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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116/150)

116화

“우즈 양.”

호르헤 경이 그녀를 일으켰다.

어딘지 무거운 듯한 손길을, 레티시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거부했다.

“…싫어요.”

“폐하를 옮겨야 해.”

“싫어요…….”

“레티시아 우즈!”

호르헤 경이 레티시아의 어깨를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 지금 상황을 생각하라고!”

“……?”

레티시아는 멍하니 호르헤 경을 올려다보았다.

미카엘이 죽었다.

그런데 호르헤 경은 도통 그녀가 슬퍼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자신은 아주 조금, 슬퍼할 시간이 필요할 뿐인데…….

“저, 저 미카엘이랑 같이 있을래요…….”

“누굴 감히 그 이름으로 부르는 게냐.”

호르헤 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는 폐하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아라, 레티시아 우즈.”

“…….”

레티시아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카엘은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을 때와 다름없이 아름다웠다.

“…무언가, 방법이…….”

“없어.”

호르헤 경은 구덩이 안을 가리켰다. 레티시아는 물끄러미 그 안을 내려다보았다.

미카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겨진 페르 공작의 몸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저자도 죽었고, 폐하도 죽었다.”

“잠깐만요.”

레티시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럼 레토 바틀렛은……!”

“도망쳤어.”

호르헤가 쓰게 내뱉었다.

“이게… 내 조카가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군. 하지만 그자는 도망쳤다. 그래서…….”

호르헤는 레티시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린 폐하의 시신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제국이 혼란에 빠지지 않을 시기에 공표해야 한다. 알겠느냐?”

레티시아의 머리가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호르헤 경은 이미 주군의 죽음을 겪었었다.

그렇기에 이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주군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순간, 호르헤 경이 미카엘의 죽음을 바로 알리지 않으려는 가장 큰 이유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레토 황자가… 다음 황제가 될 수도 있겠군요.”

“그래.”

호르헤 경이 쓰게 내뱉었다.

“살아남은 황자, 황녀가 없는 건 아니지만… 폐하께서 전부 반역자라고 못 박으셨으니, 돌아오기는 힘들 거다.”

“레토 황자까지 죽으면요?”

“남은 황족끼리 알아서 계승권 싸움을 하겠지. 죽은 황자가 남긴 아이라도 있으면 쉽게 끝날 거고.”

호르헤 경이 무심히 대답했다.

“나는 어느 쪽이든 신경 쓰지 않아. 단지, 폐하를 죽인 인간이 황위에 오르는 일만 없길 바랄 뿐이다.”

“인간이 아니에요. 그러니 앉으면 안 되죠.”

“…그렇군.”

“그자는 영원히 살 수도 있어요. 자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손가락 하나로 도륙하거나, 괴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고요. 전례 없는 폭군이 될 거예요.”

말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차분해졌다.

그렇다고 아프게 조여드는 심장이 가라앉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이 고마웠다. 그는 자신을 애도의 늪에서 억지로 끌어 올려 주었다.

만약 시간만 충분히 있다면 레티시아는 슬픔에 잠겨 미카엘을 애도하며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 상황.

넋을 놓고 있다간 미카엘을 죽인 괴물이 황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미… 폐하를, 숨길 수 있을 만한 곳을 알아요.”

레티시아가 호르헤 경을 안내한 곳은 불과 몇 시간 전, 미카엘이 그녀를 데리고 왔던 곳이었다.

정소.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니, 눈시울뿐만이랴?

레티시아의 전신이 울분을 토해 내지 않으려 애썼다.

‘여기서 미카엘이 앉아 있었고, 여기서…….’

이 모든 장소들에서 미카엘이 살아 숨 쉬었다. 심지어 레티시아는 미카엘과 자신이 나눈 대화의 메아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정작, 실제 미카엘은 죽었음에도.

레티시아는 이를 악물며 설명했다.

“이곳은 복잡한 곳이에요. 그리고 레토 바틀렛과 같은 존재를 굉장히 싫어하죠. 그리고 그가 이 호수에 닿으면…….”

레티시아는 호수를 들여다보았다.

“다시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올 거예요. 그럼 미카엘이 그에게 씌운 겁박이 모두 사라지게 되겠죠.”

“…그게 바로 우즈 양이 원한 거였나.”

“조, 조금 전까지는 그랬죠.”

레티시아는 더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바르작거리며 간신히 눈물을 훔쳐 냈다.

“이제는… 끄흑… 모르겠어요.”

미카엘을 죽인 괴물.

그자를 인간으로 돌려보내는 자비를 베풀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하던 죽음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미카엘이 결정했던 대로 땅속에 영원히 봉인하고 싶었다.

“그래도 그자를 이곳으로 데려오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호르헤 경이 천천히 말했다.

“그자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그 누구도 처치하기 힘드니까.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하지도 않을 거고.”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깨달았다.

“…미카엘을, 미끼로 쓰려는 거군요.”

이번에는 호르헤 경도 레티시아의 미카엘에 대한 호칭을 지적하지 않았다.

“폐하께서도 살아 계셨다면 그런 명을 내리셨을 거다.”

“네. 절대 그러지 못하는 저를 한심하게 여겼겠죠.”

