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외전 3. 미카엘, 5세
“…좋은 일거리라는 게, 겨우 애새끼 하나 키우는 거였습니까?”
헨드릭 누르는 대놓고 심기 불편한 티를 냈다.
아무리 부상으로 인해 몇 년간 쉬었다고 한들 그는 한때 데브란트 제국에서 제일가는 용병이었다.
그런데 단장이 직접 나서서 물어 왔다는 좋은 일거리가 어린애 하나 키우는 거라니.
“그냥 애새끼가 아니니까 말조심하게, 헨드릭.”
단장은 비스듬히 다리를 꼬고 헨드릭을 올려다보았다.
“귀하신 몸이야.”
“얼마나요?”
“이번 의뢰주가 누구인지 아나?”
“말씀을 안 해 주셨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황제 폐하야.”
“……!”
헨드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제 폐하께서 맡기신 일이라면…….”
“그래, 미래의 황태자다.”
“세상에!”
헨드릭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처음에는 철딱서니 귀족 도련님을 애지중지하는 부모의 의뢰인 줄 알았는데, 상대가 황제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제게 맡길 만하군요.”
“당연하지. 최고의 용병을 내놓으라길래 내 자네를 바로 떠올렸어, 헨드릭 누르.”
“…….”
헨드릭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뻔한 아부였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암살 시도들을 막아 내는 데 저만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 그리고…….”
단장이 황실에서 받은 문건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 하나 이상한 게 있는데.”
“뭡니까?”
“황태자… 아니, 지금은 그냥 미카엘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절대 말을 걸면 안 된다는군. 친절하게 행동해서도 안 되고. 유대감을 형성할 만한 일은 절대 하지 말래.”
“흐음.”
헨드릭은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용병들을 무슨 간신배 꿈나무로 보는 모양입니다.”
“그런 모양이야.”
단장이 동의했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 어릴 적 친분 탓에 나라 말아먹은 황족들이 워낙 많으니. 여튼, 황태자의 교육이야 유모들이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가서 암살자들이나 족쳐.”
“알겠습니다.”
일주일 후.
헨드릭 누르는 미래의 황태자가 기거한다는 별장에 도착했다.
‘여기가… 맞나?’
헨드릭은 얼굴을 찌푸렸다.
별장은 황족은커녕 가난한 준남작도 살지 않을 정도로 다 쓰러져 가는 폐가에 가까웠던 것이다.
‘뭐, 이런 시골에 휘황찬란한 별장이 있으면 이상하긴 하겠지.’
나름 암살 시도를 막으려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헨드릭은 별장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내가 이겼어!”
“뭐? 이 사기꾼 새끼가……!”
“잔말 말고 반지 내놔. 네 할아버지가 하는 거든 아니든, 전당포에 잘 팔아먹으마.”
“이 개새끼가! 방금 네 무릎 위로 떨어진 건 뭐냐?”
헨드릭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형적인 용병 모임이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황태자의 교육에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다들, 뭘 하는 거지?”
“아, 신참 왔군.”
조금 전 반지를 딴 듯한 용병이 자리에서 일어나 헨드릭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헨드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담배와 술 냄새가 진하게 나는 것이, 임무는 뒷전이고 노는 것에만 집중한 듯했다.
헨드릭이 가장 혐오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정신 빠진 용병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손을 내밀어, 상대와 악수했다.
“헨드릭 누르.”
“헨드릭? 그 헨드릭? 설마!”
수군거림이 퍼져 나갔다.
익숙한 반응에 헨드릭은 쓴웃음을 지었다.
“복귀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여기로 올 줄은…….”
“복귀 후 첫 임무다.”
“잘 오셨군요. 요양하기에 딱 좋은 임무죠.”
헨드릭은 상대의 목소리에 무언가 자조적인 기색이 어려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암살자들이 들락날락거릴 것처럼 보이는데.”
“아, 딱히 그렇지도 않아요. 처신만 잘한다면.”
“누가?”
“우리죠. 그리고 이젠 당신도 포함이고요.”
“…무슨 처신 말하는 거지?”
“오기 전에 주의 사항 듣지 않았습니까?”
“그 뭐, 미카엘 황자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정확합니다.”
사기꾼 용병은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친하게 지내라는 게 훨씬 더 어렵지.”
“보면 압니다, 보면 알아.”
사기꾼은 손뼉을 짝짝 쳤다.
“자, 여기 그 헨드릭 님께서 오셨는데… 한 판 더 할 사람?”
헨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도박을 좋아하지 않아.”
“도박을 싫어하는 용병이라니, 무슨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 같은 소리를 합니까? 그러지 말고 한번 앉아 보세요.”
헨드릭은 더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느꼈다.
그는 등을 돌려 그 자리에서 걸어 나갔다.
