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외전 2. 5월의 신부
레티시아는 한 차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긴 자주색 카펫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저 카펫을 걷고, 신 아래에서 맹세하고, 미카엘과 키스하면…….
그녀는 데브란트 제국의 황후가 된다.
“어때?”
레티시아가 등을 돌리자 미카엘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안 내켜?”
“…안 내킨다고 하면, 결혼식을 취소할 건가요?”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레티시아는 알았다. 미카엘의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가 원한다면 그는 벌써 일주일 뒤로 성큼 다가온 결혼식을 취소하고 그 부작용을 모조리 감내할 것이다.
그만큼, 그는 레티시아를 사랑했으니까.
“네가 싫어하는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말은 잘해요, 말은.”
레티시아는 가볍게 대꾸하면서 자신과 미카엘이 식을 올릴 신전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겨우 결혼식을 위해 신전을 새로 짓다니, 너무 과한 것 아닌가요?”
“성녀님의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야 하지 않냐는 아우성이 하도 들려와서였거든?”
“…….”
말문이 막힌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째려보았다.
“이렇게 말을 잘하는 줄 알았다면 진작 떠나 버리는 거였는데…….”
“…미안.”
미카엘의 입을 닫아 버리게 할 수 있는 마법의 말이었다.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 이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어, 레티시아.”
레티시아는 그의 말에 담긴 무게를 느꼈다.
결코 농이 아니었다.
“결혼식 아침에 도망치겠다고 해도요?”
이것 역시, 농이 아니었고.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기왕이면 지금 당장 도망칠까?”
“…도망은 저 혼자 해야죠.”
“그건 안 돼.”
미카엘이 처음으로 그녀의 말에 반기를 든 순간이었다. 레티시아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알겠어요. 저 역시 미카엘을 내버려 두고 혼자 도망칠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래. 이렇게 말 잘 듣는 약혼자를 두고 혼자 가겠다니, 안 될 말이지.”
미카엘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레티시아는 졸지에 그의 단단한 가슴과 마주하게 되었다.
“숨… 막히거든요!”
다음 순간.
레티시아는 정말로 숨이 막히게 되었다. 미카엘이 그녀의 입을 막아 버렸던 것이다. 자신의 입으로.
들뜬 열기가 그녀의 몸에 자리했다. 레티시아는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이제는 능숙해진 미카엘의 움직임에 따라 찌릿찌릿한 전율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커흠, 크음.”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레티시아와 미카엘은 불에 덴 것처럼 떨어졌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몸이 그녀의 시야를 막고 있어 상대방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폐하. 하지만 안건이 안건인지라…….”
레티시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는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애슐리!”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부끄러움이 극에 치달을 텐데,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내 왔던 애슐리에게 미카엘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고 생각하니 수치심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애슐리는 그녀의 결혼식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황제의 결혼식이라면 당연히 예비 황후와 친하며 직위가 높고 덕망이 있는 귀족 부인이 도맡았을 것이다.
하지만 친한 귀족 부인은커녕 귀족 영애조차 없는 레티시아는 애슐리에게 부탁해 버렸다.
이제는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긴 다이애나가 떠오르긴 했으나, 황제의 전 약혼녀에게 결혼식 준비를 맡긴다면 다이애나의 체면을 완전히 손상시키는 격이었다.
정작, 다이애나는 그 사실에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성정이라는 게 우스웠지만.
“무슨 일이지?”
“폐하, 신관들이 축성을 해야겠다면서 몰려오고 있습니다.”
“하필 지금?”
미카엘은 대놓고 기분 나쁜 티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레티시아와 함께 신전에 발을 들이면서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명했으니까.
달갑지 않은 불청객은 혹시 모를 자객으로 충분했다.
“모두 돌려보내.”
“그리고…….”
애슐리는 잠시 뜸을 들였다.
“15분 후에, 패트리 왕국의 사신과의 접견이 예정되어 있다고 새로 오신 비서님이 제게 전해 달라고 하던데요.”
“미뤄.”
“…알겠습니다.”
레티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카엘을 올려다보았다.
“패트리 왕국이면 제법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니에요? 품질 좋은 광산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금속 공예도 발달했고.”
“접견을 하루쯤 미룬다고 해서 큰일이 나진 않아.”
“하지만 사신의 감정이 상할 텐데요. 에버딘 씨도 얼마나 난감하시겠어요?”
에버딘은 미카엘의 새로운 비서였다.
미카엘의 비서들은 일주일을 채 견디지 못하고 제 발로 그만두었기에, 에버딘 역시 들어온 지 사흘이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미카엘의 비서들은 ‘새로 온 비서’로 불리곤 했다.
어차피 나갈 텐데, 이름을 기억해서 뭐 하겠냐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미카엘의 비서로 오랫동안 일해 온 레티시아는 그들의 이름을 모조리 기억했다.
이번 사람만큼은, 좀 더 오래 있어 주길 바라면서.
“나도 기억 못 하는 성을 네가 기억하다니……. 들으면 기뻐하겠군.”
“본인 비서 이름 정도는 기억해야죠. 자랑스럽게 말하지 말아요.”
