출이라도 하면 잡으려 들 기사와 사용인이 줄을 섰겠지만, 방 안에 갇혀 있는 이상 온갖 기행을 벌인다 해도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미카엘은 모르겠지만, 그녀가 방에 갇힌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어떤 자들은 그녀를 죽이기는 꺼려 하고, 미카엘이 그날 예정된 공식 일정에 참석하지 못하게만 하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레티시아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얌전히 갇혀 있지만은 않았다.

황제의 침실에서 빠져나가는 건 처음이었지만, 비밀 통로를 제외한다면 다른 방들과 크게 구조가 다르지는 않으리라.

‘마지막이면 좋으련만.’

레티시아는 발코니로 나갔다. 고개를 내밀어 옆 벽면을 보니 예상대로 사람 한 명이 겨우 걷고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의 턱이 있었다.

레티시아는 발코니의 난간을 넘어 벽에 바싹 몸을 붙인 채 턱을 걷기 시작했다.

길게 걸을 필요는 없었다. 바로 옆방으로 들어갈 정도면 된다.

문제는 황태자의 침실은 보안을 위해 돌출된 구조로 지어졌다는 점이었다.

‘…이러다 죽겠는데.’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까마득한 높이였다.

‘정말 겁 없이 저질렀구나.’

하지만 레티시아는 보호 장비 하나 없이 낭떠러지를 걷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묘하게 차분했다.

모두가 등을 돌리는 괴물이 되어 보았다. 괴물인 상태로 죽음도 맞이해 보았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게 어디 있으랴?

마침내 레티시아는 어느 창문에 도달해, 억지로 방 안에 기어들어 가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리고 그곳엔 이미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자가 있었다.

“…레티시아 님?”

비서를 그만둔 이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옛 보좌관, 파라든이 그녀를 황당해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멋쩍게 머리를 매만졌다. 파라든이라니. 문관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하필 이럴 상황에서 마주칠 줄이야.

“레, 레티시아 님.”

“오랜만이네요.”

레티시아는 미소 지었다.

처음엔 조금 당황했지만, 다른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단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파라든을 만난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하지만 파라든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소 예상을 벗어났다.

“폐하께서 레티시아 님이 이곳으로 올지도 모른다면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폐하께서요?”

“네.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일단 폐하의 명이라 이 방을 지키고 있었는데, 정말이었군요.”

파라든은 반쯤 감탄하는 듯했다.

레티시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미카엘은 그녀가 벽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이 기묘한 신뢰를 기뻐해야 하는지, 아니면 자신이 위험한 짓을 벌일 걸 알면서도 가둬 놓은 미카엘을 원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를 계속 가두는 게 파라든의 임무겠군요.”

“아, 아닙니다.”

파라든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저는 레티시아 님께서 원하시는 그 어떤 장소로든 안내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네?”

레티시아는 순수히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파라든보다 제가 황궁의 구조를 훨씬 잘 알고 있잖아요?”

파라든은 평범한 문관이었다.

미카엘을 따라 전 황궁을 쏘다닐 자신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설령 적을 마주친다 한들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골치 아픈 혹을 달고 다녀야 한다는 이야기는, 미카엘이 파라든에게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레티시아는 그게 절대 그녀를 지켜 주리라는 기대는 아니라는 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파라든은 난처한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레티시아 님께선 어디든지 가실 수 있습니다. 단, 저를 대동하셔야 합니다.”

파라든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두 손을 비볐다.

‘역시나.’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카엘은 이번에 머리를 제법 잘 쓴 듯했다.

파라든은 분명 악착같이 그녀를 따라올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목숨을 빼앗긴다는 위협 속에 떨면서.

그래서 레티시아는 레토 바틀렛을 찾으러 갈 수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파라든의 목숨을 위험 속에 빠트릴 테니까.

레토 바틀렛의 존재는 1급 기밀이었다.

따라서 파라든이 레토 바틀렛을 우연히라도 본다면, 기억을 제거하거나 파라든 본인을 제거하거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디 계셨던 겁니까? 레티시아 님을 찾느라 온 궁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폐 끼쳐서 미안해요.”

