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침묵이 흘렀다.
미카엘의 눈이 흔들렸다.
레티시아가 뜻한 바를 정확히 알아들은 게 틀림없었다.
‘미카엘에게 도움만 된다면… 상관없어.’
만약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레티시아는 제국 역사상 유래 없을 정도로 신성력이 강한 성녀가 될 것이다. 그 말은, 레티시아의 주인이 종교를 통해 전 제국은 물론 대륙을 통합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신을 믿지 않는 성녀라니.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지만 레티시아는 되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카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미카엘의 연인으로서 지낸 지난날들은 달콤했지만 그에게 더는 아무런 도움도 못 된다는 자괴감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자괴감은 잠든 고양이처럼 하루 대부분은 존재감 없이 구석에 그저 존재하기만 했지만, 한번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면 온종일 레티시아의 신경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기회가 왔다.
미카엘에게 도움이 될 기회가.
레티시아는 성녀로서 미카엘의 치세에 도움이 될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찬찬히 그려 보았다.
‘마지막 성녀가… 언제였더라.’
한 삼백여 년 전에 나타난 성녀는 그 당시 세력이 강력하던 신전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결국 반역자로 몰려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던 그녀를 떠올리니 입맛이 썼다.
‘나는 황실의 상징이 되겠지.’
미카엘은 무엇이든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레티시아는 제국에 유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성녀가 될 것이다.
그녀의 힘은 곧 미카엘의 힘을 뜻했으니, 미카엘 역시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야.’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한번 성녀가 되고 나면, 레티시아는 결코 소소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그녀에게 성녀로서의 힘과 몸가짐을 요구할 테니까.
‘하지만… 할 수 있어. 미카엘을 위해서라면.’
아니, 오히려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위해 자신의 일상을 희생하기를 바랐다. 그녀는 단지 미카엘의 곁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미카엘에게 힘이 되고, 큰 도움이 되며,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
매분 매초가 촉박한 상황이었지만 레티시아는 참을성을 가지고 미카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말 한마디로 미카엘에게 자신의 미래를 맡겼다. 지금은 그의 선택을 기다릴 때였다.
마침내, 미카엘의 입이 열렸다.
“안 돼.”
“미카엘!”
레티시아는 항의하듯 소리쳤다.
“네가 뭘 원하는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하지만 레티시아, 그건 너무 위험한 길이야.”
“미카엘의 곁에 있으면 언제나 위험할 거예요.”
레티시아는 차분하게 반박했다.
그 말대로였다.
자신은 미카엘의 곁에서 아무런 직책이 없어도 납치당하고, 괴물로 변하고, 몇 번이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기를 겪었다.
성녀라는 직책을 갖는다고 딱히 더 위험해질 것도 없었다. 비록, 성녀라는 이름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미카엘의 대답은 조금 느리게 돌아왔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네 삶이 망가져 버릴 수도 있어.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아.”
“미카엘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전 망가져도 괜찮아요.”
레티시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내가 괜찮지 않아.”
“미카엘이 지켜 주면 되잖아요.”
레티시아는 턱으로 출구 쪽을 가리켰다. 이미 결론은 났고,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까 또 다른 이상한 이유로 반대할 게 아니라면 이제 나가서 미카엘을 찾고 있을 멍텅구리들을 쓸어버려요. 네?”
미카엘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 사람을 죽인 자의 웃음이라곤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맑고 평온한 웃음이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성녀님.”
* * *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미카엘은 혼돈에 빠진 황궁을 몇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정리할 수 있었고, 그다음에야 둘은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둘은 그녀의 발현을 공식적인 행사에서 알리기로 합의했다.
죽은 사람을 살려 내는 의식을 치르게 될 행사였다.
유력한 후보자는 페르 공작이었는데, 성녀에 의해 새로운 삶을 얻은 반역자는 그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왜 제가 성녀가 된 걸까요?”
레티시아는 침대에 걸터앉아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실제로 미카엘에게 질문을 던진 건 아니었다.
단지,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맴도는 질문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서는 못 버틸 것 같아서 나온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리고 미카엘은 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왜 여태까지 말해 주지 않았나 의문이 들 정도로 너무나 잘.
“성소 때문이다.”
“…그때 불태운 탓인가요?”
“그래. 성소가 파괴되는 동시에 치유하면서 네 안에 자리 잡은 게 분명해.”
“하지만 그렇게 나은 게 제가 처음은 아니잖아요.”
레티시아는 전 황제를 떠올렸다.
그 역시 불치병에 걸려 죽어 가다 성소를 불태워 치유했다. 따라서 만약 미카엘의 가설이 맞다면 그 역시 자신과 같은 힘을 가져야 했다.
‘그럴 리 없어.’
만약 황제가 강력한 성력을 가진 성자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당연히 황권에 도움이 될 터.
하지만 황제는 자신이 신성력을 가졌다고 알린 적이 없었다.
“그렇지.”
미카엘이 동의했다.
“하지만… 그자는 힘을 발현하지 않았어.”
“성소는 잠재력만 심어 준다는 건가요?”
“그래.”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 역시 가능성은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평생 발현하지 않았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다.”
“왜죠?”
레티시아는 순수하게 궁금해하며 눈을 깜박였다.