“…기억하지, 에버딘.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접견도 미루지 말고 지금 해요.”
“싫어도?”
“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미뤄서 어쩌면 금속 광산을 공짜로 얻을 기회를 놓쳐 버릴 수도 있잖아요.”
“…누가 사업가 아니랄까 봐.”
미카엘이 대놓고 투덜거렸다.
“그리고 금속 광산 따위는 지금도 차고 넘쳐.”
레티시아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혹시 모르는 거죠. 나중에 패트리 왕국에서 얻은 금속 광산이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 될 줄, 누가 알겠어요?”
“…알겠다.”
미카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나와 빨리 떨어지고 싶은 모양이니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황후 폐하.”
“접견하러 가세요.”
레티시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금속 공예 장인 좀 받아 오세요.”
“왜?”
미카엘이 흥미롭다는 듯한 시선으로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사업에서 완전히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거든요.”
***
일주일 후.
전 대륙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황제와 새롭게 떠오르는 희망의 상징인 성녀의 결혼식은 무사히 치러졌다.
암살 시도가 있기는 했으나, 레티시아가 그들의 모습을 보기도 전에 유능한 기사들이 암살자들의 머리를 잘라 버렸다.
“멍청한 것들입니다.”
기사단장이 깍듯이 설명했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 성녀님이 계시는데, 이깟 것들이 뭘 하겠다고…….”
레티시아는 애매하게 웃었다.
확실히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되자 그 뒤로 암살 시도에 초연해진 건 사실이었다.
정확히는, 미카엘을 향한 암살 시도에.
“레티시아 님, 이제 나가실 시간입니다.”
애슐리가 차분하게 알려 주었다.
레티시아는 ‘레티시아 님’이라는 호칭에 씩 웃었다.
그녀는 몇 안 되는 친하게 지낸 지인들에게 자신의 공식 직함이 무엇이든 간에 예전처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성녀와 황후라는 자리가 그녀를 완전히 정의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내 일부기는 하지.’
그러니 부정하는 것 역시 안 될 말이었다.
레티시아가 발걸음을 옮기자 길고 우아한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끌려 움직였다.
동시에 금속 장신구들이 서로 부딪쳐 맑은 소리를 냈다.
패트리의 금속 공예 장인들의 작품이었다.
그들은 드레스에 금속 장신구를 달아 달라는 예비 황후의 요구에 어리둥절한 듯했지만, 그래도 레티시아의 지시대로 만들어 주었다.
레티시아는 그 결과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풍성한 레이스 장식 속에 숨겨진 금속 장신구들은 서로 부딪쳐 맑은 소리를 냈고, 신전 안에서 청아하게 울릴 것이다.
“너무 아름다워요.”
애슐리의 감탄에 레티시아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아마 지나치게 화려한 드레스에 폭 싸여서 빨강 머리 소녀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 역시 레티시아가 의도한 대로였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레티시아는 자신의 존재가 제국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포악한 폭군을 변화시킨 상냥한 성녀.
위엄 있고 냉철한 황후의 이미지에 대한 욕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대중이 원하는 여리고 평범한 젊은 처녀로 보여야 한다.
식이 치러지는 회랑에 발을 들이기 일보 직전.
애슐리가 떨리는 손으로 두터운 베일을 덮어 주었다.
총 세 겹의 베일은, 한 장은 레티시아가 직접, 또 한 장은 대신관이,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은 미카엘이 걷어 내게 될 것이다.
레티시아는 회랑을 천천히 걸어갔다. 수많은 하객들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베일 탓에 누가 누구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바보 같은 전통이야.’
레티시아는 투덜거리면서 힘겹게 한 발자국씩 걸어 나갔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누가 뭐래도 베일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마침내 카펫의 끝에 도달했을 때.
익숙한 손이 그녀를 휘어잡았다.
“……!”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분명, 이건 절차에 없었던 것 같은데……?’
대신관의 당혹한 헛기침을 들으니 미카엘의 돌발 행동인 듯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미카엘이 베일을 한 손으로 모조리 뜯어 버렸다.
“불편해 보여서.”
미카엘이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레티시아는 쿡쿡거리면서 웃었다.
“고마워요.”
“예……. 아내와 신과 남편의 동의가 모두 확인되었으니, 저는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증인과 이 세상 어디에서나 존재하시는 전지전능한 신께…….”
다행히 대신관은 정신을 차리고 정해진 축사를 읊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그 역시 바보 같은 전통이라고 생각했다.
신은, 거추장스러운 말들에 의해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레티시아는 자신과 미카엘을 향해 쏟아지는 축사를 즐기려고 노력했다.
그녀와 미카엘이 부부로 맺어지는 순간은,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까.
마침내 긴 축사가 끝나고.
마지막 의식이 남아 있었다.
바로 맹세의 입맞춤이었다.
“존귀하신 데브란트 제국의 황제 폐하, 미카엘 소넷…….”
미카엘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기가 무섭게 레티시아를 품에 끌어안았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단단한 품과 부드러운 입맞춤, 그리고 경악의 웅성거림마저도 달콤하게 받아들이면서 생각했다.
이제, 남은 건 행복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