별장을 좀 더 살펴볼 생각이었다.
어쨌든 황자를 지키기 위해서는 별장 구조를 파악해야 하니까.
그래서 헨드릭은 뒤에서 일어나는 수군거림의 내용은 하나도 듣지 못했다.
조금 전, 헨드릭에게 말을 붙여 보려고 애쓰던 용병이 입을 열었다.
“저렇게 아까운 용병 하나가 또 사라지겠군.”
다른 한 명이 낄낄거렸다.
“사라지진 않지. 시체는 여기로 돌아오잖아? 그것도 목이 매달려서.”
“좋아. 헨드릭 누르가 여기서 얼마나 버틸지를 두고 내기할 사람?”
웬만한 도박보다 더 재미있어 보이는 내기에 용병들이 달려들었다.
***
헨드릭은 별장 전체를 꼼꼼히 살폈다.
‘생각보다는 방비를 잘해 뒀군.’
처음 본 겉모습은 흉가나 다름없었는데, 꼼꼼히 살펴보니 암살자들을 차단할 만한 다양한 함정과 방어막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용병들이 저렇게 게으르게 놀아도 아직 황자가 무사한 것이라고, 헨드릭은 생각했다.
부시럭.
그때, 오래 방치된 나머지 아무렇게나 자라난 잡초 더미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헨드릭은 곧바로 그 잡초로 성큼 다가갔다.
소리의 크기를 들었을 때 동물인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경계를 소홀이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잡초 더미에 손을 덥석 집어넣었다.
무언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갗이 손에 잡혔다.
“엥……?”
잡초 더미에서 나온 건, 웬 꼬맹이였다.
한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마르고 더러운 아이.
헨드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카엘 황자도 다섯 살이라고 했었지.’
순간, 미카엘 황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황자라기엔 너무 꾀죄죄한 모습이었다.
‘사용인의 아이가 길을 잃었나 보군.’
헨드릭 누르는 정말로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것과 보호자 없이 돌아다니는 어린아이를 방치하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다.
그래서 그는 아이를 향해 최대한 부드럽게 물었다.
“얘야, 네 부모님은 어디에 있느냐? 당장 찾아 주마.”
부모가 누구든, 애 좀 씻기라고 따끔하게 얘기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하지만 돌아온 건, 침묵이었다.
‘너무 겁을 먹었나 보군.’
헨드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그는 우락부락한 몸매에 세월과 전투가 준 흉터들을 훈장처럼 얼굴에 자랑스럽게 뽐내고 있었으니까.
물론 헨드릭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제법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오히려 기생오라비 같은 용병들을 비웃기도 했고.
하지만 어린아이를 다루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외모임은 분명했다.
“이름만 말해 봐, 이름만.”
“…….”
또다시 침묵.
“너, 벙어리냐? 맞으면 고개 좀 끄덕여.”
소년은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헨드릭은 작게 중얼거리면서 소년을 자신의 어깨에 들쳐 멨다.
아까 그 미덥지 않은 용병들에게라도 물어볼 생각이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 사용인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같은 용병 쪽이 좀 더 편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소년을 업은 채 용병들이 아직도 정신없이 도박을 하고 있는 마당에 도착했다.
그는 도박판에 거의 코를 처박고 있는 용병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저기, 이 꼬맹이가 대체 누구야? 물어도 말을 안 하길래……. 부모한테 데려다주려고.”
“……!”
사방이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헨드릭 누르는 무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오랜 경험으로 다져진 직감이, 그의 크나큰 실수를 알려 주었다.
“설마…….”
용병들이 일제히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헨드릭은 천천히 아이를 내려놓고, 생김새를 살폈다.
아무런 보살핌을 받지 않아 꾀죄죄하긴 했으나 어딘가 익숙한 것이…….
‘아.’
헨드릭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는 이 얼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바로 황족들을 호위하면서.
“…갑시다.”
사기꾼 용병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자고? 여기 혼자 내버려 두고? 유모라도 불러야…….”
“그냥, 갑시다.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사기꾼 용병은 더는 능글거리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정말로 심각해서, 제아무리 헨드릭 누르라도 더는 반박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결국 헨드릭은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 한 명을 잡초투성이 마당에 뎅그러니 남겨 둔 채.
잠시 후, 소년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헨드릭 누르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더 갑시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못 돼요.”
“아니, 여기서 듣겠다.”
헨드릭은 팔짱을 꼈다.
더 나가면 별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완전한 직무 유기인 셈이다.
사기꾼 용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저를 탓하진 마시고요. 알겠죠?”
“약속하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기꾼 용병은 헨드릭을 빤히 쳐다보았다.
“…헨드릭, 당신처럼 하는 사람들은 금방 잘립니다.”
“잘려도 상관없는데.”
“머리가 잘려도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