“저도… 그저 미카엘을 지키고 싶다고만 생각했는걸요.”
미카엘은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눈길 끝에선 따스한 감정이 피어났다.
“너는 그자와 달라. 당연히 언젠가는 발현하는 게 맞았어.”
레티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미카엘에게 살해당한 전 황제와 자신의 차이점을 떠올리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전 황제는 아마, 누군가를 진정으로 살리고 치유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 정도를 제외하면.’
하지만 성자나 성녀는 자기 자신을 치유할 수 없다. 힘의 발현은 오직 타인을 위해서만 이루어진다.
당연히, 전 황제는 평생 힘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카엘이 조금 전 암시한 한 가지 사실이 레티시아의 마음에 턱, 하고 걸렸다.
‘미카엘은 내가 성녀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결과였으니까.
오히려 잘된 일이기도 했고.
그녀는 미카엘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맞잡은 손으로부터 시작되어 전신에 퍼져 나갔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에게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괜찮아요. 나쁘지 않았어요. 다만 성녀라는 말이 좀, 뭐랄까……. 좋긴 한데, 저랑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좀 어색해요.”
“그래?”
미카엘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듣고 보니 맞는 것 같군.”
“미카엘도요?”
“그래. 네겐 성녀처럼 수수한 호칭은 어울리지 않아.”
“미카엘!”
“무언가 드높은 게 좋겠군.”
레티시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이 성녀라는 호칭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는 되레 그 호칭이 너무나 고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신전과 황실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어요. 아무리 황제라도 저를 대신관으로 임명하지는 못할걸요?”
미카엘이 피식 웃었다.
“감히 대신관 따위에 네 이름을 빗댈 수 없는 자리를 생각했는데.”
“…성황을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성황은 먼 옛날 사라진, 제국의 지도자 직책 중 하나였다. 황제만큼은 아니지만 황제 바로 다음 권력을 휘두르던 종교 지배자.
레티시아는 정말로 그런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
성녀의 이름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전설적인 존재의 이름을 덮어 쓰다니.
그런 골치 아픈 일은 정말로 질색이었다.
미카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성황이라니. 그런 고리타분한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아, 너는.”
“그럼, 대체 뭔가요?”
레티시아는 조금 흥분하며 질문을 던졌다. 미카엘이 이리저리 추측만 하게 만드니 속이 달았다.
“제국에서 가장 드높은 사람.”
“……?”
레티시아는 귀를 의심했다.
제국에서 가장 드높은 사람이라면, 황제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제게… 반역을 하라는 건가요?”
미카엘은 웃지 않았다.
대신, 그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레티시아의 손등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다 댔다.
“황후가 되면 저 밖의 모든 자들을 무릎 꿇릴 수 있어, 레티시아.”
레티시아는 머리를 도리질 쳤다.
머리가 하얗게 변해 제대로 된 대응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말이 단순한 농담에 불과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불분명한 걸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내… 아내가 되어 주겠어?”
“…….”
숨이 턱 막혀 왔다.
레티시아는 차마 대답하지 못한 채 눈이 시려 올 정도로 크게 뜨고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미카엘은 으레 그 감정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말도 안 돼.’
물론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아내가 되기를 원했다. 아마, 미카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하지만 그녀는 평민이었고, 평민 황후가 미카엘에게 불러올 타격은 여태까지 그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도 남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레티시아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무거운 혀를 억지로라도 움직이려 했지만, 의미 없는 신음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레티시아.”
미카엘이 그녀의 손을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그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에요, 미카엘.”
“아니지.”
미카엘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의 눈은 묘한 흥분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성녀와 황제의 결합은 그 어떤 결혼보다도 더욱 굳건한 기반을 가져다줄 거야.”
“……!”
레티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럼 일부러…….”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의 발현은 보통 소중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루어지더군. 나쁘지 않은 기회라고 생각했어.”
레티시아는 어이가 없어 어깨를 떨구었다. 겨우 그녀와의 결혼을 위해 자기 자신의 죽음마저 이용하다니.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겁해요, 미카엘.”
미카엘이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잖아, 레티시아.”
아.
깨달음이 레티시아를 스쳤다.
‘그래, 미카엘은 원래 이런 남자였지…….’
하지만 결코 싫지 않았다.
지난 10년을 속아 왔는데, 지금 한 순간 더 속았다고 좋던 감정이 사라지겠는가?
“…네. 미카엘의… 아내가 되겠어요.”
미카엘은 대답을 듣자마자 레티시아를 와락 껴안았다.
레티시아는 눈을 감았다.
미카엘에게서는 아마 평생 지울 수 없을 듯한 피 냄새가 났다.
상관없었다.
그 또한 미카엘의 일부였으니까.
미카엘이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사랑한다, 레티시아.”
레티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난 10년.
자신은 미카엘의 침묵 아닌 침묵을 번역해 왔다.
그러니 이번에는 미카엘이 자신의 침묵을 번역할 차례였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그녀는 미카엘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미카엘은 그녀를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화답했다.
그 시선 속에 담긴 열망에 레티시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미카엘…….’
그녀는 속으로 그의 이름을 읊조리며 탄탄한 어깨에 손을 얹었다.
긴 밤이 시작되었다.
더는 말이 필요 없는 자들을 위한 달빛 찬란한 밤이었다.
본편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