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
레티시아는 조금 어이가 없어 할 말이 없어졌다.
“…제가 황제 폐하의 편을 드는 걸, 원치 않으세요?”
그녀는 일부러 ‘황제 폐하’라는 호칭에 강세를 주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도발에 넘어오지 않았다.
“그냥, 궁금해서.”
“그런 황당한 오해를 보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그게 전부예요.”
“…그렇군.”
미카엘은 무언가 생각에 곰곰이 잠긴 듯했다.
레티시아는 그를 무시했다.
미카엘의 생각이 이상하게 튀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신경이 쓰인다니까… 대대적으로 이미지 개선 사업을 시작해야겠군.”
“…네?”
레티시아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이미지 개선 사업이라니?
미카엘은 자신의 이미지가 괴물, 악마라고 해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도리어 레티시아가 가슴 아파할 뿐이었다.
미카엘의 대답은 간결했다.
“네가 싫어하니까.”
“미카엘!”
레티시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 때문에 이미지 개선 사업까지 하겠다니.’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는 와중에서도 그녀의 머리는 바삐 돌아가기 시작했다.
‘확실히 평판을 개선하는 게 좋긴 좋을 거야.’
분명, 미카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많이 나아졌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성녀인 자기 자신이라는 걸 레티시아는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미카엘의 달라진 모습을 아직은 모르는 지역이 많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더 심할 거고.’
미카엘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해한다. 너도 잔학무도하고 인정사정없는 폭군의 황후가 되는 건 원하지 않겠지.”
“미카엘!”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째려보았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미카엘은 좀 더 들어 보라는 듯 고개를 살짝 젓고는 말을 이었다.
“나도 네가 폭군의 황후가 되는 건 원하지 않아, 레티시아.”
“…….”
얼핏 보면 말장난처럼 들렸지만 미카엘의 말에 담긴 배려에 레티시아는 잠시 말을 잃고 말았다.
“…계속, 신경 쓰고 있었어요?”
“네가 신경을 쓰는데, 내가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어.”
“들켰네요.”
레티시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미카엘처럼 눈치가 빠른 사람이 레티시아의 뻔히 보이는 속내를 알아채지 못했다면 그것도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거짓말.”
미카엘이 가벼운 투로 레티시아를 질책했다.
레티시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자기는 거짓말을 무슨 10년 동안 해 놓고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옛날 얘기를 꺼낸 자신에게 화가 났다고 생각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과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제 앙금이야 다 풀렸다고는 해도 실제로 자신이 미카엘에게 속았던 세월이 어디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미카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방금 그 말, 다시 한번 해 봐.”
레티시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화, 많이 났어요?”
“아니?”
“화가 안 났다면 왜 그런 유치한 말을 해요?”
“…….”
미카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레티시아는 조금 긴장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미카엘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 많이 다친 그의 마음을 정말로 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그래, 유치하군. 하지만 유치해도 좋으니 다시 한번 말을 해 주겠어?”
레티시아는 이제 기가 찼다.
미카엘은 확실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는데, 화가 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유치한 요청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됐어, 그냥 원하는 대로 해 주자.’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 10년…….”
“그렇게 말고. 그대로 말해 줘.”
“그대로요?”
어려울 것이야 없지.
레티시아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자신이 방금 한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하는 것이야 쉬웠다.
“아니, 자기는…….”
“그만.”
미카엘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다시 한번 더. 거기까지만.”
레티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카엘은 어릴 때가 생각날 정도로 이상하게 굴고 있었다.
“아니, 자기는…….”
미카엘은 흡족한 얼굴로 레티시아를 향해 지시했다.
“앞에 떼고.”
“자기는……!”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레티시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기.
요즘 평민들이 연인들을 부를 때 쓴다는 호칭이었다.
보통은 귀족들의 유행이 평민들에게로 흘러들어 가나, 그 호칭의 가벼움 때문인지 최근 들어 귀족 연인들 사이에도 돌고 있는 유행이었다.
“미카엘!”
레티시아는 어이가 없어 미카엘을 향해 소리쳤다.
미카엘은 쿡쿡 웃었다.
“미안. 근데 네가 너무 귀여워서. 그리고… 듣고 싶기도 했고.”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은 없었다.
미카엘이 그녀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눈치를 살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레티시아. 지금 상황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보다는 더 나은 때에 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빨리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말을 끊었다. 미카엘의 장황한 말이 영 익숙지 않아 몸이 배배 꼬였기 때문이었다.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미카엘?”
“…이거.”
미카엘이 그녀에게 작은 명패를 건네주었다.
“……!”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이건…….”
그녀는 눈을 의심하면서 미카엘이 자신에게 준 신분 패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이건, 단순한 신분 패가 아니었다.
레티시아 우즈의 신분을 보증함과 동시에 그녀가 제국 어디든 자유자재로 출입할 수 있도록 허하는 미카엘의 명이 적시되어 있었다.
