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레토 황자.
죽었다 알려진 황자의 이름이 페르 공작의 입에서 나오자 알현실 안 모두가 술렁거렸다.
가면처럼 얼굴을 굳힌 호르헤 경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미카엘은 차가운 얼굴로 페르 공작을 쏘아보았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이미 백골이 되었을 레토 황자의 봉인이라니?”
“폐하께서는 정녕 제가 말을 다 하길 원하시는 겁니까?”
침묵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그 침묵에 얽힌 뜻을 알았기 때문에 불안하게 입술을 잘근거렸다.
페르 공작은 레토 바틀렛의 정체를 드러내려는 게 분명했다.
“말해 보아라.”
미카엘이 고개를 까닥였다.
페르 공작은 조금 당황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레토 황자는 죽은 게 아닙니다. 이 성에 갇혀 있습니다.”
레토 바틀렛이 아닌, 레토 황자.
레티시아는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며 눈을 깜박였지만 이내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깨달았다.
레토 바틀렛이 페르 공작가의 보호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페르 공작은 최대한 레토 바틀렛과 공작가와의 관계를 모두에게서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무엄하다, 공작.”
호르헤 경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알현실 사이를 갈랐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은 모양이군. 이미 사망한 황자까지 들먹이는 걸 보니.”
“경만 모르는 건 아니고?”
페르 공작이 대놓고 비꼬자, 호르헤 경의 얼굴에 섬뜩한 안광이 비쳤다. 그는 허리춤에 찬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만.”
미카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토 황자가 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다.”
“폐하, 그게 정말입니까?”
어느 변방에 살다 각료로 뽑혀 수도로 올라온 모양인지 레티시아가 얼굴을 알지 못하는 각료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소리쳤다.
“후작은 나를 의심하는가?”
“하지만 황자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레토 황자가 이 자리에 앉아야 하지 않겠냐고? 후작이 원하는 건 그것인가 보군.”
“아, 아닙니다.”
“레토 황자는 소문에 불과하지만, 다른 살아 있는 황족이 없는 건 아니지. 그자들에게 충성하고 싶다면, 내 언제든지 보내 주겠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미카엘은 무릎을 꿇은 각료를 무시했다. 레티시아는 애당초 그의 목적이 각료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게 아니라, 분위기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데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미카엘은 공작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은 소문일 뿐.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 하지만 페르 공작은 확실히 아는 정보를 말했다고 믿는다.”
“예.”
페르 공작은 바닥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머리를 조아렸다.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만나 왔습니다.”
“……!”
이번에는 그 어떤 것도 번져 가는 소란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페르 공작은 폭탄 발언을 내뱉었다.
심지어 레티시아와 호르헤 경, 그리고 미카엘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마지막이 언제였지?”
“일주일 전입니다.”
“…….”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힐끗 바라본 순간, 자신이 납치당한 시기와 겹쳤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이군.”
미카엘이 이를 악물며 한마디 내뱉었다.
“정확해.”
“저와… 그자의 접선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미카엘이 차갑게 대답했다.
“그자가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게, 일주일 전이었다. 분명 혼자서는 그런 힘을 손에 넣을 수 없었을 텐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 뒤에 공작이 있었을 줄이야.”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미카엘은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옥좌를 꽉 붙들었고, 흘러나오는 말은 지나칠 정도로 잘 억제된 톤이었다.
그녀는 미카엘을 안심시켜 주기 위해 작은 미소를 지었는데, 그다지 효과는 없는 듯했다.
미카엘은 되레 그녀의 시선을 피했으니까.
하지만 레티시아는 이제 상처받지 않았다.
‘내게 미안한 거야.’
오해가 생기기엔 그들은 너무나 많은 일들을 지나왔다.
그녀는 다시금 페르 공작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눈치채지 못하신 게 당연합니다.”
페르 공작이 담담하게 얘기했다.
“저를 완전히 얕보고 계셨을 테니까요.”
“…봉인하는 방법을 말하라.”
“여기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디서 말할 생각이지?”
