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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118/150)

118화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묻고 싶어.’

죽은 척을 한 건지, 아니면 기이한 힘으로 살아난 건지, 그 빛무리는 마법의 힘인지…….

차마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수 개의 질문들이 입 안을 맴돌았다. 결국, 입을 먼저 연 건 미카엘이었다.

“왜 혼자 있었지?”

어찌 보면 혼잣말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심각한 상황에서 능청을 떠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그 질문을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호르헤 경!”

레티시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미카엘이 살아났다. 당연히 호르헤 경은 이미 그들에게로 달려왔어야 마땅했다.

아니, 애당초 그녀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미카엘을 눕혀 두고 밀리기 시작했을 때 들어왔어야 했다.

‘설마.’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리는 바들바들 떨렸지만, 목소리만큼은 굳건했다.

“빨리 호르헤 경을 찾아야 해요. 레토 바틀렛이…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해요.”

입맛이 썼다.

조금 전, 그녀는 미카엘에게 레토 바틀렛이 죽을 이유가 없는 자라며 항의했다.

하지만 보아라.

이미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는가.

금세 그들은 두 다리가 부러진 채 신음하고 있는 호르헤 경을 찾아냈다. 다행스럽게도 호르헤 경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폐하!”

호르헤 경의 눈이 환희에 차 반짝거렸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레티시아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신이시여?’

호르헤 경 역시 신을 믿는 부류가 아니었다.

“정말 신께 감사할 일이지.”

미카엘이 담담하게 말했다.

“기대게, 호르헤 경. 얼른 의사에게 보여야겠어.”

호르헤 경은 미카엘과 레티시아를 한 번씩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를 두고 가십시오. 할 일이 많지 않으십니까.”

“말도 안 돼요!”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으로부터 응급 처치를 배웠다. 부러진 다리는 한시라도 빨리 처치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괴상하게 굳어 다시는 걷지 못할 수도 있었다.

호르헤 경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를 데리고 나가려면 시간이 제법 걸립니다. 그리고 이곳은 황실의 기밀이니 사람을 데리고 올 수도 없겠지요. 죽는 상처는 아니니, 충분히 사태를 수습하고 난 이후 오시면 됩니다.”

레티시아는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호르헤 경은 고통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 두서없게 말하기는 했지만 전부 옳은 말이었다.

‘상황이 조금만 더 달랐더라면…….’

페르 공작은 지나치게 요란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뽐냈다. 그 상태로 퇴장하였으니, 그와 황제의 빈자리를 다른 자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지금쯤 죽은 페르 공작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렇다면 모두가 미카엘을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전 황궁이 혼란으로 빠져들기 전에 미카엘이 제자리를 되찾아야 했다.

솔직한 심정으론, 레티시아는 호르헤 경처럼 미카엘의 등을 떠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과 호르헤 경을 내버려 두고 갈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레티시아는 그 제안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그녀는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호수에 들어가면 치유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호수는 정화지, 치유가 아니다.”

미카엘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치유는… 성소에서만 가능해.”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성소.

그 성소는, 레티시아의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 미카엘이 송두리째 태워 버렸다.

그때, 호르헤 경이 기이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레티시아 님, 제 손을 잠깐 잡아 주시겠습니까?”

“네……?”

레티시아는 또다시 귀를 의심하면서 문질러 보았다. 좀 전부터 들려선 안 되는 말들이 들리고 있었다.

호르헤 경이 갑자기 자신에게 존칭을 붙이다니.

레티시아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곤 꿈도 꾸지 않았다.

호르헤 경은 어디까지나 그녀를 미카엘의 평민 측근으로 대했고, 평민인 그녀가 신분으로나 직책으로나 호르헤 경의 위에 설 가능성은 전혀 없었으니까.

물론 황후가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레티시아는 백일몽으로라도 자신이 황후가 될 가능성은 꿈꿔 보지 않았다.

아니, 평민인 자신이 황후가 된다면 미카엘의 기반을 무너뜨릴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기묘한 힘에 이끌려 호르헤 경의 두 손을 잡아 쥐었다. 이유를 물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레티시아는 전신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힘에 놀라 뒷걸음질 쳤다.

손은 당연히 호르헤 경의 손을 잡기가 무섭게 떼어 낸 이후였다.

그리고 호르헤 경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레티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호르헤 경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무릎을 자유자재로 굽혀 보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대로군요.”

감탄이 호르헤 경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반쯤 경탄에 찬 눈으로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시험한 것이었나?”

“폐하 역시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역시 경은 나를 잘 알아.”

미카엘이 피식 웃었다.

레티시아는 그들에게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묻지 않았다.

미카엘의 곁에서 그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 쌓은 지식들은 한 가지 답만을 가리켰고, 레티시아는 모르는 척 미카엘에게 질문할 만큼 순진하게 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전, 치유력을 가지게 된 거군요.”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결론이었다.

눈앞에서 호르헤 경의 다리를 보고도 자신과 치유의 상관관계를 모른다면 아둔하다 불려도 쌌다.

거기다가 호르헤 경의 깍듯한 존대까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은 일종의 걸어 다니는 성소가 된 모양이었다.

“비슷해.”

“설마, 미카엘도 제가 치유…….”

미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미카엘은 그 자신의 힘으로 모두를 속인 게 맞는 모양이었다.

“넌 나를 살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서도 필사적으로 반박했다.

“제가, 사람을 어떻게 살려요.”

사람을 치유하는 힘 정도는 한 세기에 한 명쯤은 나타났다. 그들의 힘은 강력한 마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평범한 인생을 살다 간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물론 성녀니, 성자니 하는 거창한 이름을 단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거야말로… 신의 영역이야.’

만약 레티시아가 죽은 사람을 되살린 게 맞다면, 그녀는 살아 있는 신이 될 것이다.

이 제국 그 누구보다도 드높은.

레티시아는 곧 그것이 거대한 재앙을 불러오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전 대륙이 나를 손에 넣기 위해 안달을 내겠지. 나는 끝없이 죽은 권력자들을 되살려야 할 테고.’

이제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레티시아는 진심으로 미카엘이 거짓을 말하고 있기를 빌었다. 혹은, 치유력에 의한 착각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야속하게도 호르헤 경은 그녀의 소원과 완전히 반대되는 말을 내뱉었다.

“분명히 레티시아 님께서 폐하를 살리신 게 맞습니다.”

“호르헤 경!”

레티시아는 새파란 안색으로 손을 휘저었다.

“그런…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레티시아의 말이 맞다.”

그때, 미카엘이 자신의 말을 완전히 뒤집었다.

레티시아는 불안하게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냥 치유된 것으로 하는 게 맞겠어.”

“아…….”

레티시아는 신음을 흘렸다.

미카엘은 여전히 그녀가 그를 살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안위를 위해 없던 일로 덮어 두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섭게도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생각이 맞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죽었다는 건 미카엘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거야.’

그가 지금 자신과 호르헤 경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미카엘을 살려 낸 것이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에게서 몇 걸음 물러섰다.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 있다 보니 제대로 된 생각이 되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집요하게 따라오는 미카엘의 시선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다행히 흥분과 동요, 공포는 금방 가라앉았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그는 수없이 많은 일들을 레티시아를 위해 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건 작은 보답일 뿐이었다.

마땅히 해야 해서 하는 보답이 아닌, 그녀가 단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보답.

“제가… 폐하를 살렸다는 게 알려지면, 폐하께 도움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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