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레티시아는 진지했다.
오히려 여태까지 테렌스 경의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는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떻게 내가 모를 수 있었을까.’
그녀가 미카엘과의 달콤한 신혼에 젖어 있는 사이, 테렌스 경은 위험한 임무들 속에서 고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테렌스는 난색을 표했다.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레티시아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만약, 그가 미카엘의 질투를 염려하여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거라면…….
그녀는 미카엘을 윽박질러서라도 테렌스 경을 도와줄 것이다.
테렌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 폐하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
“제가, 무슨 이유를 걱정하는지 궁금하네요.”
“…황제 폐하의 진노를 걱정하시는 게 아닙니까.”
레티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놓고 말을 하다니.
테렌스는 신중하고 다정다감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판단에 수정을 가해야 할 듯했다.
이건…….
심술이 아닌가.
그녀는 홀낏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미카엘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한 눈치였다.
‘화를 내지는 않아서 다행이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제법 많은 일들에 관여할 수 있었지만, 그가 진심으로 화를 낼 땐 말리기 힘들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그가 화를 낼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테렌스 경, 조금 지나친 것 같은데요.”
“…저는 사실만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테렌스 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만약 황후 폐하께서 저희 집안을 도와주신다면 처음에야 좋겠지요. 번성을 구가할 겁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 지금처럼 저를 잊기라도 하신다면요? 그 순간 모든 게 물거품이 되겠지요.”
“…….”
“황후 폐하, 저는 겨우 제 가문을 본궤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걸 물거품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레티시아는 테렌스를 바라보았다.
무례한 말이다.
만약 이 말이 신하들 앞에서 나왔더라면 그녀는 황후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테렌스을 감옥에 가두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미카엘과 테렌스의 비밀 접선 장소.
더군다나 테렌스가 얼마 전까지 미카엘을 위해 목숨을 걸고 위험한 임무에 뛰어들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코 그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테렌스의 말이…….
틀리지는 않다는 사실은,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
레티시아는 입을 열었다.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가 작고 어두운 공간에 울렸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레티시아는 테렌스의 경고를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녀는 황후다.
옛 인연들을 완전히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는 지워 낼 필요가 있었다.
불행히도 테렌스 경 역시, 그중 하나였고.
“하지만 내가 도와줄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
“알겠습니다.”
테렌스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시아는 미카엘과 함께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느라 남겨진 테렌스의 표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테렌스에게는 퍽 다행이었다.
그는 레티시아에게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들킬까 봐, 필사적으로 어둠 속에 몸을 숨겼으니까.
***
“그래, 이번에는 대체 무슨 일이냐? 한번 말해 봐.”
“…….”
테렌스는 원망스럽게 자신의 친우를 째려보았다.
“이거, 단단히 꼬였구만.”
그의 친우, 폰더가 킬킬거렸다.
“분명 이번에도 우리의 대단하신 황제 폐하와 관계된 일이겠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리고 입조심해라. 내가 폐하께 사사건건 보고해서 네 머리통을 날려 버리기 전에.”
“그걸 협박이라고 하냐?”
폰더가 대놓고 비웃었다.
“폐하께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분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안다. 특히 성녀님이 황후 폐하가 된 이후에는…….”
테렌스는 최대한 자제하려고 하지만, 폰더가 레티시아를 지칭할 때마다 경련하는 자기 자신을 어쩔 수가 없었다.
“뭐야, 결국 문제는 폐하가 아니었군. 너 설마…….”
“닥쳐.”
테렌스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정말로 내가 너를 죽이기 전에.”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황후 폐하께서 살려 주실 텐데.”
테렌스는 기가 막혀 폰더를 쏘아보았다.
“넌… 황후 폐하의 힘이 너 같은 것을 위해 쓰이는 것인 줄 아나?”
“그럼 누굴 위해 쓰는데?”
폰더가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설마, 너는 아닐 거고.”
“…….”
테렌스는 다시금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탁자 위에 머리를 박았다.
레티시아는…….
행복해 보였다.
자신과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안정된 지위와 상황이 주는 행복감이라는 게 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때, 그 역시 느꼈던 종류의 행복감이니까.
레티시아 우즈의 곁에서.
인정하기 싫지만 레티시아에겐 미카엘 소넷 데브란트만큼 좋은 배필도 없었다.
