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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1화 (130/150)

외전 11화

“여태까지 미카엘이 피임약을 먹어 왔던 이유가 있긴 한지, 정말 궁금하네요!”

레티시아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일주일 전 문제의 사건 이후, 미카엘의 어물쩍 넘어가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레티시아는 한 다섯 번까지는 세었다가, 그 이후로는 세는 것마저 포기해 버렸다. 어차피 미카엘과 자신의 자꾸만 되풀이되는 대화에는 진저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

미카엘은 시선만 피할 뿐, 아무런 말도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팔짱을 꼈다.

“할 말 없으면 그냥 돌아가요. 저도 바쁜 사람이니까.”

아닌 게 아니라 레티시아는 정말로 바빴다.

항상 미카엘과 함께 움직여야 했던 비서 시절보다 업무의 강도는 덜했지만, 그래도 황후가 주관해야 하는 일들이 적은 건 아니었다.

“…네가 걱정이 되어서.”

마침내, 미카엘의 입에서 레티시아가 처음으로 듣는 말이 흘러나왔다.

레티시아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려고 했지만, 미카엘이 조금 더 빨랐다.

“네가 임신하면, 암살자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어. 아무리 네가 성녀라고 해도…….”

“그런, 이유였어요?”

레티시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히 자신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성녀니까.

더 이상 미카엘의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연약하고 무력하던 시절의 자신이 아니니까.

“네가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는 건 원치 않았어. 성력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미카엘은 고개를 들어, 레티시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레티시아는 그의 눈에서 쓰라린 감정을 읽어 내고는 흠칫했다.

‘정신 차려, 레티시아.’

그녀는 자신을 꾸짖었다.

자신이 결혼한 남자는 연기의 대가였다. 저 표정 역시 자신을 속이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조만간 우리가 완전히 안전해질 때가 온다고 생각했어. 그때 가서, 아이를 가지면 되지 않겠냐고…….”

오.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했다.

‘이건 거짓말이네.’

아무래도 미카엘은 그동안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듯했다.

“…그런 날이, 대체 언제 오는데요?”

“어…….”

미카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고뇌하는 천사의 모습이었지만, 레티시아는 속지 않았다.

“일 년쯤, 뒤?”

“…….”

침묵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야.’

좋든 싫든 눈앞의 남자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불과 몇 달 전, 그녀가 평생을 함께 살아가겠다고 맹세한.

그러니 의견이 서로 다를 때, 이렇게 그를 쳐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대화를 나누는 게 맞긴 맞았다.

비록 자신을 속인 괘씸죄는 용서하기 어려웠지만.

그래서 겨우 그 정도 이유로 이혼이라도 할 건 아니지 않은가.

“…절 속이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미카엘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일 년으로, 다 정리가 될 리가 없잖아요.”

“…….”

미카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있는 일에 대해서는 얄미울 정도로 척척 대답하는 달변가였으므로 지금은 정말 할 말이 없는 것임이 분명했다.

레티시아는 이마를 짚었다.

“말해 보세요. 3년? 5년? 언제까지 피임약을 저 몰래 먹으려고 하신 거죠?”

“…7년.”

“미카엘!”

“최대 7년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동안 저를 속이실 자신은 있으셨고요?”

“아니.”

미카엘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네가 낙담하는 모습 역시, 보기 싫었어.”

“그래서 속이는 방법을 쓰셨군요.”

“…미안해.”

이젠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황을 최악으로 끌고 온 건, 분명 미카엘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해 왔다는 이유로 계속 화만 내고 있을 수도 없었다.

“…알겠어요.”

“……!”

미카엘의 얼굴이 기쁨과 안도로 환하게 변했다.

“뭐… 딱히 틀린 생각도 아니었으니까요.”

만약, 미카엘이 허심탄회하게 그녀에게 지금은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면 레티시아는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직은 찾아오지도 않은 아이보다는, 그녀 자신의 목숨이 더 중했으니까.

문제는, 미카엘이 레티시아에게 상의 하나 하지 않고 속여 온 탓에 그녀를 완전히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었고.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비록 잘못했다고는 하나, 어쨌든 그녀를 위한 일은 맞았다.

‘이쯤에서… 용서해 줄까.’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자신은 미카엘의 약한 모습에 껌벅 넘어가는 게 문제였다.

