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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115/150)

115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미카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의 목숨을 의식에 쓰라니.”

“어차피 제 목숨은 부지하기 어렵습니다. 폐하께서도 절 오래 살려 둘 생각은 없으시겠지요.”

“…….”

미카엘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레티시아 역시, 공작의 말이 맞다는 사실을 알았다.

페르 공작은 살려 두기에는 너무나 많은 일을 했다.

만약 반역 모의 정도만이었더라면 작위를 몰수하는 선에서 정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페르 공작이 레토 바틀렛의 힘을 비밀리에 키워 주었다는 건, 그가 지나치게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알면서도 고백한 거야, 페르 공작은.’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

그리고 역시나 그 대상은…….

“그렇다면 공작 역시 자신의 희생으로 얻고자 하는 게 있겠지. 말해 보아라.”

“가족들의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페르 공작은 그리 인간미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늦게 얻은 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한다는 소문이 제국에 널리 퍼져 있었다.

“가신들을 모두 처형한다면, 저의 멍청한 자식들도 감히 부족한 아비의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겁니다.”

“그걸 원하는 건가?”

미카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예.”

공작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는 곧 죽고, 공작 위는 황실로 환수당할 겁니다. 그러니 가신들은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겠지요. 마지막 정리를 해 주십시오.”

“…자네 가족들은.”

“죽는 것보단 그렇게나마 목숨을 부지하는 게 낫습니다.”

레티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신들은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게 될 테니 죽여 주고, 가족들은 그래도 사는 게 낫다며 살려 달라?

아주 웃기지도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그 조건을 걸고 자신의 목숨을 바칠 계획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더욱 더.

‘하지만 미카엘은 이자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지.’

늘 골칫덩이였던 페르 공작과 공작가의 가신들을 모조리 제거할 수 있는 기회였다.

페르 공작의 말대로, 손발이 잘린 그의 일가족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전전긍긍할 뿐 복수는 꿈도 못 꿀 것이다.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카엘과 페르 공작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순간이라니.

자신은 감히 끼어들어선 안 될 순간이기도 했다.

“알겠다. 약속대로, 공작의 처자식은 살려 주도록 하지.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미카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공작의 막내아들은 이미 남작일 텐데.”

페르 공작의 막내아들은 유일한 그의 유일한 아들로, 태어날 때부터 공작가의 후계자가 물려받는 작위를 물려받아 윌리엄스 남작이 되었다.

“예, 맞습니다.”

페르 공작이 미카엘의 의중을 알아채려고 노력하면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공작 위는 몰수한다 해도, 일개 남작 위까지 빼앗을 필요는 없겠지. 다만 자네의 일가가 가진 다른 작위는 모두 몰수다.”

“감, 감사합니다. 폐하의 은혜, 저승에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미카엘의 방금 판단은 말 그대로 ‘은혜’였다.

반역자의 자식은 살아남는다 한들 귀족의 지위는 부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먼 친척집을 전전하다 결혼도 하지 못하고 쓸쓸하게 죽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남작이라고는 하나 귀족 지위를 남겨 주었다.

이제 페르 공작의 자식들은 같은 하급 귀족들끼리 어울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가신들 역시 처형하지 않겠다.”

“……!”

“폐하……!”

놀란 건 레티시아만이 아니었다. 호르헤 경 역시 그를 막으며 소리쳤다.

“폐하, 그건 안 됩니다!”

“…처음으로, 저와 친애하는 제 숙부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 같군요.”

미카엘이 짜증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공작 위를 그냥 놀릴 생각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이양시킬 생각이지. 그런데 멀쩡한 가신들을 죽여 낭비할 필요가 있겠는가? 잘못된 주인을 만났을 뿐일 도구들을, 파괴할 생각은 없다.”

호르헤 경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설마……!”

“그래, 그 설마가 맞아. 호르헤 경, 자네가 다음 페르 공작이다. 오히려 혈연으로도 가까우니 반대할 사람도 없겠군.”

“폐하, 안 됩니다.”

“안 되기는. 나는 언제나 경이 내 아버지를 위해 버린 그 모든 것들을 언젠가 되찾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지금이… 적절한 때가 된 것 같군.”

호르헤 경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저는 그런 중직을 하사받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떻게…….”