페르 공작은 알현실을 한 바퀴 돌아보더니, 미카엘을 향해 말했다.
“사람을 최대한 물려 주십시오. 이렇게 많아서야 일은 시작도 하지 못할 겁니다.”
각료들과 기사들은 미카엘의 손짓 몇 번에 우르르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알현실에 남은 건 페르 공작을 제외한다면 레티시아와 미카엘, 그리고 호르헤 경뿐이었다.
“공작이 원하는 대로 되었군.”
미카엘이 차갑게 비꼬았다.
“이제 저들은 레토 황자가 살아 있으며, 실은 나와 공작이 그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들어 댈 걸세.”
황제의 명백한 분노에도 페르 공작은 전혀 떨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겨우 그 정도에 무너질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정도에 무너진다면,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은 이미 제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겠지.”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살기 위해 죽이는 게, 여태까지 미카엘이 살아온 방식이었으니까.
“이제 봉인 방법을 말해.”
미카엘이 명령했다.
페르 공작은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혀를 움직였다.
“접선 장소가 있습니다. 폐하께서 괜찮으시다면 거기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여기라고?”
미카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떠한 틈이나 통로도 보이지 않는 돌벽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벽면을 잠시 만져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한 장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대충 알겠군. 어떤 방식인지.”
“예.”
페르 공작이 뒷짐을 졌다.
“이곳을 통해 접선했습니다. 저는 레토 황자가 필요로 하는 모든 걸 조달해 주었죠.”
“직접 한 것처럼 말하는군.”
페르 공작은 부정하지 않았다.
“다른 누구에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레토 황자에게 가끔 대리인을 보내면 시체로 발견되곤 했습니다.”
레티시아는 소름이 좍 끼쳐 왔는데, 레토 바틀렛이 일으킨 살인 때문인지 아니면 페르 공작이 그의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제가 그를 끌어내겠습니다. 그때를 노려서…….”
“죽이지는 못해. 그건 이미 알지 않나.”
“봉인을 하실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생목숨을 쓰십시오.”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잠시 귀를 의심했지만, 페르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차분히 레토 바틀렛을 봉인하는 의식의 절차를 읊었다.
봉인을 위해선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미리 한 사람이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를 파 준비해 두고, 그 사람의 목을 절반만 친 채 구덩이에 밀어 넣는다.
레토 바틀렛의 힘을 생각하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간단하기 그지없는 방법이었다.
“…레토 황자는 그 생명에 끌려, 함께 땅에 묻힐 겁니다.”
“멀쩡한 사람을 생매장하라는 거군, 공작은.”
“예.”
미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허공을 지그시 바라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할 뿐이었다.
‘미카엘……!’
정신이 아득해졌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앞을 막아섰다.
“…폐하.”
오늘따라 미카엘의 공식적인 호칭이, 유난히 아프게 느껴졌다.
“방법을, 아시잖아요. 굳이 봉인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저자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
“우즈 양은 그렇게나 오래 폐하의 곁에 있었으면서도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가 보군.”
페르 공작이 큰 소리로 비아냥거렸다.
“봉인이란 건, 언제든지 필요해지면 꺼내 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걸 포기하겠다고?”
레티시아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자신은 지금, 미카엘의 전 비서일 뿐이었다. 비록 반역을 저질러 목숨이 오늘내일하는 공작이라고는 하나 만만하게 보고 반박할 수 있는 상대는 안 되었다.
‘봉인은 굳이 미카엘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풀 수 있어.’
설령 푸는 방법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알아낼지도 모른다.
“레티시아의 말이 맞다. 무엇보다도 이 장소는 페르 공작, 자네도 알지. 이 위기를 레토 바틀렛을 봉인시켜 빠져나가고 나중에 풀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페르 공작은 천천히 미카엘을 올려다보았다.
섬뜩한 기운이 지치고 쇠약한 중년 남자의 눈에 일렁였다.
“저를 제물로 쓰십시오. 그럼 폐하께서 원하는 모든 걸 손에 넣으실 수 있습니다. 제 죽음과, 레토 바틀렛의 봉인. 그렇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