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문이 열리기까지는 채 수 초도 걸리지 않았다.
젊은 신관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성녀님.”
레티시아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아무리 자신이 황후가 되더라도 이곳에서는 여전히 ‘성녀님’이었다.
딱히 어느 쪽이 특별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미카엘과의 갈등이 불거진 지금은 성녀라는 호칭이 반가웠다.
“대신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신관께서……?”
레티시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떠들썩하게 맞이한다면 당장 돌아가겠다고 알렸을 텐데.”
“아, 그런 게 아닙니다.”
젊은 신관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녀님께 자문을 구할 일이 있다고 하셔서…….”
“…알았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괜히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신전에 온 건 순전히 새롭게 생긴 성소를 관리할 신관들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직접 오지 않고 명령만 내려도 되겠지만, 그랬다가는 누가 가게 될지 알 수 없다.
사업가로서 얻은 소중한 지식들은, 레티시아에게 실무자를 허투루 뽑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알려 주었다.
하지만 신전에 일거리를 안겨 주는 게 아니라, 그녀가 신전에서 일거리를 받아 돌아가게 된다면…….
‘일단은 만나 보자.’
레티시아는 신관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본인들의 잇속을 챙기기 위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된다.
레티시아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들의 요구 혹은 부탁을 거절해 왔다.
신전은 처음에는 성녀가 어떻게 신전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냐며 펄펄 뛰었지만, 어쩌겠는가.
레티시아는 황후인데.
신전의 힘이 저 찬란했던 과거에 비해 보잘것없을 정도로 쪼그라든 지금,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레티시아였다.
그러니 아무것도 강요하지 못할 수밖에.
물론 레티시아도 신전과의 좋은 관계가 미카엘에게 도움이 되니 그들의 부탁을 무작정 거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레티시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자신은 평소보다 더욱 깐깐히 그들의 부탁을 살필 것이다.
잠시 후.
레티시아는 대신관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성녀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대신관님.”
머리가 하얗게 센 대신관은 자리에서 일어서 레티시아를 맞이했다.
레티시아는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예의를 차리는 사이는, 이미 그녀가 황후로 즉위한 직후 대신관과 핏대를 세우며 싸웠을 때 이미 끝났으니까.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저를 만나자고 하신 거죠? 가능하면 빨리 말해 주세요. 저 또한 할 일이 있어서 이곳으로 온 거니까.”
“…성녀님.”
대신관은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레티시아는 직감했다.
이번 부탁은, 거절할 부탁이다.
그 무슨 회유나 협박이 있어도……!
이때만큼은 레티시아는 황후라는 자신의 직위가 기꺼웠다.
황후인 자신을 회유할 당근은 없을 것이며, 협박으로 쓸 채찍도 없을 테니까.
“대신관이 되어 주십시오.”
레티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 이건 뭔, 헛소리란 말인가?
“대체 무슨 소리를…….”
“헛소리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럴 만도 합니다.”
대신관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제 말은 진심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대신관님은…….”
“저는 평신도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제는 늙은이가 은퇴할 때가 다 된 것이지요.”
“…….”
레티시아는 입을 꾹 다물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대신관에서 평신도라니.
신관의 지위마저 집어던지겠다는 말은 권력층에서 아예 물러나겠다는 말이다.
예전이면 모를까, 세력이 완전히 줄어든 지금의 신전엔 대신관이 유일한 구심점이었다.
‘뭐… 나도 있기는 하지.’
레티시아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자신과 대신관이 다르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일반적인 신자들의 구심점일 뿐, 신전의 구심점은 절대 되지 못했으니까.
“성녀님?”
대신관이 레티시아의 대답을 재촉했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만요, 이렇게 급작스럽게 말씀하시면…….”
“성녀님께도 나쁜 얘기는 아닙니다.”
대신관이 레티시아의 말을 끊었다.
“어차피 신전을 이용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기회에, 철저히 이용하십시오.”
“……!”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이 늙은 대신관이 얼마나 신전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성녀로 발현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직후.
황궁 무도회를 당당히 찾아와 황제의 약혼녀인 그녀에게 남들을 현혹시키는 힘의 정체를 밝히라고 을러댔으니까.