“장담하는데, 그러지는 않았을 것 같군. 왜냐하면…….”

호르헤 경은 레티시아를 잠시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널 신뢰하셨으니까.”

“…….”

“네 판단이라면 믿고 움직일 가치가 있다고 하셨다.”

“…영광이네요.”

입맛이 썼다.

미카엘은 그 정도로 자신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는데, 그가 죽은 지금 레티시아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호르헤 경에게 멍하니 끌려다니는 것뿐이었다.

‘…아니야.’

레티시아는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지만, 겨우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물 몇 방울이 생각과 몸의 움직임까지 멈출 수는 없는 법이다.

“그자를 데려올 수 있겠나, 우즈 양?”

“…불러낼 수는 있어요.”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페르 공작이 속임수를 쓸 경우를 대비했을 뿐인데.’

만약을 위해, 페르 공작이 레토 바틀렛을 불러내던 손가락의 움직임을 모조리 기억해 두었다.

“아까… 다 기억해 두었으니까요. 어떻게 불러냈는지.”

“그자는 페르 공작이 죽었다는 걸 안다. 또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나?”

“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할 테니까요. 그리고 그에게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도 하니까요. 손가락 하나면 바스러지는…….”

“그렇군.”

호르헤 경은 레티시아의 말에 그대로 수긍했다. 그는 레티시아의 자조를 정정해 주기에는 너무나 지쳐 보였다.

“그럼, 다시 그곳으로 가야겠군.”

“아뇨.”

레티시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에서도… 불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봐요.”

“뭐라고?”

“아까 그 장소는 의미가 없었어요. 단지… 움직임이 의미가 있었을 뿐. 그리고 그 벽은 소리가 잘 통하도록 뒤가 텅 비어 있었을 거예요.”

“그냥 부르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건가.”

“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통로를 낀 벽이라면 아무 곳이나 그자를 부를 수 있는 도구가 되겠죠.”

“…실패할 가능성이 커 보이긴 한다만, 그래도 성공한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겠지.”

레티시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황궁의 구성원들은 바보가 아니다.

황재의 부재를 알아챈다면 큰 소란이 벌어질 것이다.

그 전에, 레토 바틀렛이 삿된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저지해야 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더 전에 레티시아가 해야 할 게 있었다.

“호르헤 경.”

“…우즈 양.”

“여긴… 제가 맡을게요. 호르헤 경은 제가 실패할 경우, 방심한 그자를 처치해 주세요.”

그녀는 호수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어떻게든… 저 안으로만 집어넣으면 돼요. 그럼 그자는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갈 테고… 그 이후는 마음대로 하세요.”

“…….”

호르헤 경의 침묵은 깊었으나, 길지는 않았다.

“죽길 원하는 건가?”

“아뇨.”

레티시아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살고 싶어요. 하지만 레토 바틀렛이 다스리는 제국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요.”

“알겠다.”

호르헤 경이 조용히 대답했다.

“이 일이 어떻게 끝나든, 절대 잊지 않으마.”

“저, 아직 안 죽었거든요?”

레티시아는 웃었지만, 호르헤 경은 웃지 않았다.

잠시 후.

레티시아는 통로를 끼고 있는 벽으로 달려가 페르 공작과 정확히 똑같은 움직임으로 벽을 두드렸다.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벽에서 한기가 느껴졌으니까.

레티시아는 이를 악물며 뒤로 물러섰다.

“이런.”

레토 바틀렛이 즐겁다는 듯한 한마디를 내뱉으며 벽면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조금 전 보았을 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턱에 묻은 핏자국을 제외하면.

그 피가 누구의 피인지 생각하지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직접 내가 찾던 것을 가져다주다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레토 바틀렛이 미카엘의 시신을 눕혀 놓은 호숫가로 천천히 다가왔다.

처음에는 아예 호수에 미카엘을 가라앉히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지만, 호수는 죽은 자를 거부하듯 둥둥 띄울 뿐이었다.

레티시아는 두 팔을 크게 벌려 미카엘의 시신을 온몸으로 막아섰다.

레토 바틀렛이 미카엘을 빼앗아 가려면, 그 전에 그녀부터 베어야 할 것이다.

그녀를 베면 미카엘의 시체가 온전치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레토 바틀렛은 즉위를 위해 죽은 미카엘을 더는 이용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레토 바틀렛은 전혀 그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거나, 혹은 개의치 않은 듯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일 것처럼 서서히 숨통을 조여 오며 다가왔으니까.

‘제발……!’

레티시아는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바로 그 순간에도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치켜뜨며 기원했다.

지켜 달라고.

제발.

신이 있다면 이 순간, 이 쓸모없는 목숨을 가져가서라도 미카엘을 지켜 달라고……!

차분히 가라앉아 있던 붉은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어디선가 빛이 쏟아졌지만,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지키는 데 전념하느라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오히려 레티시아에게 상황이 달라졌다는 걸 알려준 건 바로 레토 바틀렛의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

인기척이 레티시아의 등 뒤에서 느껴졌다. 가까이 한 지 너무나 오래되어 이제는 그녀와 한 몸으로까지 느껴지는 기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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