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화 (120/150)

외전1화

외전 1. 에버 애프터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가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었다.

즉위 초기 일으킨 피바람으로 인해 폭군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그 또한 한때였다.

데브란트 제국의 안과 밖을 평정한 미카엘은 정적에겐 무자비했으나 백성들에겐 너그러운 황제였기 때문에 평판은 갈수록 좋아졌다.

그리고 즉위 몇 년 후.

전보다 덜하다고는 하나 여전히 피에 젖어 있던 그의 이미지를 바꾸어 주는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성녀의 출현이었다.

황제의 비서였던 레티시아 우즈가 성녀로 발현했다는 사실은 전 제국을 충격에 빠트렸다.

하지만 데브란트 제국은 드넓었다.

그 소식이 닿지 않은 작은 산골 마을이 있을 만큼.

***

“덥네요.”

레티시아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쳤다.

여름의 열기가 그들의 머리 위에서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 앞에 살짝 앞서, 그림자를 드리워 주는 미카엘을 흘낏 바라보았다.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안 돼.”

미카엘의 단호한 대답이 들려왔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

예전이나 지금이나 미카엘이 한번 결정을 내리면 그 누구도 바꿀 수 없었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그의 수수께끼 같은 결정을 따르는 데 익숙했다.

“그래도 이유 정도는 말씀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 우리가 이런 시골 마을로 와야 하는 거죠?”

“확인해야 할 게 있으니까.”

“그게 뭔데요?”

“가 보면 알아.”

“…….”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향해 눈을 흘겼다.

“알았어, 알았어.”

미카엘이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새로운 성소가 나타난 것 같아.”

“…네?”

레티시아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요!”

“나도 잘 믿어지진 않아.”

미카엘이 수긍했다.

“하지만 보고받은 징후들은 모두 옛 문헌에 기록된 성소의 발현과 비슷해.”

“성소가 황궁 말고도 존재할 수 있었군요.”

미카엘의 대답은 조금 느리게 돌아왔다.

“…존재할 수가 없었지, 여태까지는.”

레티시아는 곧바로 미카엘이 하고 싶은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성소는 황실에만 있어야 했다.

그러니 황실이 아닌 곳에서 성소가 나타났다면…….

‘모두 파괴당했겠지.’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레티시아는 성녀이기는 했으나 딱히 신을 믿진 않았다.

그녀에게 성력은, 미카엘을 돕기 위해 쓸 수 있는 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생각했지만.

그들은 레티시아의 신성력을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졸지에 종교의 구심점이 된 레티시아는 당황스럽긴 했으나 이내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종교와 황실이 결합하면 황권이 강력해진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었다.

‘미카엘에게 도움이 될 거야.’

레티시아는 미카엘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새로운 성녀에 어울리는 성소가 될 거야.”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미카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게 낡은 성소는 어울리지 않아, 레티시아.”

레티시아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자신에게 황실의 성소는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레티시아는 애써 그 기억을 흘려보냈으나, 미카엘을 완전히 지우고 싶어 하는 듯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레티시아는 굳이 미카엘이 알려 주지 않아도 성소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새로운 성소는 새로운 성녀를 반기듯, 그녀를 급속도로 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성소가… 맞아요.”

“다행이네.”

미카엘이 소리 내어 웃었다.

“만약 여기까지 헛걸음했다면, 네게 죽을 것 같았거든.”

“미카엘!”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등을 힘껏 내리쳤다. 미카엘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 채,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이쪽으로 와.”

레티시아는 그를 향해 서둘러 다가갔다.

‘아.’

나무와 풀숲 사이에 반쯤 가려진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여기야.’

레티시아는 자석에 끌려가는 쇳덩어리처럼 속절없이 동굴로 다가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쳐서 반절 감겨 있던 금안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사람 한 명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동굴의 입구에 도달했을 때.

“……!”

거대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억지로 잡아당겼으나, 레티시아는 못 박힌 것처럼 땅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아요, 미카엘.”

그녀는 고개를 젓고는 동굴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미카엘이 자신을 위해 찾아낸 새로운 성소다. 겨우 폭발 따위에 겁을 먹을 순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성녀잖아.’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성녀다.

본디도 겁이 없었던 레티시아는 더더욱 겁이 없어졌는데, 자신이 그 무슨 일을 벌이든 수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레티시아는 소스라쳤다.

힘이 느껴졌다.

거대한, 제어되지 않는 힘이……!

그리고 그 힘이, 레티시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벌 떼처럼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공격적이거나 위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환영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잠시 후.

동굴의 힘은 그녀와 미카엘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그 증거로 레티시아는 동굴 내부의 흐름을 마치 그녀 자신의 몸처럼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었다.

