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외전 4. 뜻밖의 재회
데브란트 제국의 황후, 레티시아 우즈 데브란트의 어느 하루는 새벽 5시에 시작되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일찍 일어나라고 강요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미카엘이 그 시간에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좀 더 자.”
미카엘이 부드럽게 레티시아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면서 말했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됐네요. 이미 다 깨버렸는걸요.”
기왕 깨버린 잠이다.
아침을 홀로 보내는 것보다는 미카엘과 함께 보내고 싶었다.
게다가, 레티시아는 미카엘과 함께 일하는 일상을 되찾았다는 점이 그 무엇보다도 반가웠다.
“네가 할 일은 없어.”
레티시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의 미카엘은 무언가 좀 이상했다.
“그럼, 미카엘이 일하는 모습이나 구경하죠.”
미카엘은 얼굴을 찡그렸다.
마치,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 것처럼.
“밖으로 시찰을 나갈 거야.”
레티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꼭두새벽부터요?”
“꼭두새벽에 나가야지. 낮에 나갔다가는 무슨 소란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러니 넌 여기서 얌전히…….”
레티시아는 코웃음을 쳤다.
미카엘은 무언가 자신에게 숨기고 싶은 게 있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말을 돌리곤 했다.
하지만 그 수법에 수없이 속아넘어간 지금, 레티시아는 마땅한 해결책 역시 알고 있었다.
“저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황제 폐하께서 사라졌다고 소란을 피우겠어요.”
미카엘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한 마디도 지지 않는군.”
레티시아는 대답 대신 쿡쿡 웃었다. 어찌 되었건 결혼 이후, 미카엘은 그녀에게 져 주기만 했다.
레티시아는 새롭게 손에 넣은 황후의 권력을 허투루 흘려보내는 타입이 결코 아니었다.
“준비할게요.”
잠시 후.
그들은 함께 말을 달려 황궁을 빠져나왔다. 레티시아의 붉은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완연한 여름이었지만, 새벽은 아직도 시원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달리던 미카엘이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었다.
“다왔어.”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미카엘이 멈춰선 곳은 웬 다 쓰러져가는 폐가였다.
시찰이라는 말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은.
‘시찰은 핑계였구나.’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안으로 들어갈 건가요?”
“겁이 나는 건가? 천하의 황후 폐하께서?”
레티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앞의 폐가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모양새였다.
2층짜리 시골 저택은 한때는 제법 떠들썩하고 사람냄새가 나는 모습이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귀신이 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흉가일 뿐이다.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들어.’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손을 잡아당겼다.
“왜 가야 하는데요?”
“만날 사람이 있어.”
“…사람이라고요?”
너무 놀란 나머지 샛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기 싫으면 들어가지 않아도 좋아.”
“…가겠어요.”
레티시아는 생각을 바꾸었다.
그래, 그냥 예감일 뿐이었다.
게다가…….
‘미카엘이 혹시라도 홀로 위험에 처하는 건 싫어.’
그가 위험에 처한다면 그의 곁에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아냐. 생각해보니… 너는 그냥 여기에 있는 게 좋겠어. 얼마 걸리지 않을 테니까.”
미카엘은 얼마나 급했는지, 조금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레티시아는 그를 노려보았다.
“뭔가 숨기는 게 있군요. 그렇죠?”
“…그럴 리가.”
“그래요? 그럼 같이 들어가요.”
조금 전 느꼈던 두려움은 온데간데 없었다.
레티시아는 이젠 묘한 오기에 이끌려 미카엘의 손을 붙잡았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폐가 안으로 들어섰다.
진한 먼지 냄새에 레티시아가 콜록거렸다.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나가도 좋아.”
“컥, 그런 말에, 제가, 속을 줄 알고……!”
레티시아는 오히려 미카엘의 손을 더욱더 단단히 쥐고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 분 후.
그들은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랐다.
“정말로 이런 곳에… 사람이 있다고요? 절 속인 게 아니고요?”
미카엘이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그들의 발치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아악!”
레티시아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단순히 웬 물체가 바로 코앞에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 허리를 굽히고 있는 인영이, 분명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슨…….”
레티시아는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늦었군.”
미카엘이 차갑게 한 마디 내뱉었다. 어둠 속에서 인영이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그것 참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황제 폐하.”
“……!”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잘 아는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테렌스 경.