“일어나게, 경. 아직까지 페르 공작은 자네의 조카야. 벌써부터 공작 위를 하사받은 것처럼 굴 텐가?”

“…알겠습니다.”

잠시 후.

성인 남성이 혼자 힘으로 못 올라올 정도의 깊은 구덩이가 바닥에 파였다. 바닥까지 내려가서 판 건 미카엘이었다. 미카엘은 가장 젊은 남성이 파야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레티시아는 알았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엔 그 누구도 믿지 못했다.

‘모든 건 자신의 손으로 해야 하지. 뭐, 그게 미카엘이니까.’

호르헤 경이 미카엘을 끌어 올렸다. 마음만 먹으면 호르헤 경을 함께 밀어 넣을 기회였으나, 페르 공작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 낸 미카엘이 페르 공작을 돌아보았다.

“언제쯤 불러낼 생각이지?”

“곧 시행하겠습니다.”

페르 공작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그도 죽음만큼은 두려운 모양이었다.

‘하기야, 죽는 것보단 목숨을 부지하는 게 낫다고 했지.’

그런데도 페르 공작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려는 건 가족들 때문일 것이고.

페르 공작은 돌벽으로 다가가 두 손을 얹었다.

미카엘과 레티시아, 그리고 호르헤 경은 숨죽여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페르 공작의 손가락은 마치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움직였는데,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통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레티시아는 그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아직도 레토 바틀렛에게 당한 일들이 살갗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

한기가 느껴졌다.

레토 바틀렛이 가까이 다가올 때면, 으레 느껴지는 바로 그 한기가.

마침내.

레토 바틀렛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벽에서 미끄럽게 몸을 빼내자마자 곧장 페르 공작의 손목을 걸머쥐었는데,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직감한 듯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

페르 공작은 다리를 덜덜 떨며 뒤로 물러났다.

레토 바틀렛은 그의 손목을 놓아주었는데, 의도처럼 끌려가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페르 공작, 어서.”

미카엘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 어디에도 곧 희생양이 될 사람에 대한 동정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짤막한 순간, 페르 공작은 잠깐의 머뭇거림을 보이더니 구덩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만약 페르 공작이 망설일 경우 그를 강제로라도 집어넣기 위해 구덩이의 가장자리에 서 있던 호르헤 경을 억세게 잡아당기면서.

“호르헤!”

다음 몇 순간은 레티시아가 평생토록 잊지 못할 흐릿한 잔상을 남겼다. 호르헤 경은 가만히 떨어져 주지 않았다. 그는 그 짧은 찰나에 검을 빼내어 페르 공작을 찔렀다.

그리고 미카엘이…….

미카엘은, 호르헤 경을 잡아당겨 땅에 억지로 앉혔다.

하지만 페르 공작은 발버둥을 치며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나 잡아당겼고 그 결과…….

페르 공작과 함께 구덩이로 떨어진 건, 미카엘이었다.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레토 바틀렛이 그 생애 이렇게 기쁜 적이 없었다는 듯 큰 소리로 웃으며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암흑이 그들 모두를 잠식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레티시아는 정신을 차리며 몸을 땅에서 일으켰다.

‘의식을 잃었을 뿐이야.’

아주 잠시, 의식을 잃었을 뿐이다.

당연히 그사이에 누가 죽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어서 미카엘을 구해 내고 레토 바틀렛을 봉인해야……!

“폐하.”

절망에 빠진 호르헤 경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레티시아는 무너지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그녀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 대신 두 팔의 힘으로 엉금엉금 기어 구덩이에 도달했다.

아니, 구덩이 위로 끌어 올려진 미카엘 옆에 도달했다.

미카엘은 눈을 부릅뜬 채 하늘을 또렷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레토 바틀렛과 사투를 벌인 모양인지 뻣뻣이 굳은 팔은 아귀다툼을 하던 모양새였다.

“미카엘!”

레티시아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미카엘, 미카엘……!”

“돌아가셨다.”

호르헤가 비통하게 대답하며 미카엘의 눈을 감겼다.

미카엘의 죽음을 알리는 호르헤 경의 목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본디 죽어야 할 사람은, 호르헤였다. 원래는 레티시아가 죽어야 했던 것처럼…….

레티시아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번에도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는 원작을 거슬렀으나, 이번에도 레티시아 우즈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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