하지만 테렌스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큼은 먼 미래의, 성숙한 자신에게 맡겨 두기로 했다.
“한탄 다 끝났으면 돈 좀 빌려줘.”
“…뭐 하러.”
“알 게 뭐야? 돈이라면 썩어 날 정도로 많은 분께서.”
테렌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사실, 레티시아에게 말한 자신의 상황은 대외적인 면모일 뿐이었다.
실제론 테렌스는 상당히 부유했다.
아니, 제국에서 제일가는 부자 중 한 명이었다.
미카엘의 임무들엔 재력도 상당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테렌스는 황실의 비공식적인 거래들을 모조리 맡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부가 손에 들어왔다.
비록 공식적으로 나설 수 있는 방법으로 얻은 돈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귀족들은 테렌스와 그의 가문을 퍽 딱하게 보았지만, 테렌스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냥 줄 순 없지. 뭘 해 줄 수 있는데?”
“…네가 가기 싫은 곳, 대신 가 줄게.”
테렌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론 가기 싫은 곳이야 많았다.
하지만 개중 가장 꺼려지는 곳은…….
황궁이었다.
“정기 보고 좀 대신 해 줘.”
“정기 보고를? 내가?”
폰더가 질린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
테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것 없어. 보고서를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어차피 중요한 것도 아니라서, 자료실에 처넣고 끝이 거야.”
“그렇게 쉬운 걸 내게 시키겠다고?”
“그럼 중요한 걸 시키겠냐?”
폰더는 믿을 수가 없었던 모양인지 몇 번이고 정말 서류 전달만 해도 되는 건지, 갔다가 이상한 곳에 붙들리는 건 아닌지 되물었다.
테렌스는 그때마다 한숨만 폭폭 내쉴 뿐이었다.
사실, 일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장소였다.
레티시아가 기거하는 황궁이라는 게, 그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아무리 레티시아를 알기 전부터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황궁이라도 해도, 그녀가 제국의 황후가 된 이후부터는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약속이다. 절대 물리면 안 돼. 알겠지?”
마침내 테렌스의 말에 넘어간 폰더는, 이번에는 그가 말을 바꿀까 봐 걱정이 되어 연거푸 다짐받았다.
그만큼 그에게는 거저 먹는 거래였던 것이다.
테렌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시아와 같은 공간에 있는 걸 피한다는 덴,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
황궁으로 돌아온 미카엘은 내내 기분이 좋아 보였다.
레티시아는 그 이유를 모를 수가 없었기에 기분이 저조했고.
‘테렌스…….’
한때 그녀의 애인이 될 뻔한 남자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어쨌든, 테렌스 경은 그녀의 은인이자 친구였다.
그런데 현재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하지만 그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그녀의 도움조차 거부하니, 레티시아로서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일 수밖에 없었다.
“…레티시아.”
미카엘이 그녀의 뒤로 불쑥 다가왔다. 레티시아는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피했다.
지금 당장은 그를 상대하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미카엘은 제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레티시아는 명확히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혼자 있고 싶어요.”
“…그 남자 때문에?”
레티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카엘은 당연히 테렌스 경의 이름을 알 것이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 ‘그 남자’로 지칭한다는 건, 그녀와 테렌스의 옛 관계를 들추는 것이었다.
레티시아는 기가 막혀 되물었다.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그래.”
순순한 대답에 맥이 탁 풀렸다.
“저는 미카엘과 결혼했어요. 테렌스 경은… 예전에 신세를 졌는데, 지금 저 때문에 가세가 기운 것 같아서 안타까운 것뿐이고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무슨 질투를…….”
미카엘은 그녀를 빙글 돌려 입을 막았다.
…그 자신의 입으로.
레티시아는 어이가 없어 미카엘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이내 그의 부드러운 기술에 항복하고 말았다.
한참 동안 서로를 달콤하게 탐닉한 이후.
레티시아는 숨을 헐떡이며 미카엘에게 속삭였다.
“아직도, 질투해요?”
“…전혀.”
레티시아는 안도했다.
테렌스 경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미카엘의 오랜 짐 중 하나가 테렌스에 대한 질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카엘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사랑해요, 미카엘.”
미카엘은 한결 거칠어진 움직임으로 응답했다.
레티시아는 쾌락 속에 잠기면서 생각했다.
자신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