그제야 그녀는 미카엘이 왜 아침부터 기이하게 움직였는지, 자신을 왜 이 곳에 들이고 싶지 않아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레티시아가 옛 구혼자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바보같아.’
레티시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결코 테렌스 때문이 아니었다.
미카엘의 다소 유치해보이기까지 하는 질투 때문이었다.
‘이거, 다 뻔히 눈에 보일 건데…… 신경을 쓰지 않는 걸까.’
그녀의 머릿속은 아는지 모르는지, 테렌스는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황후 폐하.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네.”
그녀는 입술을 달싹여 작은 대답을 만들어내었다.
미카엘은 대놓고 못마땅한 목소리로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레티시아, 황후가 일개 귀족 자제 나부랭이에게 존대를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말에 당황할 레티시아가 아니었다.
“그럼 반말을 할까요?”
레티시아는 ‘반말’에 힘을 주었다.
기실, 그녀가 편하게 대하는 이는 데브란트 제국에 몇 없었다.
그런데 테렌스 경을 그 중 한 명으로 취급하라니…….
과연 미카엘에게 즐거운 결과물일까?
“저야 상관없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제게 존대를 하시든, 반말을 하시든. 즐겁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레티시아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옆에서 그녀의 기를 살려주는 테렌스 경까지 합세하니, 그야말로 미카엘을 궁지에 몰아넣은 형국이었다.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게 좋겠군.”
“황제 폐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레티시아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진실을 알고 나니 이렇게 쉽고 우스워 보일 수가 없었다.
미카엘은 테렌스를 웬 비밀 임무에 내보냈던 모양이었다.
비밀스럽게 보고를 받기 위해서 황궁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폐가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하필 레티시아가 따라온 것이고.
‘어쩌면 운명일지도 몰라.’
사실 레티시아는 보통 미카엘이 그렇게까지 거부하면 물러나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왜인지 그에게 따라붙고 싶었다.
그 결과가, 테렌스 경이라는 모습으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오랜만에 만나니 더욱 반갑군요.”
“저야말로…….”
테렌스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비트너 왕국에 잠입시켰어.”
“……!”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비트너 왕국이라니.
그들은 대륙에서 가장 호전적인 자들 중 하나라, 제국의 스파이들의 무덤으로 유명했다.
그런 곳에 테렌스 경을 보내다니.
“…살아 있는 게 다행이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테렌스 경이 그녀의 생각에 동의했다.
“몇 번이고 정말 죽는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저는 이렇게 살아돌아왔죠. 황제 폐하께서는, 그다지 기쁘시진 않겠지만.”
“…미카엘, 일부러 테렌스 경을 죽으라고 보낸 거에요?”
“아니.”
미카엘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지만 레티시아의 귀에는 긍정이나 다름없는 목소리로 들렸다.
“미카엘!”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한 번만 더 테렌스 경을 사지로 보내면……!”
레티시아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과거에 테렌스가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고, 그녀가 그의 구혼에 흔들렸다 한들 이미 다 지난 일이다.
정 보기 싫으면 아예 황궁으로 부르지도 말 것이지, 이게 무슨 유치한 짓거리란 말인가.
심지어 둘은 한때 사제의 연을 맺었던 사이가 아닌가.
“저는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
테렌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 그렇게 분노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원했던 것이기도 하니까요.”
“…경이, 원했다고요?”
“예.”
테렌스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업이… 그렇게 되고 난 이후, 저희 가문은 상당한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제가 공적을 쌓지 않는다면 제법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었죠. 그 기회를 주신 게 황제 폐하고,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레티시아는 잠시 목이 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죄책감이 가슴을 꽉 옥죄었다.
그녀가 사업을 내던지지 않았더라면, 테렌스의 가문이 휘청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괜찮은가요?”
“괜찮습니다.”
테렌스가 레티시아를 무심코 바라보다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음울한 기색을 눈치챈 듯 황급히 자신의 말을 수습했다.
“황후 폐하, 결코 제게……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폐하 덕분에 저희 가문은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으니까요. 아직 부는 조금 멀었긴 하지만…….”
“되찾아줄게요.”
“예?”
미카엘이 대놓고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오는 게 느껴졌지만, 레티시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건 그녀가 갚아주어야 할 빚이었다.
“부도, 되찾아주겠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