“아뇨. 미안하실 건 없죠. 이렇게 무사하신 걸 보니 다행입니다. 괴물이 나타났다는 얘기까지 돌아서, 사실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레티시아는 한 가지를 결심했다.

호르헤 경에게, 일전 일어났던 일을 일절 말하지 않겠다고.

고지식하지만 누구보다도 미카엘을 아끼는 호르헤 경에게 미카엘의 최측근인 자신을 해할 수도 있었다고 말하는 건 잔인한 짓이었다.

말하지 않아서 큰 오해를 산다 하더라도 무덤까지 안고 가야 할 비밀이었다.

“가시고 싶은 곳을 얘기만 해 주십시오. 그곳까지 모시겠습니다.”

파라든이 레티시아의 대답을 재촉했다.

레티시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라든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원하는 걸 얻어 낼 수 있는 곳을 생각해 내야 했다.

고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폐하께선 어디 계시지?”

잠시 후.

레티시아는 파라든과 함께 알현실 문을 열어젖혔다.

‘……!’

피비린내가 훅 끼쳐 왔다.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집무실에서 칼부림이 난 건 제법 오랜만이었다.

“역시, 왔네.”

미카엘은 전혀 놀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레티시아를 기다린 것 같기도 했다.

레티시아는 피 칠갑이 된 집무실의 끝에 서 있는 미카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과 조금 전, 정소에서 레토 바틀렛을 되돌리자고 말했을 때가 꿈결처럼 느껴졌다.

레티시아의 입에서 망연자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폐하, 이게 다 무슨…….”

“페르 공작가를 칠 생각이다.”

미카엘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레티시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필요도 없었다.

‘공작의 첩자겠지.’

미카엘은 페르 공작의 첩자가 누구인지 잘 알면서도 이용하기 위해 곁에 계속 두었다.

드디어 제거했다는 건 이제 그의 효용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즉, 페르 공작가가 무얼 생각하는지조차 이제는 알 필요가 없을 때.

소름이 우르르 끼쳤다.

미카엘이 사람을 죽였다거나, 혹은 페르 공작가의 멸문을 생각하고 있다는 순진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빠르네요. 적어도 3년은 뒤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은 바뀌지 마련이지.”

미카엘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자들의 수법은 점점 더 교활해지고 있어. 더 커지기 전에… 뿌리를 뽑을 필요가 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내전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어요.”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여태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를 지적했다.

“그냥 천천히 말려 죽이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첩자 하나 죽은 것 정도는 쉽게 덮을 수 있으니까 이쯤에서…….”

“레티시아.”

미카엘이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평소의 조심스럽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였다.

“천천히 움직이다가, 네가 죽으면?”

“…….”

“네가 또 야수가 된다면? 나는 그 꼴은 볼 수 없다.”

“그건 레토 바틀렛 때문…….”

미카엘이 코웃음 쳤다.

“레토 바틀렛이 어쩌다 그렇게까지 강력한 힘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거지?”

“……!”

레티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미카엘이 쓰게 웃었다.

“나도 바보는 아니다. 레토 바틀렛이 어느 정도의 힘을 얻으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 힘의 특성과 강력함 정도는 충분히 계산했었지. 저건… 협력자가 없으면 불가능한 힘이야.”

“그리고 그 협력자가 페르 공작이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그래.”

미카엘이 칼날에 흐르는 피를 대충 닦아 내고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 하나 더.”

“…….”

“나는 네가, 안전하다고 느끼기를 바란다.”

“내전 속에서요?”

“내전이라니.”

미카엘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반역자를 처단하는 것이지.”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예요.”

레티시아는 울고 싶었다.

페르 공작가를 치려면 즉위 당시 쳤어야 했다. 지금 군사를 움직여 무너뜨리는 건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컸다.

무엇보다도 희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것이다.

“그건 아니야.”

“……?”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미카엘은 대답 대신 창문 쪽으로 고갯짓했다. 자연히 레티시아의 시선이 창문 밖을 향했다.

“……!”

거대한 행렬이 황궁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깃발 두 개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백기와, 페르 공작가의 깃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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