이 작은 신분 패 덕분에 레티시아는 제국 전체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다른 나라와의 국경마저도.
“황후한테 이런 걸 줘도 돼요? 언제든 의무를 내팽개치고 제국 밖으로 튀어도 된다는 명패인데.”
“네가 숨을 쉴 수 있는 구석 하나는 만들어 주고 싶었어.”
미카엘의 어조는 가벼웠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그렇지 않았다.
“미카엘…….”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미카엘만큼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레티시아가 황제의 반려가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해도 또다시 황실에 갇힐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 신분 패가 보장하는 것처럼 황후의 자리를 버리고 제국 밖으로 튀어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그건, 미카엘을 버리는 것이기에.
레티시아는 신분 패를 소중히 품 안에 넣었다.
그녀가 이것을 쓸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황후 자리를 버리기 위해서는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이 그 가능성을 보장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레티시아에게는 숨 쉴 구멍이 생겼다.
정말로, 견디기가 힘든 순간이 오면…….
그녀는 이 신분 패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힘든 순간순간을 버텨 낼 수 있을 테니까.
지난 시간들을 통해, 레티시아는 사람을 절망에 빠트리는 건 위기가 아닌 희망의 부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방금, 미카엘은 레티시아에게 희망을 주었다.
작지만 모든 것을 담고 있는.
***
“진짜로 갔나 봐…….”
막스와 함께 문틈으로 손님들의 동태를 살피던 카야는 시무룩하게 입을 삐죽거렸다.
어떻게 만난 성녀님인데, 이렇게 보내다니.
카야는 엄마 아빠를 사랑했지만 이럴 때만큼은 바보로 느껴졌다.
성녀님이라는데, 어떻게든 대화라도 좀 더 해 봐야 하는 게 아닌가!
그때, 막스가 창문으로 다가갔다.
“뭐 해? 빨리 와.”
“……!”
카야의 눈이 커졌다.
막스 역시 성녀를 이대로 보내기는 아쉬운 모양이었다.
창문은 그동안 아이들의 비공식적 출구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쉽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카야는 재빨리 막스를 따라 창틀을 넘어 바닥에 착지했다.
“서둘러.”
막스가 재촉했다.
아이들은 딱히 레티시아 우즈에게 뭘 바라거나 요청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단지 ‘성녀님’이라는 신기한 존재 곁에 좀 더 머무르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성녀와 기사의 뒤를 쫓았다.
밤이면 나와서 부모님 몰래 찬장에서 간식을 꺼내 먹던 습관이 들어 있었기에, 아이들의 발소리는 제법 조용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기가… 어디지?’
카야와 막스는 어리둥절해하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성녀와 기사를 쫓았는데, 왜 그 둘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도 않는다는 말인가?
“잠깐만.”
막스가 카야를 향해 속삭였다.
“무슨 소리가… 들려.”
카야는 막스를 따라 덤불 사이로 기어들어 갔다.
‘……!’
그곳엔, 지친 모습이 역력한 성녀가 익숙한 듯 기사에 몸을 의지한 채 쉬고 있었다.
“완전 동화책같아…….”
카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젊은 기사가 그들이 숨어 있는 덤불을 향해 부드럽게 윙크한 건.
“기사님이 우리를 봤어!”
카야가 막스에게 속삭였다.
“미카엘?”
성녀가 지친 눈을 가늘게 뜨고는 ‘미카엘’이라는 기사를 향해 웅얼거렸다.
“그쪽에 뭐가 있어요?”
“귀여운 들짐승이 있던데.”
성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죽이지는 마세요. 배 안 고프거든요.”
카야와 막스의 눈이 크게 커졌다.
성녀는 정말로 기사가 어린 들짐승을 죽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너야말로 나를 너무 비정한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닌가. 어린것들을 죽일 생각은 없어.”
미카엘은 투덜거리면서 덤불 쪽으로 다가갔다.
카야와 막스는 그의 위압감에 질려 입을 틀어막았다.
단순히 성녀를 지키는 아름다운 기사라고만 생각했는데, 성녀보다도 직급이 높은 고위 귀족 출신 기사였다니.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비로운 성녀님이면 몰라도, 이 사람은 그들을 엿보러 쫓아온 아이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사람의 혼을 빼앗을 정도로 잘생긴 외모의 젊은 기사는 아이들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을 뿐이었다.
“부모님께서 걱정하시겠다. 이만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
카야와 막스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카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 어른이 되면 수도로 가서 성녀님의 곁을 지킬래. 아까 그 기사님처럼.”
막스 역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도.”
아이들이 그 ‘기사님’의 정체를 알게 되기까지는 자그마치 10년이 흘러야 했다.
두 남매는 황실 기사단의 촉망받는 수습 기사로서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와 마주하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