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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화 (121/150)

외전 2화

모슬리 부인이 준비한 식사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정성이 듬뿍 담겨 있었다.

레티시아와 미카엘은 가리는 음식 없이 모두 잘 먹었다.

하지만 카야는 달랐다.

대놓고 당근이란 당근은 모조리 골라내었던 것이다.

모슬리 부인이 엄한 목소리로 딸에게 일렀다.

“카야, 편식을 하면 안 돼요.”

“치이…….”

카야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당근은 시러요오…….”

“카야는 왜 당근이 그렇게 싫을까? 아빠는 맛있기만 한데.”

모슬리 씨가 딸과 부인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맛도 이상하구, 너무 딱딱하잖아요. 이가 아파요.”

모슬리 씨와 모슬리 부인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모슬리 부인은 한결 상냥해진 목소리로 딸에게 물어보았다.

“이가 아프구나. 어디가 아픈데?”

“요오기.”

카야는 앞니 바로 옆을 가리켰다.

바로 정확하게 짚는 것이, 당근이 먹기 싫어 즉석에서 꾸며 낸 것 같지가 않았다.

“아이고, 미안해.”

모슬리 부인이 카야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가 많이 아팠구나. 딱딱한 건 먹지 말렴.”

“절대 안 먹을래요.”

카야는 더 이상 당근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신이 난 모양인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사이좋은 남매, 인자한 할머니, 두 남매를 차별하지 않고 아낌없이 사랑하는 부모님까지.

어딜 보나 그녀가 어릴 적, 그토록 바라던 가족의 모습이었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금 그녀 자신에 대해 화가 나기까지 했다.

‘바보 같아. 나이가 몇인데.’

레티시아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 가족과의 관계도 단절된 지 오래였고.

어린 시절의 악몽에서 벗어날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난 것이다.

레티시아는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미카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두 청록빛 눈과.

“……?”

레티시아가 눈을 깜박이자, 미카엘이 그 특유의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식사가 모두 끝난 이후.

모슬리 부부는 차를 끓여 열심히 날랐다.

아직도 꿈 많은 소녀처럼 생기 있는 눈을 지닌 모슬리 부인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도시 얘기 좀 해 주세요. 도시는 정말로 그렇게 멋진가요? 사람의 키 다섯 배는 될 정도 높이의 건물도 많다던데……. 정말인가요?”

레티시아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미카엘의 정체를 알게 되면 소스라칠 것이다.

그렇다고 모슬리 부부를 비웃을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레티시아도 이들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면 똑같은 궁금증을 가졌을 테니까.

“도시라고 다 많지는 않아요. 수도에만 많죠.”

“어쩐지 두 분 다 좋은 옷을 입고 있다 했더니, 수도에서 오셨군요.”

모슬리 씨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귀족분들이십니까?”

“아, 아니에요.”

레티시아는 손을 내저었다.

엄밀히 말해, 자신은 귀족이 아니니 거짓말이 아니었다.

미카엘은 그가 가장 잘하는 대답을 했다.

즉, 침묵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귀족분들이라면 저희 아이들을 친절하게 집까지 데려다주셨겠어요? 으름장을 놓아서 겁에나 질리게 하지 않으면 다행이죠.”

모슬리 부인이 쾌활하게 대답하면서 찬장에서 쿠키를 꺼내 왔다.

“수도살이라…….”

모슬리 씨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했다.

“안 무섭습니까?”

“무섭다니요?”

레티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도시도 다 사람 사는 곳인걸요.”

레티시아의 고향은 산골 마을이었지만 결코 동화 속 순박한 사람들의 마을이 아니었다.

수도 역시 비슷했다.

결코 동화 속 아름다운 마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옥도 아니었다.

“…수도는, 황제 폐하가 계시잖습니까.”

모슬리 씨는 그 말이 마치 기밀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숨죽여 말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흘끗 바라보았다.

모슬리 씨의 말에 담긴 함의는 바보가 아니고서야 모두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황실의 암투 속에서 살아남은 레티시아와 미카엘은 말할 것도 없다.

‘……?’

레티시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미카엘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간 탓이었다.

“근래 들어 사람은 안 죽인다고 생각했는데…….”

“그거야 잠깐 변덕이겠죠.”

모슬리 부인이 흥분하며 끼어들었다.

“들었어요. 폐하께서 즉위하면서 죽인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강을 빨갛게 물들였다고요!”

“시체를 강에 던질 만큼, 황실이 바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레티시아는 확신했다.

미카엘은 진심으로 지금 상황을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원래 속이는 걸 좋아했지…….’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평생 동안 남을 속여 온 사람이다.

이런 순간조차 남을 속이려 드는 건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갑자기, 아늑한 집 안에 비명이 울려 퍼진 건.

“어머니!”