물론, 신성력을 실제 눈으로 확인한 이후에는 그 역시 레티시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놀라웠다.
대신관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으니까.
절대 자신처럼 운 좋게 발현한, 신앙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성녀에게 신전을 넘기지 않을!
그녀는 대신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늙고 지친 주름살 밑에, 날카롭게 빛나는 시선이 그녀의 시선과 마주했다.
그 순간.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이건…….
‘단순히 지쳐서 은퇴하고 싶은 사람의 소망이 아니야.’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왠지, 대신관의 의도를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생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려면…….
확인하는 수밖에.
레티시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신관님, 제가 대신관이 된다면 신전이 어떻게 될지, 모르시진 않을 텐데요.”
“잘 압니다.”
대신관이 코웃음을 쳤다.
그는 오래 서 있는 것만으로도 지쳤는지, 레티시아의 양해를 구하고는 의자에 다시 앉았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과거의 영광은… 이제는 영원히 과거의 것이 되겠지요. 이젠 그 누구도 신전을, 신을 우러러보지 않을 겁니다.”
“…….”
레티시아는 시선을 떨구었다.
대신관은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제가 평신도로 돌아가는 이유는.”
이번에는 레티시아가 대신관의 말을 끊을 차례였다.
“제게 전권을 넘기기 위해서겠군요. 누구의 방해도 받을 수 없도록, 영원히 신전에서 물러나 주시는 거고요.”
레티시아는 조용히 대답했다.
“잘 아시는군요.”
대신관이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만약 대신관이 평신관으로나마 신전에 남는다고 하자.
그 순간.
신전에는 두 가지 세력이 존재하게 된다.
비록 신분은 평신관일지언정 여태까지 신전을 이끌어 온 옛 대신관과, 새로운 대신관.
당연히 대중은 새로운 대신관인 레티시아에게 열광할 것이다.
‘하지만 신관들은 달라.’
레티시아는 대신관의 자리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다.
일반 대중, 일반 신도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대신관이 된다면… 신관들을 이끌어야 해.’
그때, 평신관인 옛 대신관이 신전에 남아 있다면 당연히 레티시아에게 방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단 하나였다.
대체 왜?
왜 대신관이, 자신과 완전히 반대되는 레티시아에게 신전을 넘기려고 하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결정은 레티시아와 황실에게만 득이 될 뿐이었다. 신전은 기존의 가치관과 모습은 모조리 잃게 될 것이고, 그와 반대로 황실은 종교를 뒤에 업고 승승장구할 것이다.
그 때문에 레티시아는 이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단 한 가지, 해결되지 않은 의문만 아니라면.
“왜, 제게… 넘기시려는 거죠?”
레티시아는 부디, 대신관이 자신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기를 바랐다.
그래야 자신이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신관은 말을 천천히, 신중하게 고르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신전은 어차피 소멸합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면, 아닌 듯했지만.
레티시아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신전의 소멸이라니.
레티시아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성녀님을 따르는 새로운 종교가 생기겠지요.”
“…설마요.”
레티시아의 목소리가 저절로 떨렸다. 그럴 리가 없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기존 신앙에 기반하여 따를 뿐이었다.
“성녀님.”
대신관이 그녀를 진지하게 불렀다.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
“물론, 모르실 수도 있겠지요. 성녀님께선 신도들을 기꺼워하지 않으시니까.”
“…….”
“하지만 저는 압니다. 아니, 일반 평신관들도 모두 느끼고 있는 문제입니다. 신전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더는 신전이 아닌 성녀님을 따르고 있다는 걸……!”
대신관의 목소리엔 어딘가 분노마저 엿보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지치고 노쇠한 대신관으로 보이지 않았다.
종교의 마지막 명운을 걸고, 거대한 도박에 뛰어든 지도자였다.
레티시아는 그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쳤다.
조금 전까지는 당황스러워 생각이 좀체 정리되지 않았지만,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천천히, 그러나 또렷이 레티시아의 말이 집무실 안에 울렸다.
“거절하겠습니다, 대신관님.”