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이렇게나 쉽게?’
레티시아는 어안이 벙벙해져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미카엘이 익숙하게 그녀를 지탱했다.
“언제부터였어요?”
미카엘이 즉흥적으로 움직였을 리가 없었다. 단 몇 시간 사이 가한 일격에 페르 공작가가 백기를 들 리가 없었으니까.
‘내가 레토 바틀렛에게 납치되었을 때부터였을까.’
그렇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아마 레토 바틀렛에게 자신이 납치당하고, 괴물로 변해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은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깨부수었다.
“네가… 여기로 돌아온 뒤부터 준비했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돌아온 뒤.
미카엘은 종종 그 표현을 썼는데, 레티시아가 비서도 그 무엇도 아닌 신분으로 황궁에 다시 돌아왔을 때를 가리켰다.
그때부터였다니.
배신감이 뱃속에서 일렁였다.
“…전혀 몰랐어요.”
“일부러 숨겼다.”
미카엘의 건조한 목소리가 아프게 느껴졌다.
“네가 싫어할 테니까.”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연히 페르 공작을 완전히 쳐낼 수 있다면야 좋죠. 언제든 폐하를 끌어내릴 기회가 있다면 망설임 없이 잡을 자니까요.”
레티시아는 어느덧 자신이 미카엘을 다시 예전의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사람의 피를 밟고 서 있는 미카엘에게 호칭을 높이지 않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사람이 죽는 건 싫어하잖나.”
“싫어해요.”
레티시아는 생각 한번 하지 않고 대답했다.
“사람을 죽이는 폐하도 싫었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황궁도 싫었고, 이곳에 있어야 하는 저 자신도 싫었죠.”
“…알고 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폐하께선 아무것도 몰라요.”
“레티시아.”
“지금이라고 딱히 달라진 건 아니에요. 여전히 폐하가 사람을 죽이는 건 싫고, 황궁에서 사람이 죽는 것도 소름 끼치고, 이럴 때마다 당장 도망치고 싶네요.”
“…….”
이제 미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카엘의 결정이 싫은 건 아니에요.”
“……!”
미카엘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경악으로 떨리는 눈동자가 그의 마음을 그대로 비추었다.
레티시아는 자신이 그의 이름을 부를 때, 미카엘의 몸이 눈에 띄게 반응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카엘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미카엘이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해요. 이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요.”
레티시아는 잠시 숨을 참았다가, 토해 내듯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모든 게 저를 위해서니까,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미카엘은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조금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듯한 그의 시선이 순식간에 레티시아를 집어삼켰으니까.
“그래서… 싫어할 수가 없어요.”
“레티시아.”
“저는 그 어떤 일이 이곳에서 일어나든 간에 남겠어요. 왜냐하면…….”
미카엘이 그녀를 향해 피에 젖은 손을 뻗었다가, 문득 허공에 손을 멈추었다.
레티시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미카엘에게로 성큼 다가가 팔을 한가득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채 식지 않은 피가 레티시아의 옷으로 옮겨 오는 동시에 피비린내가 훅 끼쳐 왔다.
“……!”
미카엘의 몸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레티시아는 자신의 몸과 밀착된 미카엘의 옷 밑에서 탄탄한 근육들이 꿈틀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미카엘의 곁에 있고 싶으니까.”
“레티시아…….”
지난 10년.
레티시아는 작은 말 한마디가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는지 미카엘과 함께 있는 매순간마다 깨닫고 또 깨달았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미카엘의 연극에 불과했으니, 어떻게 보면 거짓된 의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달라.’
지금, 미카엘의 입에서 나온 그녀의 이름은 그가 차마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의미들을 한데 그러모아서 그녀에게 펼쳐 보였다.
미카엘은 기뻐하는 동시에 두려워하고, 사죄하는 동시에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기를 바랐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까치발을 들고 미카엘에게 입을 맞추었다. 피가 심하게 튄 탓인지 피 맛이 났다.
미카엘의 곁에 남아 있으려면 평생토록 맛보게 될 맛이.
미카엘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되레 이것이 기회라는 듯, 레티시아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끌어안으며 더욱 열정적으로 그녀를 탐닉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달칵.
문이 열렸다.
다행히 둘 모두 이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집무실 안에 들이닥쳤을 땐 그야말로 평상시의 황제와 그 비서였다.
엄밀히는 전직 비서라고 해야 하겠지만, 레티시아의 지난 10년은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비서의 그림자를 씌우고도 남았다.
레티시아는 가끔은 그것이 지긋지긋했지만, 도움이 될 때가 제법 많았다.
바로 지금처럼.
“폐하.”
호르헤 경이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반쯤 굳어 가는 피가 무릎을 적셨지만, 개의치 않는 듯했다.