모슬리 씨와 모슬리 부인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할머니가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빈말로도 기력이 좋아 보인다고 할 수 없는 노부인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약!”

모슬리 부인의 비명에, 모슬리 씨가 재빨리 뛰어가 약병을 가지고 왔다.

낡고 녹슨 철제 약통이었다.

그 안에서 나온 건, 알약도 무엇도 아닌 퀴퀴한 냄새가 나는 가루였고.

아무리 봐도 효능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저런 건 차라리 안 먹는 게 나아.’

레티시아는 그간 제대로 된 의료 처치를 받지 못해 상태가 악화된 이들을 많이 봐 왔다.

“잠깐만요.”

레티시아는 그들을 제지하고는 할머니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의사 선생님이셨습니까?”

“비슷해요.”

레티시아는 잠시 심호흡했다.

무턱대고 치료하겠다고 나서기는 했지만, 아직 그녀는 신성력을 다루는 데 미숙했다.

‘…할 수 있어.’

레티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강렬한 빛이 그녀의 주위로 모이기 시작했다.

“……!”

소리 없는 경악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레티시아는 눈을 감았다. 익숙한 따스함이, 힘이 단전에서부터 느껴졌다.

‘…따뜻해.’

그녀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힘을 움직였다.

레티시아는 결코 본능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신성력은 본능을 따라야만 하는 힘이었다.

그간 미카엘과 레티시아는 신성력을 섬세한 기술로써 개발하기 위해 각종 힘을 썼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론은 단 하나였다.

그때그때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는 것.

처음에 레티시아는 상당히 불안해했다. 실은, 지금 역시 그랬고.

하지만 그간 레티시아는 신성력 운용에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 경험들을 믿는 수밖에.

빛이 흘러 노인의 몸을 사르르 덮은 순간.

아이들의 할머니는 눈을 떴다.

“잠을… 잤나, 내가?”

반쯤 잠에 취한 목소리.

방금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던 사람이라기보단 깊은 잠에 들었다 막 일어난 사람의 모습이었다.

“어머니!”

모슬리 부부는 눈물지으며 할머니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왜 바닥에 있지?”

“쓰러지셨어요. 그런데…….”

셋은 일제히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레티시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귀찮은 일을 피하려면 도망치는 게 상책이겠지만, 그녀는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성녀님……?”

모슬리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레티시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직 이들은 수도에 성녀가 출현했다는 소식조차 모를 것이다.

‘큰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물론 불가능한 소망이었다.

이미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조차 레티시아의 힘을 보면 기겁하곤 했으니까.

“……!”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슬리 씨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급기야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성녀님…….”

할머니는 허공에 성호를 그었다.

예전이었다면 레티시아는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알았다.

세력이 완전히 쇠퇴한 종교의 상징적인 의식이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이미 신을 믿고 있었기 때문인지,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상황을 받아들인 건 할머니였다.

그녀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성녀님의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 이 노인은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합니다.”

레티시아의 몸이 움찔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말에서, 먼 옛날 그녀를 구박했던 친할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노인은 달랐다.

그녀는 진심으로 레티시아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할머니께선 오래 사실 거예요.”

사실이었다.

한번 신성력을 몸에 담은 사람은 웬만한 병에 걸리지 않았고, 걸리더라도 빨리 나았다.

“성녀님이… 어쩌다… 저희 집에…….”

레티시아는 이들이 제각기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설령 자신이 단순한 우연일 뿐이라고 말하더라도, 이 사람들은 신의 가호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알려 주어야 할 사실은 있었다.

“저는 지금 황궁에 기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데, 폐하께서는…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니세요.”

“그, 그… 잘못했습니다!”

모슬리 씨가 잘못을 빌며 바닥에 엎드렸다.

모슬리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레티시아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는데!’

그녀는 서둘러 모슬리 부부를 일으켰다.

“진정하세요. 일러바칠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냥, 오해를 거두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

잠깐의 침묵 이후.

모슬리 부인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성녀님은 저희 아이들을 구해 주시고, 아무런 대가 없이 어머님 역시 구해 주셨죠. 성녀님의 말씀이라면… 그 무엇이든 믿고 따르겠습니다.”

레티시아는 조금 당황했다.

그녀가 바란 건 이런 맹목적인 신앙 역시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익숙해진 것 중 하나였기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그리고 이 집에 무한한 행복과 평안이 깃들길 기원하겠습니다.”

아무런 신성력이 들지 않은 평범한 말놀음에 불과한 축사였다.

하지만 모슬리 부부와 할머니는 감격해하며 그녀와 미카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배웅했다.

“휴우.”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레티시아는 참았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앞서 걷던 미카엘이 뒤돌아서더니 무심한 척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다.”

“뭔가요?”

“왜 내 편을 들었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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