차라리 미카엘이 적반하장으로 나오면서 버럭 화를 내었더라면 레티시아의 분노는 오래 갔을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이 줄곧 저자세로 나오니, 처음에는 아무리 벽처럼 닫혀 있던 마음이더라도 풀릴 수밖에 없었다.

미카엘이 레티시아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니… 아까 그 하녀는 내가 처리해도 될까? 네게 가장 시급한 위협 같은데.”

“안 돼요.”

레티시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암살자라기엔 너무 서툴러요. 말을 자주 엿듣긴 하는데, 그래 봤자 스파이 정도겠죠. 그렇다면 저 아이를 보내 온 후작가가 배후에 있을 거고요. 그냥 제거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아이예요.”

미카엘은 불만스러운 듯한 얼굴이었지만, 결국은 수긍했다.

“…그럼, 네게 맡기지.”

레티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저 몰래 제거하려고 하시면, 이번에는 정말로 화낼 거예요.”

“알았어, 알았어.”

미카엘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레티시아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럼 피임약은 내가 계속……?”

레티시아는 코웃음을 쳤다.

“피임약은 왜 먹어요? 할 일도 없을 텐데.”

“……!”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이마를 검지로 살짝 밀었다.

“피임약을 먹는다고 해서 임신 확률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때까지는 제 몸에 손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세요.”

미카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레티시아는 목소리를 살짝 낮게 깔았다.

“그러니까 하고 싶으면……. 열심히 일해 보시라고요, 황제 폐하. 7년 뒤에야 제 손을 잡아 볼 생각이 아니시라면.”

“…….”

그 순간, 미카엘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레티시아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요주의 중인 하녀, 제이나가 꽃에 반쯤 얼굴을 파묻듯이 한 채 비틀거리며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제이나는 거대한 꽃병에다가 장미꽃들을 간신히 집어넣은 이후, 숨을 헐떡이면서 외쳤다.

“황후 폐하, 이것 좀 보세요. 황제 폐하께서 꽃다발을 보내셨어요!”

“그래, 아름답네.”

아닌 게 아니라 커다란 장미 다발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붉은 장미의 꽃말은, 사랑이 아닌가.

레티시아는 살포시 웃었다.

비록 미카엘은 장미 다발에 그 흔한 카드 한 장 딸려 보내지 않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이미 한 선언을 접어 줄 생각은 없었지만.

제이나가 재잘거렸다.

“황제 폐하께서는 정말로 황후 폐하를 사랑하시나 봐요. 매번 다른 꽃다발이라니…….”

레티시아는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어느덧 꽃다발은 제이나가 도맡고 있었는데, 미카엘이 메시지를 전하겠다고 매일 거대한 꽃다발을 보내 오는 탓에 고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나는 싫은 티 하나 내지 않고 항상 자신의 일이 것처럼 기뻐해 주었다.

그녀의 뒷배인 후작가를 생각하면 마냥 곱게만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직 스파이인 게 확실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스파이라고 하더라도, 나름의 쓸모가 있는 법이고.

‘스파이들은 다루기 쉽지.’

레티시아는 여태까지 미카엘이 몇 이나 적의 스파이를 구슬려서 자신의 편으로 삼는 모습을 봐 왔다.

만약 그녀가 이 하녀를 구슬려 자신의 사람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미카엘이 생각하는 ‘안전한 시기’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것이다.

‘정말이지, 걱정도 많다니까…….’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만 같아선 ‘겁쟁이’라는 꽃말을 가진 꽃다발을 보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이 가진 공포의 근원적인 원인은 바로 자신이었기에, 레티시아는 그저 꽃다발의 답례로 간단하고 예의 바른 인사 카드들을 보내 주었다.

“황후 폐하, 오후 일정은 어떻게 할까요?”

“신전으로 가자.”

레티시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성력을 갈고닦아서, 그녀 스스로 자신과 아기를 지킬 힘을 가지게 된다면 미카엘의 생각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신관들이 입는 수수한 복장으로 갈아입을 준비를 했다.

“뒷문으로 들어갈 테니 그렇게 알려. 떠들썩하게 맞이한다면 당장 돌아가겠다고도 알리고.”

“네!”

한 시간여 후.

몸을 흰 천으로 칭칭 감은 레티시아는 신전의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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