100개가 넘는 눈이 생긴 듯한 생경한 느낌이었다.

‘…….’

레티시아는 신을 믿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 사람의 가치관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그녀의 뒤로 다가온 미카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찮은가?”

“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언짢은 듯해서.”

“그런가요?”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니에요. 그냥…….”

그녀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제는 이런 것들이… 제 삶이구나 싶어서요.”

추상적인 대답이었지만 미카엘은 그녀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원치 않으면 다 그만둬도 돼.”

“…….”

“성녀고 뭐고, 전부 거짓이었다고 발표할 수도 있다. 그냥…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

레티시아는 미소 지었다.

한때, 그녀는 미카엘의 이런 말들에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했다.

실제로 그의 곁을 떠나 원하는 삶을 살고자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많은 일들을 겪었다. 원한다고 생각했던 삶도 겪어 보았다.

그 모든 경험 후에 레티시아가 내린 결론은, 미카엘의 곁에 있고 싶다는 것이었다.

도움이 되는 동반자로서.

그 목표에 성녀는 그 무엇보다도 기꺼운 조건이었으므로, 레티시아가 굳이 성녀로서의 삶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게 제가 원하는 삶이에요.”

미카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레티시아는 그의 잘생긴 입매가 작은 호선을 그렸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천천히 동굴을 답사했다.

마침내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 이르렀을 때.

레티시아는 작은 물웅덩이를 발견했다.

물웅덩이의 주위에는 초록빛 이끼가 군데군데 끼어 있었다.

“아기 성소네요.”

레티시아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어딜 보나 황실의 성소가 막 발현했을 적의 모습 같았다.

그녀가 물웅덩이에 손을 담가 보려고 할 때였다.

‘……!’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환영받지 못하는 침입자가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뭐지?’

레티시아는 미카엘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동굴 입구까지 빠른 걸음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할 필요도 없었다.

미카엘도 무언가를 느낀 듯,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레티시아의 경계심 어린 발걸음은 동굴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멈추어지고 말았다.

“아이들……?”

레티시아의 입에서 멍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둘 다 열 살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이는 소년은 진흙에 빠진 다리를 빼내느라 끙끙거렸고, 그 옆의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소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입자’의 정체를 알게 되자 맥이 탁 빠진 레티시아는 아이들을 향해 툴툴거렸다.

“너희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길을 잃었어요.”

소년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놀다가…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와 버렸어요.”

레티시아는 소년의 다리를 진흙에서 빼내 주기 위해 다가갔다.

그때, 미카엘이 그녀를 앞질러 소년을 진흙탕에서 불쑥 들어 올렸다.

레티시아는 싱긋 웃었다.

“같이 내려가자.”

내려가는 길 내내 두 아이는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종알거렸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카야, 남자아이의 이름은 막스.

둘은 남매였는데, 레티시아의 생각대로 남자아이 쪽이 오빠였다.

“집엔 할머니만 계실 거예요. 하지만 곧 엄마, 아빠가 돌아와요.”

“그래?”

레티시아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어차피 아이들만 집에 데려다주고 바로 황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새로운 성소를 보호하기 위해선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얼마간 후 도착한 아이들의 집은 소담한 주택이었다.

할머니 혼자 뜨개질을 하고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는 카야를 위한 원피스를 짜고 있는 듯했다.

“할머니!”

카야와 막스는 거의 동시에 할머니를 향해 달려갔다.

“으이구, 내 새끼들. 왜 이렇게 늦었어?”

아이들은 자초지종을 서둘러 설명했다.

당연히 레티시아와 미카엘이 자신들을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아이들의 행색을 살폈다.

“아니, 진흙투성이잖아! 막스, 카야, 가서 깨끗하게 씻고 오너라. 그다음에 간식 좀 먹고.”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터덜터덜 씻기 위해 사라졌다.

잠시 후.

아이들의 부모, 모슬리 부부가 집으로 돌아왔다.

모슬리 부부는 보기 드문 방문객을 반가워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저녁을 같이 들고 가세요. 제가 손이 참 크거든요. 바깥 얘기도 좀 해 주시고요.”

레티시아는 손을 내저었다.

이 부부에겐 손님 두 명을 먹이는 것도 제법 부담이 되는 일일 것이다.

“괜찮아요. 저희들은 그냥, 아이들을 집에 안전히 데려다주러 온 거였어요.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아요.”

“폐라니요. 겨우 식사 한번 대접하는 건데.”

모슬리 부인이 그들을 향해 윙크했다.

“게다가 도시에서 온 귀여운 신혼부부를 만나는 일은, 여기에서 날마다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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