“페르 일가가 백기를 들었습니다.”
“조건은?”
“일가의 목숨. 그것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요청하지 않겠답니다.”
“반역자가 황제에게 하는 요청이라니, 간이 크군.”
“폐하께서 그들을 살려 두시면 반역자가 아니게 되니까요.”
“…….”
미카엘은 조용히 허공을 응시했다. 고민하는 자의 모습이었다.
레티시아는 그 원인을 알았다.
지난 몇 년간, 숱하게 많은 사람들을 죽여 왔지만 사실 미카엘은 그들을 살릴 방법을 항상 찾아 헤맸다.
대부분의 경우 해결책은 처형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해 왔지만.
지금 역시 페르 일가를 살릴 길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그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없어.’
레티시아 또한 계산을 끝냈다.
그 어떠한 연유, 어떠한 방식으로든 페르 일가를 살려 둔다면 그들이 반역자가 아니라고 못 박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반역자는 당연히 전 일가가 처형당하는 게 법이었으니.
그것을 막기 위해선, 페르 일가가 반역이 아닌 다른 죄를 저질러 적당히 작위를 몰수당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짓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살아 있으면 안 돼.’
페르 공작가 정도 되는 가문이 백기를 들었다 하여 모든 패를 넘겨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들은 분명, 실각한 이후에도 남은 권력을 모두 끌어모아 재기를 노릴 것이다.
마침내 미카엘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레티시아의 추측과 정확히 동일했다.
“예외는 없다. 모두 처형해라.”
“예.”
“그리고 백기를 들었다는 건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거야. 그걸 자식들로부터 알아내도록.”
“실은 폐하, 그것이…….”
호르헤 경의 입술이 파르르 경련하며 움직였다.
“공작이 도망쳤습니다.”
“…그럼 백기는 누가 들었지?”
“장남입니다.”
“그랬군.”
“당연히 공작의 뒤 역시 많은 기사들이 쫓고 있습니다.”
“잡지 못하겠지.”
미카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레티시아 역시 동감했다.
자신을 제외한 전 일가를 제물로 바쳐 살아남으려는 남자다.
어떻게 붙잡겠는가?
“그래도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니, 멈춰.”
“예?”
“페르 공작은 죽었다고 공표해라. 아들이, 그 아비를 죽이고 역모를 꾸몄다고.”
“……!”
어지간해선 그 어떤 냉혹한 명령도 묵묵히 따르던 호르헤 경마저 이 명에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렇다고 감히 반기를 드는 건 아니었지만, 호르헤 경마저 그렇게 반응할 정도니 나머지 병사들이 눈에 띄게 동요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약간의 침묵 이후, 호르헤 경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미카엘은 다시 집무실에 레티시아와 자신만이 남자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레티시아, 나는…….”
“알아요.”
레티시아는 손을 뻗어 미카엘의 입을 막았다.
“함정이죠, 그렇죠?”
“…그래. 그런 자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되는 걸 참지 못하지.”
“하지만 정말 목숨 부지가 목적일 수도 있잖아요.”
만약 페르 공작이 말 그대로 그 자신의 목숨만을 위해 도망쳤다면, 그 어떤 극악무도한 소문을 퍼뜨리든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면 여태까지 물밑에서 반역을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 해 오다 꼬리를 밟히지도 않았겠지.”
미카엘이 차갑게 대답했다.
“그자는 아직은 잃을 게 있는 자다. 그걸 지키기 위해 돌아올 거다, 반드시.”
결론적으로, 미카엘이 옳았다.
페르 공작은 미카엘이 지시한 내용이 공표되기가 무섭게 허위 사실을 주장하며 수도로 돌아왔다.
그의 요구 사항은 단 한 가지.
공작 신분으로서의 알현이었다.
미카엘은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죽기 전 마지막 소원쯤은 들어주어야 하지 않겠냐고 알현을 허락했다.
페르 공작은 알현실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은 여태까지의 안하무인으로 보일 정도로 당당한 태도와 거리가 멀어, 알현실의 모든 사람들을 당황케 했다.
“폐하, 소신을 살려 주셔서 그저 감읍할 뿐입니다.”
“눈치가 빠르군.”
미카엘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아직 감사 인사는 이르네. 공작, 그대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이번에는 무엇을 내걸 생각이지?”
그제야 레티시아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미카엘이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몇 년 전, 페르 공작은 그 누구보다도 미카엘의 발밑에 비굴하게 엎드려 살아남았다.
또 하지 않는다는 법도 없지 않는가.
그때는 세력 일부를 내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이제는 달랐다.
어차피 공작 위는 황궁으로 몰수될 예정이었으니까.
페르 공작이 입이 천천히 열렸다.
“…레토 황자를, 영원히 봉인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